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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2.22 11:33 수정 : 2012.02.22 11:40

임경선의 남자들
싸우는 남자, 김어준과 진중권

믿거나 말거나 그저께 밤에는 김어준과 비상대책회의를 하는 꿈을 꾸고 연달아 어제는 진중권과 지하조직 결성 회의를 하는 꿈을 꾸었다. 회의 내용은 기억이 잘 안 나지만, 그들이 아무렴 어떤 남자들인데, 몹시 후달린 감촉만 고스란히 남아 있다. 생물학적 완성도 논쟁을 하도 보고, 갓 도착한 <한겨레21>이 진중권 특집이어서 그랬나?

어쨌든 김어준과 진중권은, 말하자면 ‘싸우는 남자들’이다. 사뭇 다른 양상으로, 지금은 어쩌면 서로 대치되는 입장에서 싸우고 있다. 둘러보면 어떤 여자들은 진중권을 좋다 하고, 어떤 여자들은 김어준을 좋다 하고, 또 어떤 여자들은 둘 다 좋다고도 한다. 물론 둘 다 좋다고 해서 ‘멘털 붕괴’라는 건 아니다.

솔직히 고백하면 난 <시칠리아의 암소> 때부터 진중권의 팬이었다. 예리하고 논리적인 글에 독자로서 반했고 공정하고 권위적이지 않은 태도에 한명의 인간으로서 자극 받았다. 평소 집단주의와 맹목적 애국심을 고통스러워했던 나로서는 숨통을 트이게 해준 고마운 사람이기도 하다. 한편, 김어준은 삼년 가까이 바로 이 지면에서 번갈아 가며 상담 글을 연재했다. 처음 만났을 땐 그 풍채에 압도되었다가 이내 호탕하고 유쾌한 ‘오빠’가 되어주었다. 함께 연재하는 ‘동지’로서는 실망한 적이 있었지만 내가 그의 뒷담화를 까고 있을 때 그는 나에 대해 좋은 말만 해주었던 사람이기도 하다. 과로로 부어터진 얼굴을 나꼼수 콘서트 사진 등에서 봤을 때는 ‘웬수 같지만 참 미워할 수 없는 전남편’을 바라보는 심정으로 혼자 괜히 안쓰럽기도 했다. 하나 그 와중에도 나는 진중권을 옹호하는 칼럼을 몇 번 쓰고, 김어준을 우려하는 칼럼을 몇 번 썼다. 이런 전력을 두고 보았을 때, 가슴에 손을 얹고 아무리 생각해봐도, ‘어준 오빠’ 당사자의 표현대로라면 내 취향은 ‘개고기 먹는 교주’보다는 ‘이슬 먹고 사는 백면서생’이라는 생각이 든다. 그러나 그것 역시도 ‘진사마’를 직접 알현한 적이 없기에 덤으로 얹어진 아우라 효과일지도 모르겠다.

아차, 죄송. 내 개인적 취향 따위.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들은 내용과 형식, 태도는 다를지언정 ‘싸우는 남자들’이라는 것이다. 그리고 싸우는 남자들은 어서 싸우러 나가야 하기에 여자 옆에 머물러 있지를 않는다. 아무리 여자들이 그 누구의 편을 열렬히 들거나, 그 누가 더 섹시하다고 주장해도, 여자들은 투영하는 만큼의 관심과 사랑을 반대급부로 되돌려 받기는 어려울 것 같다. 싸우는 남자들은 여자들에게 본능적으로 매력적인 존재들이겠지만, 그 이상을 바라면 상처 받을 것이다. 그 모든 첨예한 문제에 칼을 갖다 대도 여성문제만큼은 건드리지 않겠다는 진중권을 봐도, 자칭 타칭 마초라는 김어준을 봐도 무언가 마음을 많이 주면 안 될 것 같은 육감이 스친다. 게다가 싸우는 남자들은 여자들과 사랑을 나누길 원하지, 여자들을 대상으로 싸우고 싶어 하질 않는다. 바로 그 지점이 우리가 사실은 전혀 진지하게 사랑받고 있지 않음을 역으로 깨닫는 지점이기도 하다. 그런 면에서 그들은 처절하리만큼 본연의 의미에서 ‘남자’라는 생각이 든다. 애초에 남자들은 여자들에게 많은 것을 바라질 않으니, 따라서 그만큼 여자를 강하게 만들어주니, 서운하지만 고맙다고 해줘야 할까? 대신 여자들에게 유일하게 허락된 쾌락은 싸우는 남자들끼리 싸우는 것을 지켜보는 것. 고통스럽지만 짜릿할 것 같다.

글·임경선 (칼럼니스트 <어떤 날 그녀들이>지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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