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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3.14 17:55 수정 : 2012.03.14 17:55

강헌씨

[esc]

용산구 이태원2동 ‘경리단길’에 폭 빠져 찾아 들어온 이들에게는 이 길만큼 재미있는 사연이 많다. 사연이 곧 길의 역사다. 음악과 와인을 나누는 ‘와지트’를 만든 대중음악평론가 강헌씨, 변변한 맛집 하나 없던 곳에 자신의 레스토랑을 열어 ‘한 뼘 맛집 거리’를 이끈 요리사 손지영씨, 단박에 반할 만큼 예쁘지만 아직까지도 낯선 폴란드 그릇을 파는 박영신씨에게서 그들의 경리단길 이야기를 들었다. 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길을 잘못 들어서서
경리단을 알게 되었어요
서울에서 보기 드문 동네죠”

작업실 열었다가 문화공간 겸 와인바 ‘와지트’로 문패 바꾼 대중음악평론가 강헌

‘강헌’이라는 이름 앞에는 대중음악평론가라는 명패가 달린다. 그는 현재 <한국방송> ‘불후의 명곡 2’의 심사위원이자 <문화방송> ‘위대한 탄생 2’의 전문평가위원이다. 음표에 몸을 싣고 글을 써왔던 그가 요즘은 해가 지고 어둠이 깔리면 마치 본색을 드러낸 드라큘라처럼 이태원2동 경리단길 지하방으로 스며든다.

그는 와인을 마시며 이 지하방을 찾은 이들에게 와인과 음악, 맛깔스러운 음식을 내놓는다. 그가 밤마다 고즈넉한 파티를 여는 지하방은 그의 아지트, ‘와지트’(WAgit)다. 와인(Wine)을 의미하는 더블유가 첫 글자인 와지트는 회원제로 운영되는 강헌(51)의 와인바 겸 레스토랑이다.

이곳은 별나다. 지하지만 남산 아래 경사진 동네에 붙어 있는 바람에 창이 있다. 반짝이는 남산 엔(N)서울타워 불빛이 보인다. 아크릴 장식 뒤에는 30년간 그가 모은, 고가의 엘피(LP) 음반이 1만장이 넘는다. 벽장에는 ‘샤토 마고’, ‘오퍼스 원’ 등의 고급 와인과 싱글몰트 위스키 ‘라프로익’ 등도 있다. 둘러보면 마치 어머니의 자궁으로 회귀한 것처럼 아늑하다.

“와지트를 연 지는 4년 되었어요. 그 이전에는 개인 작업실이었어요.” 2004년 그는 작업실을 푸른 숲이 있는 남산이 가까운 곳에 마련하고 싶었다. 필동, 장충동 등을 돌아다녔다. 그가 원했던 것은 자연이었다. 산책할 만한 거리가 있고 조용하면서도 아늑하면 오케이였다. 하지만 아파트가 숨통을 조이는 서울에서 쉽지 않았다. “우연히 길을 잘못 들어서서 이 경리단길을 알게 되었죠. 서울에서 보기 드문 동네였어요. 강북, 강남과 잘 통하는 위치는 ‘고립’이 느껴졌는데 그것이 마음에 들었죠.”

고불고불 옛 정취가 물씬 느껴지는 좁은 골목이 있고 남산과는 걸어서 5분 거리인 한적한 경리단길은 그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그때는 월세도 쌌어요.” 그의 작업실은 “술 한병 들고 놀러 오는 친구들이 많은” 사랑방이 되었다. 소박한 사랑방이 현재 ‘와지트’가 된 사연은 재미있다. “2006년 작업실을 정리하고 1년 반 전라도 광주에 있었어요. 다시 올라와보니 작업실이 그대로 비워져 있는 겁니다. 기쁜 마음에 200만~300만원 들여 이사부터 했지요.” 그것이 문제였다. 떠나기 전 월세는 약 90만원이었다. 2008년 돌아와 보니 월세는 약 200만원으로 올라 있었다. “난감했죠. 의사, 광고회사 간부, 시나리오 작가 등으로 구성된, 제게 음악 강의를 듣는 모임이 있었어요.” 강헌만큼 그의 작업실을 아꼈던 그들은 자청해서 ‘소액 주주’가 되었다. 강헌은 직접 페인트칠을 하고 거리에 버려진 의자를 집어오고 황학동을 뒤져 탁자를 맞췄다. 경리단길 문화공간이 탄생하는 순간이었다. 회원제로 운영하는 이유는 “돈을 벌겠다, 장사를 하겠다는 생각”이 없기도 하고 십시일반 기쁘게 돈을 낸 초창기 회원들의 의견을 반영한 것이다.

