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2.02 14:24
수정 : 2012.02.02 14:25
[매거진 esc] 기계적 삶
금속을 위한 호랑이 연고, 더블유디-사공(WD40)

끼이이익, 끼기긱. 휴일 한낮 고요한 집 안을 휘감은 정체 모를 괴성. 칠판 위 손톱 지나가는 듯 신경을 긁는 이 소리의 진원지는 부엌 싱크대 선반이었다. 얼마 되지도 않은 선반 경첩에 벌써 녹이 슬었나. 열었다 닫았다, 또 열고 닫고, 확 젖혔다 확 밀쳤다를 반복해보지만, 옆집 강아지가 무릎 관절염으로 주저앉는 듯한 해괴한 소리는 끊이지 않았다.
“어쩌지?” 아내의 물음이 ‘어떻게 좀 해보라’고 자동 번역되는 이 불편한 진실 앞에서, 몇 년 전 커튼 집 아저씨의 무료 서비스를 마다한 채 블라인드 설치를 자청했다가 처참한 굴욕을 맛봤던 기억이 떠올랐다. 그래, 일단 최대한 아는 척 기선 제압으로 이 상황을 모면해보자. “음, 이럴 땐 ‘더블유디-사공’(WD-40) 없으면 안 돼.” 역시 예상했던 반응. 더블유디… 뭐? 그게 뭔데?
순간 위기를 모면케 해준 ‘더블유디-사공’은 수십년 동안 전세계의 기계들을 관절염에서 자유케 해온 유명한 기능성 방청제(금속이 녹슬지 않도록 뿌리는 보호제)·윤활제의 이름이다. 녹슨 부분 등에 모기약처럼 뿌리면 된다. 빨간 머리에 남색 옷이 그의 상징. 오래전 기억 속을 더듬어보면 아버지의 공구상자 한가운데에, 선풍기의 잔해가 가득한 동네 전파사 사장님의 너저분한 철제 책상 위에도 그가 있었다.

더블유디-사공은 1958년 미국 샌디에이고에서 처음 판매가 됐고, 우리나라에는 1978년부터 수입됐다. 오랜 역사만큼이나 더블유디-사공을 둘러싼 믿거나 말거나 할 에피소드도 많다. 이 제품을 만든 더블유디-사공(예전에는 로켓 케미컬사였으나 지금은 회사 이름이 제품과 같다)이 수집한 황당 사용 사례를 보면, 아시아의 어느 버스 기사는 차 아래에 낀 비단뱀을 꺼내는 데 썼고, 한 경찰은 천장 에어컨 통풍구에 낀 절도범을 빼내는 데 이 제품을 쓰기도 했단다. 심지어 한때 미국에서는 실제로 관절염 치료제로 잘못 알려져 쓰이기도 했다.
‘포스트잇’의 발명 일화처럼 황당한 발명 사례로 소개되기도 한다. 더블유디는 ‘수분대체제’(Water Displacing)를 줄인 말이고, 40은 마흔번째 실험 끝에 성공한 제품이란 뜻이다. 원래 소매용이 아닌 우주탐사용인 아틀라스 로켓 외부의 방수제 용도로 개발을 했다. 하지만 직원들이 더블유디-사공을 조금씩 집으로 집어가는 모습을 본 사장이 내다 팔 생각을 하게 됐다는 것! 화부터 내지 않은 그의 현명함이여.
여러 면에서 더블유디-사공은 스스로 닦고, 조이고, 기름 치는 ‘기계적 삶’을 대변하는 아이콘이라 할 만하다. 심지어 전세계 10만명이 넘는 팬 클럽에 회사가 인증한 사용법이 2000가지가 넘는다는 점에서 충분히 자격이 있다.
하여튼, 이런 기계적 삶과는 거리가 먼 기계치 두 남녀의 그날 선반 처방전은 이랬다. 그 남자는 달걀 부쳐 먹던 포도씨유를 들고 왔고, 그 여자는 화장 지우던 클렌징 오일을 내밀었다. 결과는? 클렌징 오일의 승. 그날 이후 지금까지 적어도 우리 집에서만큼은 클렌징 오일이 더블유디-사공보다 위대한 존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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