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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2.15 18:37 수정 : 2012.02.15 18:37

[매거진 esc] 독자사연 사랑은 맛을 타고

 자취 생활 9년차, 자취방에서 해 먹는 음식이라고는 라면이 전부였던 시절의 일이다. 대학 졸업 후 직장생활을 하면서도 먹을 기회가 생길 때마다 ‘양껏 먹어둔다’는 자취생의 생존철학을 버리지 못하고 있었다. 부서 엠티가 있던 날, 오늘은 고기를 실컷 먹을 수 있다는 생각에 신이 났다. 엠티 장소에 도착해 족구로 몸을 푼 뒤 드디어 고기파티가 시작되었다. 숯불 위에서 맛나게 익어가는 고기를 안주로 흥겨운 음주를 이어가는 동안, 요리 잘하기로 소문난 선배 ㅈ은 솜씨를 뽐내고 있었다. 동료들은 칭찬을 아끼지 않았고 ㅈ은 사람들의 칭찬에 제법 우쭐한 모습이었다. 나 역시 ㅈ을 치켜세우며 이 기회를 맘껏 즐기고 있었다.

그때 한 후배가 내게 “선배도 요리 좀 한다고 했잖아요. 내일 아침은 선배가 끓여주는 찌개 어때요?” 하는 것이 아닌가! 장을 볼 때 이런저런 참견을 하며 큰소리친 것을 후배가 기억하고 있었던 것이다. 생각 없이 내뱉은 말을 후회하기에는 때가 이미 늦어있었다. 자연히 다음날 아침 식사 당번은 내가 되어버렸고, 찌개 한번 제대로 끓여본 적이 없는 나는 실로 난감한 이 상황을 어떻게 넘겨야 하나 하는 생각에 눈앞에서 익어가는 고기들이 눈에 들어오지 않을 지경이었다. 하지만 술기운이 돌면서 든 생각은, 찌개가 뭐 별거 있나 고기 많이 넣고 끓이면 맛이 나겠지 하는 거였다.

 다음날 아침 술이 덜 깬 상태로 냉장고에 남아 있는 재료들을 늘어놓고 잡탕찌개를 끓이기 시작했다. 그런데 웬걸 고기도 많이 넣고 채소도 많이 넣었는데, 맛은 갈수록 한심해졌다. 급기야 전날 밤 남은 고기를 다 썰어 넣었지만 내가 봐도 맛이 영 이상했다. 조미료를 더 넣어야 하나 국물을 좀더 졸여서 맛을 내야 하나, 머릿속이 복잡할 즈음 동료들이 하나둘씩 밥상에 둘러앉기 시작했고 드디어 아침 식사가 시작되었다. 제일 먼저 숟가락을 들고 찌개 맛을 본 선배 ㅈ이 “훕” 하면서 숟가락을 내려놓았고 혹시나 하는 얼굴로 국물 맛을 본 나머지 사람들도 뭐야 하는 얼굴로 나를 쳐다보았다. 그 순간 나는 세상에서 가장 불쌍한 자취생의 표정으로 말없이 고개를 떨어뜨렸다.

 결국 찌개는 엠티 숙소의 강아지 차지가 되었다. 고기가 이렇게 많이 들어갔는데 이걸 개에게 주어야 하다니 속이 쓰렸지만, 나도 먹기 힘든 맛이니 어쩔 수가 없었다. 그런데 개 밥그릇에 찌개를 부어주고 돌아서려는 순간 툭 하는 소리에 뒤를 돌아보았다. 세상에, 이놈의 개새끼가 밥그릇을 엎고 아무 미련도 없이 개집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닌가. 아, 나의 첫 요리는 개조차 외면할 정도의 맛이었단 말인가.

 아내가 감탄할 정도의 김치찌개는 끓일 정도가 된 지금도 그때를 생각하면 배시시 웃음이 난다. 전국의 자취생들이여, 잘들 챙겨먹고 힘내시라.

민병근/서울 광진구 화양동


◎ 응모방법

‘사랑은 맛을 타고’ 사연은 한겨레 esc 블로그 게시판이나 끼니(kkini.hani.co.kr)의 ‘커뮤니티’에 200자 원고지 6장 안팎으로 올려주세요.

◎ 상품

네오플램 친환경 세라믹 냄비 ‘일라’ 4종과 세라믹 프라이팬 ‘에콜론팬’ 2종.

◎ 문의 mh@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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