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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양시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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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D 입체 마음테라피
사소한 일로 욕설까지 퍼붓던 선배… 분함과 억울함이 지워지지 않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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Q. 휴학 중인 여대생입니다. 전 친구들과 잘 지내는 편이고, 그동안 딱히 남에게 피해를 주거나 화를 살 일은 안 하고 살아왔어요. 그런데 지난해 학교에서 한 남자 선배가 제게 교수님 심부름을 대신 부탁한 적이 있습니다. 그땐 중요한 일이라 생각 못하고, 제 볼일을 먼저 보다가 선배로부터 ‘내가 만만해 보이냐’는 내용과 심한 욕설이 섞인 문자메시지를 받았습니다. ‘죄송하다’며 부랴부랴 시킨 일을 하러 갔지만, 알고 보니 그렇게 중요한 일도 아니었습니다. 일을 시킨 교수님께서 그렇게 말씀하시더군요. 그땐 너무 황당해서 화도 못 내고 정신없이 행동했습니다. 그날 집에 돌아오니 선배가 인터넷 메신저로 사과를 했습니다. “그래도 욕을 하면 안 되지 않느냐”고 하니 그 선배는 오히려 너는 욕을 더 먹어도 된다는 식으로 말해, 저 스스로 말을 말자 생각하고 메신저를 닫았습니다. 그 뒤 다른 일로 또 그 선배와 부딪쳤지만, 이런 사람과 부딪치면 손해라는 생각에 그냥 “네네” 하고 넘어갔습니다. 친구들에게 이 얘길 하면 왜 화를 안 냈느냐며 저를 나무랍니다. 하지만 저는 아마 화내라고 멍석을 깔아놨어도 잘 못 냈을 것입니다. 화내봤자 일만 커질 것 같았고 그럴 용기도 별로 없었으니까요. 그 당시에는 금방 잊혀지나 했었는데, 최근까지도 가끔 그때의 기억이 떠올라 저를 괴롭힙니다. 그따위 모욕을 듣고도 그냥 넘기려 했던 제게 너무 화가 나고, 그 인간이 너무 미워 끔찍하게 죽이고 싶을 정도입니다. 이런 생각에서 벗어나려면 어떻게 해야 할까요.
고민상담은 gomin@hani.co.k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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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기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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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는 화가 폭발하는 화로 변할 수 있어 →
남자 선배의 등장은 어쩌면 주인공에게 좀더 다양하고 험난한(?) 대인관계와 우리 안팎에 도사리는 ‘화’의 적절한 처리라는 과제의 등장을 알린 것 같습니다. 사연 속 정황만 본다면 여자 후배에게 그만한 일로 욕을 서슴없이 날리는 선배의 화 표출은 사려 깊지 못한 게 분명해 보입니다. 황당함과 모욕감을 겪고도 이전 방식대로 참고 넘겨버린 주인공께 그때 생긴 화는 시간이 지나도 사그라지긴커녕 상대를 죽이고 싶다는 상상을 할 정도로 고통스러운 크기로 자라버렸고요. 이제 나에 대한 화까지 더해진 내 내면의 분노를 어찌하면 좋을까요? 당장 가서 받아버리고 싶지만 지나친 양의 화 표출 못지않게 시기적절하지 못한 화 표출 역시 미숙해 보일 수 있으니, 다행히(?) 아직 얼굴 보고 지내는 사이라면 상대가 다시 비슷한 잘못을 할 때를 노려야 될지도 모르겠습니다.
문제는 다음에 이런 상황이 왔을 때입니다. 화를 내는 데 익숙하지 않은 주인공께서 상대처럼 욕설과 모욕을 주는 화를 내실 리 만무하고(물론 그 방법은 ‘비추’입니다), 그렇다고 더 이상 ‘네네’ 하고 우물쭈물 참고 넘기다간 더 거대해진 화덩어리가 어느 순간에 다른 상황의 다른 사람에게 부적절한 화 폭발을 하게 할지도 모릅니다. 그때 모습은 마치 그 남자 선배가 주인공께 한 그것과 닮아 보일 수도 있고요. 무엇보다 스스로 화를 내는 데 두려워하면 부적절하게 화를 내는 자신의 모습에 더 속상해질 수도 있죠.
결국 화를 지나치게 폭발하는 것도 감당하지 못하게 누르는 것도 다 ‘적절한 분노 조절’의 실패일 것입니다. 그러므로 당연하지만 어려운 해답은 화를 낼 때 내되 감정에만 치우치지 말고 적절하게 조절하는 것입니다. 최소한 주인공께서도 상대의 모욕에 화가 났다는 것을 분명한 어조로 알리고 적절한 사과를 요구하고, 그래도 막무가내일 경우 상대를 하지 않겠다고 선언한다든지… 하는 감정 폭발이 아닌 수단을 생각해보고 처리해야 할 것입니다. 나의 화난 기분을 상대의 방식과는 다르게 적절한 감정 조절을 통해 알렸다면, 그 뒤 설령 관계가 악화되고 상대가 내 욕을 하고 다닌다 해도 그때부턴 이 문제는 스스로의 얼굴에 침을 뱉고 있는 상대의 몫이 되겠지요.
