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1.05 11:50
수정 : 2012.01.05 11:5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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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중에 책을 펴든 배낭여행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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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김형렬의 트래블 기어

우리나라에서 배낭여행을 ‘젊은 날의 통과의례’의 하나로 만든 데에 영화감독 이규형씨의 활약을 빼놓을 수 없다. 그는 1990년에 이미 요즘 유행하는 토크 콘서트를, 서울과 지방을 순회하며 열었는데 주제가 ‘해외 배낭여행’이었다. 젊은이여, 배낭 하나 메고 훌쩍 세계 밖으로 떠나보자는 것이었다. “유럽 배낭족들이 동남아 해변에 누워 톨스토이를 읽는 모습을 보면서 영감이 왔다”는 이 감독의 말은 지금도 기억에 또렷하다.
전세계 자유여행자들의 메카 타이 방콕의 카오산 거리에 가면 헌책방들이 많이 눈에 띈다. 노상 책장에는 영어 원서들이 빼곡히 꽂혀 있다. <론리 플래닛> 같은 여행 가이드북류는 일부일 뿐이고 주로 문학 서적들이 많다. 톨스토이, 제임스 조이스, 헤밍웨이와 같은 고전에서부터 <다빈치 코드>, <연금술사>, <악마는 프라다를 입는다> 등 베스트셀러까지 다양하다. 거의 문고판형의 페이퍼백들이라, 가지고 다니며 읽기도 편하고 값도 싼 책들이다. 그런데 이런 헌책방들은 카오산 거리뿐만 아니라 서양 여행자들이 지나다니는 동남아 어느 여행지를 가나 다 있다.
여행지에서 영어 헌책방을 만나면 필자는 반갑기도 하지만 배가 좀 아프다. 서양 여행자들은 책을 굳이 가방에 챙겨오지 않아도 되기 때문이다. 한국 여행자들은 여행지에서도 패셔너블한데 그러다 보니 가방 안에 책 한두 권 넣어 오기란 쉬운 일이 아니다. 게다가 우리나라 단행본들은 하드커버에 판형도 크고, 고급지 인쇄를 하다 보니 무겁다. 책을 다 읽고 난 뒤에도 문제가 있다. 그 책을 다시 가지고 돌아온다? 이때 서양 여행자들은 헌책방에 팔거나 교환한다. 한글 책을 거래하는 헌책방은 아직 보지 못했다. 방법이 없지는 않다. 카오산 거리 한국식당에 책을 기부하면 된다. 실제로 여행자들이 두고 간 책들이 많다. 하지만 이 방법은 카오산 거리에 있는 식당이니까 가능한 일이다.
배가 아픈 이유는 또 있다. 실은 이게 진짜 이유이다. 그 쌓여 있는 영어책들을 보면서 군침만 삼켜야 하기 때문이다. 제목만 보면 고전 걸작이라 한번쯤 꼭 읽어봐야지 하는 책들이지만 여기까지 와서 영어에 대한 스트레스를 또 느껴야 하니 속이 상한다. 영어 좀 한다 한들 한글보다 편할 리가 없다. 이쯤 되면 동남아가 실은 서양 여행자 중심 여행지라는 걸 느끼게 된다.
사람마다 여행 방법이나 목적이 다르니 책은 필요할 수도, 필요 없을 수도 있다. 하지만 헐렁한 티셔츠, 슬리퍼 차림에도 시도 때도 없이 너절해진 갱지 페이퍼백을 꺼내 읽는 서양 여행자들을 볼 때면, 솔직히 부럽기도 하고 부끄럽기도 하다(명품 사왔다는 얘기는 많아도, 명작 완독하고 왔다는 얘기는 못 들었다). 배낭여행 바람이 분 지 20여년 시간이 흘렀어도, 독서하는 여행자에 대한 찬사는 변함없이 이어진다. 값싸고 휴대하기 편한 여행용 양서들이 많이 나오길 희망한다.
글·사진 호텔자바 이사(www.hoteljava.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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