“처음에는 와인과 치즈 정도만 갖다 놨는데” 점점 음식에도 욕심이 생겼다. 음악만큼 음식에도 관심이 많았던 그는 “대학 시절, 소주 한잔을 마셔도 친구들을 맛난 곳으로 끌고 갔”고 마치 <도문대작>을 썼던 허균처럼 젊은 시절 팔도를 유람하면서 음식을 맛보기도 했다. 그는 ‘강헌의 밥상’을 와지트에 추가했다. 그의 밥상은 24절기마다 다른 식재료가 풍성한 우리 땅 맛이었다. 조리법은 중요하지 않았다.

하지만 요리사를 찾기란 쉽지 않았다. 절기마다 다른 제철 식재료로 매번 다른 요리를 창작하는 방식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었다. “(계절이 바뀌는 세상 이치를) 인문학적으로 이해하고 음식에 담을 줄 아는 요리사가 필요했어요.” 고심 끝에 그가 찾아낸 이는 유명아(42)씨였다. 대학에서 사회학을 공부한 유씨는 3년간 독일에서 경험한 풍부한 유럽 식문화와 타고난 음식솜씨로 절기마다 다른 색다른 맛을 선보인다.

요즘은 만물이 깨어난다는 경칩을 맞아 ‘샴페인 젤리를 얹은 게살케이크’, ‘봄채소를 넣은 돼지 목살 샤브샤브’, ‘모시조개 톳 리소토’, ‘콩양갱과 두가지 색 절편’ 등을 식탁에 낸다. 동서양을 넘나드는 조리법이다. “회원들이 대환영했죠.” 현재 와지트의 회원은 약 90명이다. 100명이 되면 더이상 회원을 받지 않을 생각이다. 출입만 가능한 연회비 20만원 회원과 절기 와인과 치즈가 무료 제공되는 100만원 회원, 2종류다. 1년에 2번 회원들과 전국 미식여행도 떠난다.

올 1월에는 흑산도와 남서해안을 돌았다. “수많은 사람들을 만나야 하는데 이곳에서 모두 만나니 너무 좋습니다. 정신적인 안정이 되죠. 밤거리 이슬 맞으며 다닐 필요가 없어요.” 둥근 얼굴과 넉넉해 보이는 풍모에서 풍류객의 여유가 빛난다.

군더더기 없이 맑은 독립영화처럼

독립영화인에서 폴란드 그릇 가게 ‘노바’ 주인으로 변신한 박영신씨

“이태원역 상권보다 저렴
이 거리만의 매력이
위력 발휘할 줄 알았죠”

지하로 내려가는 길은 가팔랐다. 흰색 페인트칠한 문을 열자 별천지가 펼쳐졌다. 온통 코발트색이다. 아름다운 선율로 빚은 것 같은 도자기들은 모두 코발트색이었다. 그릇의 문양은 낯설었다. 선은 직선도로처럼 규칙적이다가 투수의 변화구처럼 뚝 떨어진다. 원은 떨리는 손이 가까스로 동그란 점을 찍은 듯 애잔하다. 이 독특한 도자기들은 모두 폴란드에서 수입한 그릇들이다.

박영신씨

2010년 서울 이태원2동 경리단길 초입에 문을 연 ‘폴란드 그릇 노바’(Nowa Polish Pottery)의 주인 박영신(35)씨가 반갑게 맞는다. 그는 이곳에 2000가지가 넘는 그릇이 있다고 말한다. 약 59.56㎡(18평)의 공간에는 머그잔부터 냄비, 다양한 크기의 접시들이 한 폭의 치맛자락처럼 펼쳐져 있다. 가격은 천원대부터 수십만원대까지 다양하다. “우리나라로 치면 여주 같은 곳인 폴란드 볼레스와비에츠에서 생산하는 수공예 그릇입니다.”

박씨는 본래 요리사도 그릇판매상도 아니었다. 독립영화를 제작했고 ‘부천국제영화제’, ‘여성영화제’, ‘충무로영화제’ 등에서 스태프로 일했던 이다. 영화판 사람인 그가 경리단길 지하에서 코발트색 그릇을 선보이게 된 사연도 역시 영화 때문이다. 처음 이곳에 가게 문을 연 이는 영화판 선배였던 김신성(40)씨였다.

김씨는 2년3개월 전 파리단편영화제 초청을 받아 유럽을 방문했다. 내친김에 폴란드에 사는 친구를 만나기 위해 길을 나섰다. 낯선 폴란드관광안내소에서 코발트색 그릇을 발견했다. “원시적인 매력”에 이내 마음을 뺏겼다. 그길로 생산지인 볼레스와비에츠로 향했다. 도자기 공장들이 몰려 있었다. 한국에 돌아오자마자 “손대면 엎어지기만 하는 영화”를 접고 ‘노바’를 열었다. 폴란드 그릇에 대한 공부도 시작했다. 그가 매혹당한 색은 “천연재료인 코발트 광물에서 얻은 색, 페르시아제국이 발견한 색, 유럽 도자기의 기초가 되는 색”임을 알아냈다.

