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03.28 17:30
수정 : 2012.03.28 17:30
[매거진 esc] 독자사연 사랑은 맛을 타고
한 1년 전쯤 일이다. 전국을 강타한 구제역 때문에 온 나라가 떠들썩하던 그때의 이야기. 우리 집은 돼지를 천 마리 가까이 기르는 농장을 운영한다. 농장 근처에 작은 논을 마련해 몇 해 전부터는 쌀농사도 짓고 농장 앞 텃밭에 고추며 감자, 고구마, 땅콩, 온갖 푸성귀를 농사지어 가족들 밥상을 차려낸다.
봄이 오면 온 천하가 나물들로 뒤덮인다. 냉이는 지천으로 흔해 조금만 손을 움직이면 시원한 냉잇국에 냉이무침이 뚝딱 만들어진다. 여린 민들레 잎사귀를 뜯어다가 삼겹살 지글지글 구워 쌈을 싸 먹으면 그 또한 일미다. 여름이면 풋고추 뚝뚝 꺾어다가 된장에 찍어 먹고, 장날 사다 뿌려놓은 상추 솎아서 밥 싸 먹고, 감자 캐고 옥수수 따서 큰 솥 걸고 푹 쪄 내면 세상 부러울 것이 없을 정도다. 한 해 농사지어 잘 쟁여둔 벼를 2주 정도 먹을 만큼만 바로 정미해서 지어 먹는 밥은 맛보지 않은 사람은 짐작하기도 어려울 만큼 차지고 구수하다.
이렇게 밥 잘 먹는 우리 식구들이 밥맛을 잃은 적이 있었는데 재작년 겨울 지독한 구제역 때문에 농장 안에 콕 갇혀서 보낸 3개월이다. 방역선이 쳐지고 플래카드가 농장 진입로를 가로막고 나니, 마치 사회로부터 격리당하는 것 같은 낯섦과 구제역이 우리 농장에도 오지 않을까 하는 불안감으로 온 가족은 힘들어했다. 출하가 막혀 당장 수입도 없고 하루에도 몇 번씩 돈사를 소독하고 치우는 고된 노동은 계속되었다. 공연히 걱정만 쌓여가고 우울감에 점점 지쳐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텔레비전에서 도시락을 예쁘게 싸는 아가씨가 나와서 밥에다가 채소랑 김이랑 온갖 것들을 넣어 곰과 토끼를 만드는 장면이 나왔다.
“그래, 바로 저거야.” 주방으로 간 나는 우선 고슬고슬한 밥에 간장하고 참기름을 넣어서 조물조물 버무리고 뭐 장식할 것이 없나 찾기 시작했다. 하지만 냉장고에 있는 것이라고는 김치가 전부고 그 흔한 달걀 하나, 김 한 장도 남아 있지 않았다. 그래도 포기할 수는 없지. 김치와 감자를 볶아서 윤기나는 밥을 섞고 접시에 담아 꽃 모양, 별 모양, 하트 모양 등 낼 수 있는 모양이란 모양은 다 냈다.
오전 축사 일을 마치고 축 처진 어깨로 내려온 가족들에게 멀건 된장국과 최선을 다해 예쁘게 꾸민 볶음밥을 내놓으니 다들 “이게 뭐래?” 하며 어이없다는 듯 실소를 터뜨린다. 그래도 그렇게 한번 웃고, 그렇게 한번 기운 받으며 우리는 혹독한 그해 겨울을 잘 이겨냈다.
박은희/충북 청원군 오송읍 (연락처를 문의 메일로 보내주세요)
|
응모방법
사연은 한겨레 esc 블로그 게시판이나 끼니(kkini.hani.co.kr)의 ‘커뮤니티’에 200자 원고지 6장 안팎으로 올려주세요. 끼니에 올리시는 분은 문의 메일로 성함과 연락처도 보내주세요.
상품
네오플램 친환경 세라믹 냄비 ‘일라’ 4종과 세라믹 프라이팬 ‘에콜론팬’ 2종.
문의
mh@hani.co.kr (끼니에 ‘환상의 섬 발리에서의 컵라면 누룽지탕’ 올린 독자님은 연락처를 문의 메일로 보내주세요.)
|
|
|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