정신과 전문의·미소정신과 원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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심영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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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스로의 수치심·죄책감에 용서를 →
그 남자 선배란 분, 강한 사람에게 약하고 약한 사람에게 강한 대표적인 경우라 할 수 있겠는데요. 게다가 좀 뭔가 배배 꼬여 있고, 자격지심투성이인데다, 한마디로 좀 이상한 것 같습니다. 살다 보면 피하는 게 상책인 유형의 사람들이 있어요. 심리학 용어로 흔히 ‘성격장애’를 가진 사람들이라고 하는데요. 심리학 전공한 사람들도 피하고 싶어하는 그런 유형의 사람들이죠.
하지만 불행하게도 피할 수 없는 상황들이 있습니다. 가족 중에 그런 사람이 있다면 가장 최악이고, 직장 상사나 지도교수가 그렇다면 두번째 최악이고, 그나마 학교 선배 같은 연장자가 그렇다니 이 경우가 제일 낫겠지요. 님의 화는 당연한 것입니다. 분노는 일상생활 속에서 흔히 겪게 되는 기본적이면서 매우 중요한 정서입니다. 자신을 보호하고 행동 가능한 에너지를 공급하는 기능을 하지요. 그런데 분노를 적절하게 표현하지 못하고 지나치게 억누르기만 하면, 낮은 자아존중감, 우울증, 죄책감 등 심리적 불편함을 느끼게 됩니다.
‘우는 아기’가, 엄마의 간절한 보살핌을 필요로 하기 때문에 우는 것처럼, 내 마음속의 ‘화’도 무엇인가 불편하다고, 돌봐달라고 소리치는 것입니다. 그러니 엄마가 우는 아기를 돌보듯 화가 날 때 화난 감정을 들여다보고 돌봐야 합니다. 이 경우 선배에 대한 이해와 용서보다는, 먼저 자신에 대한 이해와 용서가 필요한 것 같습니다. ‘내가 그때 왜 바보같이 화를 못 냈지?’ 하는 수치감과 죄책감을 스스로 용서하십시오. 아마 당신뿐 아니라 대부분의 후배들도 그 상황에선 그랬을 것입니다.
그리고 마음 놓고 터놓고 이야기할 수 있는 믿을 만한 대상을 찾아서, 그 선배에 대한 뒷담화를 실컷 까는 거죠. 만약 주변에서 믿을 만한 대상을 찾기가 어려우면, 당신 학교에 있는 학생생활상담센터에 개인상담을 신청해서 상담자에게 실컷 이야기라도 하셔야 합니다.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고 이발사가 대나무 숲 구덩이에다 대고 외쳤듯이.
‘어떻게 나에게 이럴 수 있어?’ 하는 생각으로 괴로워하다 보면, 당신을 화나게 한 사람과 전혀 상관없는 사람에게 화를 폭발시킬 수도 있습니다. 엉뚱하게도, 당신에게 욕을 하고 화를 낸 그 이상한 선배처럼 말입니다.
대구사이버대 교수(상담심리학)·한국영상영화치료학회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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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남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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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는 반응이고 이성은 선택 →
분노는 인간의 감정 가운데 에너지양이 가장 큽니다. 온몸을 뒤덮다 못해 뚫고 나와서 주변까지 그 감정의 영향력 안에 집어넣지요. 액션영화에서 분노한 주인공이 무적모드로 돌입하면서 총알을 난사하는 것을 보며 우린 카타르시스를 느낍니다. 그런데 분노는 그 속성상 외부의 어떤 존재를 ‘적’으로 규정하기 때문에 위험한 부분이 있습니다. 람보처럼 기관총을 실전에서 난사했다간 단 몇초 만에 탄창의 총알을 모두 낭비하고 적에게 벌집이 되기 십상입니다.
그러니 람보가 아닌 이상 분노의 코드는 심사숙고할 필요가 있습니다. 지금 미워하는 선배. 충분히 미움받을 자격이 있습니다. 그 분노 이해합니다. 그런데 더 열 받는 게 뭔지 아세요? 그 선배를 찾아가서 몇달 전 사건을 정색하고 이야기하면 본인은 아마 기억도 못하거나, ‘뭐 그 까짓것 가지고…’라며 심드렁하게 넘어갈 겁니다. 가해자와 피해자의 인식 차이에서 오는 이 비극은 사연의 주인공을 더 고통스럽게 할 겁니다. 영화 <올드보이>에서 유지태가 최민식을 감금한 것도, 이병헌에게 킬러까지 보내며 ‘미안하다’는 말을 듣길 원했던 <달콤한 인생>에서의 조폭 두목 김영철도, 모두 이 인식의 위상 차이에서 출발합니다. 그래서 모두 비극으로 향하지요.
잊고 살아라, 용서해라라는 말은 절대 하지 않겠습니다. 이마에 난 흉터는 레이저로 지울 수 있지만, 마음속 생채기는 지울 방법이 없습니다. 다만 그 감정의 편린에 휩싸여 살수록 본인이 더 불리한 입장에 서는 것이라고 말씀드리고 싶습니다. 그리고 지금 누군가를 적으로 만들고 증오한다는 건 현재의 삶 속에서 결핍이 있다는 증거이기도 합니다. 그 결핍과 직접 싸우고 해결하도록 노력하세요. 분노는 반응이고 이성은 선택입니다.
그리고 잊지 마세요. 그 짜증나는 얼굴과 모욕적인 문자를. 언젠가 갚아줄 날이 올 겁니다. 이 폭발적인 분노의 에너지를 그 결핍과 싸우시는 데 사용하길 바랍니다. 당신이 앞으로 싸울 링에서의 건투를 위해서 건배.
프로레슬러·<청춘매뉴얼제작소>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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