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칼럼니스트, 시에프 감독, 안경 디자이너 등 전방위로 뛰는 백종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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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심정희의 반하다
칼럼니스트, 시에프 감독, 안경 디자이너 등 전방위로 뛰는 백종열
백종열은 ‘생각대로T’ 시리즈와 현대카드 ‘놀라운 이야기’ 시리즈를 비롯해 수많은 유명 시에프(CF)를 제작한 광고감독이자, ‘백종열체’라는 특유의 감성적인 손글씨, 그리고 최근에는 그라픽플라스틱이라는 안경 브랜드로 주목받고 있는 전방위 크리에이터다. 봄기운이 제대로 자리를 잡아가는 듯하던 4월의 첫 토요일, 알게 모르게 우리의 일상 속에 자신의 스타일을 물들이고 있는 백종열을 서울 논현동 그의 사무실에서 만났다.
“싫고 좋음이 명확하고고집이 센 게
광고 일에 도움이 된다고 봐요” -제게 백종열이라는 이름이 각인된 계기는 월간 <페이퍼>의 ‘면막음’이라는 칼럼이었어요. 힘들이지 않고 볼펜으로 쓱쓱 그린 듯한 그림에 사랑이나 가족에 대한 짤막한 문구가 들어 있는 ‘면막음’ 페이지에 좋은 느낌을 갖고 있었는데, 언젠가부터 아트 디렉터로 다양한 곳에 이름이 보였고, 또 어느 날 보니 시에프 감독이 돼 있었거든요? 이 다양한 프로필의 흐름은 어떻게 만들어진 건가요? “1993년인가 94년쯤에 우연찮게 ‘도프’라는 곳에서 일을 시작했어요. 도프가 당시에는 사진 스튜디오 겸 광고기획 회사였는데, 거기서 광고라는 게 어떻게 진행된다는 걸 다 배운 거 같아요. 그러다 처음 책임을 맡아 진행한 프로젝트가 ‘무크’라는 브랜드 광고였어요. 어느 정도 경험이 쌓인 뒤 회사를 그만두고 나와서 ‘닉스’ 지면 광고를 만들었는데 광고주가 티브이 시에프까지 만들어보면 어떻겠냐 제안을 해왔고 제가 콘티를 그려 당시 조감독이었던 박명천 감독을 찾아갔죠. 그렇게 해서 닉스 시에프가 나왔는데 굉장한 화제가 됐죠. 그런 식으로 한단계 한단계 밟아가며 패션 지면 광고를 주로 만들다 시엠(CM)을 만들게 되었고 그게 오늘날까지 오게 된 거예요. 이런 방향으로 가야겠다 의도했다기보단 자연스럽게 흘러온 거 같아요.” -만날 때마다 참 스타일이 독특하다는 생각을 하게 돼요. 트렌디한 아이템들을 굉장히 자유자재로 매치하고, 그러면서도 자기만의 스타일이 있어 보인달까. “현장에서 일하는 시간이 길다 보니까 편해야 된다는 고정관념이 있는 것 같아요. 옷장엔 죄다 편한 캐주얼뿐이에요. 살면서 정장을 딱 두번 입어 봤는데 아버지 돌아가셨을 때랑 결혼할 때…. 그런 면으로 보면 옷 되게 못 입는 거 아닌가요? 옷을 잘 입는다면 여러 가지 스타일을 자기 식대로 소화해낼 텐데 저는 입는 게 정해져 있어요. 취향이 딱 구획이 정해져 있다고 해야 하나? 싫고 좋은 게 너무 명확해요.” -일을 할 때의 명확한 성격이 옷을 고를 때도 그대로 드러나는 거 같아요. 싫고 좋음이 명확하시잖아요. 사실 광고 일이라는 것도 사람이 하는 일이다 보니 자기 의견을 끝까지 밀어붙이기가 쉽지 않을 것 같고 그러다 보면 적도 생길 것 같은데. “처음 일할 때 도프의 김용호 사장님이, 그분은 저의 유일한 스승이라고 할 수도 있는데, 그런 얘기를 하셨어요. “광고주 앞에서 확신이 안 설 때에도 그런 티는 절대 내면 안 된다. 그들은 너만 믿고, 네가 가진 확신에 찬 행동 또한 산 것이기 때문에 그 앞에서 불안해하거나 ‘어이고 이거 어떡하지?’ 