현지 공장을 여러번 방문해서 폴란드 그릇에 얽힌 재미있는 사연도 들었다. 폴란드가 공산화되면서 공장들은 문을 닫았지만 80년대 민주화가 되면서 상황은 달라졌다고 한다. 주둔한 미군들의 부인들은 폴란드 그릇에 열광했고 본국으로 돌아갈 때 한보따리 싸가지고 갔다고 한다. 미국 현지에서 인기를 끌면서 공장은 다시 살아났고 전국에 흩어졌던 장인들도 다시 볼레스와비에츠에 모였다.

김씨는 이런 이야기를 재미있게 구성해서 블로그에 띄웠다. 작전은 성공! 입소문이 나면서 한적한 경리단길 그릇 가게는 세련된 주부들이나 20, 30대 젊은이들과 외국인, 대사 부인들로 북적였다. 일본 잡지에 소개되기도 했다.

김씨는 용인에 또다른 폴란드 그릇 가게 ‘로자’를 열면서 박씨를 찾아 노바의 주인으로 앉혔다. 영화가 이어준 사이는 끈끈했다. 김씨가 처음 이곳 경리단길을 선택한 이유는 “이태원역 상권보다는 저렴한 편”이고 호젓한 이 거리만의 매력이 “언젠가 위력을 발휘할 날”이 올 것이라고 내다봤기 때문이다. 그는 이곳에 폴란드 케이크 전문점도 곧 열 생각이다.

아직 앳된 얼굴의 박영신씨가 그릇 하나하나를 들어 설명을 한다. “접시 뒤에 장인의 친필 사인이나 사연이 자세히 적힌 그릇도 있지요. 조금 더 비싸요. 공장마다 문양이 달라요. 큰 매력이죠. 미국이나 일본은 이미 폴란드 그릇이 인기를 끌었어요. 우리는 이제부터죠.” 카메라를 돌렸던 아티스트답게 그가 구성한 ‘노바’는 군더더기 없는 깔끔한 독립영화다.

경리단길 터줏대감 된 ‘모던 주모’

한국판 ‘심야식당’으로 사랑받는 ‘핫토리키친’ 손지영씨

“우연히 흘러들어왔는데
시간이 멈춰있는 거예요.
이곳이다 싶었죠”

“내가 잘돼서 경리단길 잔다르크가 되겠어!” 2008년 요리사 손지영(37)씨는 이태원2동, 일명 경리단길에 퓨전일식술집 ‘핫토리키친’을 열면서 소리쳤다. 지인들은 상권도 제대로 형성되지 않은, 그저 낡기만 한 동네에 세련된 일식술집을 여는 그를 두고 “미쳤다”고 했다. 장사꾼 편에 선 이들에게 꼬부랑 할머니가 채소를 팔고, 아침이면 외국인이 개를 끌고 나오는, 좁은 계단이 하늘 높은 줄 모르고 솟아 있는 이 거리는 가망성 없어 보였다.

손지영씨

“제 가게 옆에는 문방구, 미용실, 철물점들만 있었어요. 음식점이라고는 없었어요.” 하지만 손씨는 이런 점이 좋았다. “우연히 흘러들어왔는데 시간이 멈춰 있는 거예요. 바로 이곳이다 싶었어요.” 당시 그는 가게 자리를 물색중이었다. 그의 손에는 핫토리영양전문학교를 졸업하고 돌아와 1년 일해 번 돈과 대출받은 4천만원이 고작이었다. 일식집이 많은 동부이촌동, 이태원역 주변, 부암동 등을 샅샅이 뒤졌으나 자금은 턱없이 모자랐다. 이때 구세주처럼 경리단길이 나타난 것이다.

각오는 단단했지만 어려움은 많았다. 동네에는 흉한 소문도 돌았다. ‘이상한 젊은 여자가 술집을 열었다’ 소리가 살을 붙여 퍼졌다. 만 4년을 버틴 지금 “노점 할머니가 직접 만두를 사 줄 정도로” 동네 사람이 다 되었다. 빈자리가 없을 정도로 성업중이다. “약간 날라리에, 업이 노는 거였으면 좋겠다 생각하는 철부지에, 술 마시고 음식 해주는 것이 마냥 좋기만 한” 그의 스펀지 같은 성격이 성공 요인이었다.

그의 손맛은 말할 것도 없다. ‘사라다우동’, ‘감자고로케’, ‘도미뱃살데리야키’는 인기가 좋아 차림표에 남았지만 매일 상에 오르는 음식은 주인장 맘대로다. 비 오는 날 기분 내키면 김치전도 부친다. 그래서 손님들은 그를 ‘모던 주모’라고 부른다. 일본 만화 <심야식당> 한국판이라고 말하는 이도 있다. 이제는 19~26㎡(6~8평)의 소박하지만 개성이 강한 커피점과 음식점도 이웃으로 들어왔다. 외롭지 않다. “레시피를 그림으로 그려줘 요리전문지 기자를 당황하게 만들기도 했”지만 그의 요리를 찾는 곳은 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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