우왕좌왕하지 마라.” 그런 측면에서 저는 오히려 싫고 좋음이 명확하고 고집이 센 게 이 일에 도움이 된다고 봐요. 그런 모습이 어떻게 보면 타협하지 않으려 하는 자세로 비치는 거고, 누군가의 눈에는 ‘어우, 쟤는 한번 아니라고 하면 절대 아닌 애야’ 이런 모습으로 비쳐 좋은 것도 있고.(웃음)” -옷차림에서 ‘백종열 스타일’이 드러나는 것처럼 일에서도 스타일이 드러날 것 같아요. 시에프 감독으로서 ‘백종열 스타일의 광고’는 어떻게 정의 내릴 수 있을까요? “광고에서 감독의 스타일이 드러나는 건 광고주와 감독 모두에게 안 좋은 일이에요. 한때 어쩔 수 없이 광고에서 손글씨를 남발하던 때가 있었어요. A라는 브랜드에 썼는데, 그걸 보고 다른 곳에서 요청을 해와요. 그러면 글씨체를 조금씩 바꿔서 써주곤 했는데 이젠 그런 상황을 절대 만들지 않아요. 광고는 감독이 누군지 안 보여야 해요. 모든 관심이 광고의 대상에 집중되어야 하고 거기에 맞춰 모든 게 짜여야 잘 만든 광고죠. 누가 검색해 보지 않고 ‘저거 백종열이 찍은 거야’라고 알아차린다면, 보통 문제가 아니에요. 만날 쓰던 아이템들을 꺼낸다는 얘기니까.” “레드닷 어워드 수상 날
너무 기뻐서
호텔에서 뛰어내릴 뻔했죠” -반면에 자신의 스타일을 전면적으로 내세우실 때도 있잖아요. 그라픽플라스틱도 그렇고요. (그는 최근 포토그래퍼 홍장현과 함께 그라픽플라스틱이라는 안경 브랜드를 만들었다) “그렇죠. 뭐 막연한 얘기일 수 있는데 딱 정갈하게 잘라지는 그 레이아웃…. 그라픽플라스틱은 뭘 하나를 봐도 아, 이건 그 집 것이구나 하는 걸 알아주길 바라요. 그 스타일을 한마디 말로 정리를 하기는 힘든데… (웃음) 뭘 하나 하더라도 굉장히 그라픽적인 느낌을 풍기고 싶은 거죠.” -최근에 그 말로는 설명하기 힘든 그라픽적인 느낌이 세계적으로 인정받는 사건이 있었어요. (그라픽플라스틱은 최근 2012년 레드닷 어워드 제품 디자인 부문을 수상했다) 그때 기분이 어떠셨어요? “수상 소식을 들었을 때 스페인에 있었는데, 호텔에서 뛰어내릴 뻔했죠. 너무 기뻐서. (웃음) 근데 또 정말 기뻤던 순간이 수상 기념행사 하던 날, 행사에 온 손님들이 자기들끼리 안경다리를 바꿔서 껴가지고 가는 걸 봤어요. 우리 안경이 다리가 빠지잖아요. 그 광경을 보면서 ‘와, 내가 의도하던 바인데, 어떻게 저 사람들이 저런 생각을 했을까’ 감격했죠. 디자인에 대해 칭찬받는 것보다 그 광경이 훨씬 저를 기쁘게 만들었어요. 제가 만든 제품이 사람들이 자유롭게 수다를 떨 수 있는 수단이 됐으면 하는 마음이 크거든요.” 10년 전이었을까. 그를 처음 만난 날 그는 삭발에 가까운 머리에 전투복 바지, 가죽 재킷을 입고 있었다. 굉장히 엄격한 군인이나 전사 같은 모습을 보고 혼자 생각했다. ‘저 사람의 어디에서 면막음의 말랑말랑한 감성이 나오는 거지?’ 볼수록 겉모습과 내면이 반대인 사람이라는 생각도 든다. 그래서 물었다. “가재나 게처럼 단단한 껍질로 스스로를 감싸고 있지만 알고 보면 세상에서 가장 여린 사람이 아닐까… 어떠세요?” 백종열이 유난히 숱이 많은 속눈썹을 깜빡이며 잠시 고개를 숙였다. “평소에 저를 보면서 그런 생각을 하셨나요?” 나는 확신에 찬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그는 지금껏 단 한번도 보여주지 않았던 수줍은 표정으로 웃었다. “네. 맞습니다. 저는 그런 사람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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