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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5.16 17:20 수정 : 2012.05.18 16:09

해 지는 여수 앞바다는 한 폭의 그림이다

[매거진 esc] 여수 밤바다보다 그윽한 맛집들의 환대
소설가 한창훈이 자랑하는 여수 뒷골목·시장통·바닷가의 특별한 음식들

여러 해 전 나는 방송 관련 심사 때문에 강원도의 한 호텔에 묶인 적이 있었다. 방대한 분량을 검토하다 보니 심사는 여러 날 계속되었다. 하루는 담당자가 우리를 호텔 버스에 태우고 나갔다. 도착한 곳은 ‘유자명자하다’는 순두부집. 아닌 게 아니라 주차장에는 대형 버스가 즐비했고 넓은 홀에도 단체 관광객이 빼곡했다. 나도 순두부를 즐겨 먹는데 그 집에서 나온 것은 그다지 손이 가지 않는 허여멀건 것이었고 빈약한 밑반찬에 비해 값이 비쌌으며 주인과 종업원이 손님들 머릿수만 세고 있는 것 따위가 불만이어서 얼른 수저를 들지 않았다. 같은 심사 위원이었던 모 교수가 왜 먹지 않느냐고 물어왔다. 나는 한마디 했다.

“아, 제 앞에 나온 음식이니까 다 먹을 겁니다. 다만 제가 여수 사람인데 그곳에서는 이 정도 음식에 이런 가격을 받고 있으면 손님이 주인에게 싸움을 겁니다. 에이, 다음부터 안 오면 되지 뭐, 이렇게 끝나지가 않죠.” 좀 심하게 한 말이지만 여수는 돈을 받고 음식을 내놓는 식당이라면 최소한 어떠해야 한다는 원칙이 있는 곳이기 때문이었다.

소설가 한창훈씨. 한창훈 제공
젊은 시절
고된 노동을 마치면
눈에 어른거리던 장어탕

이곳저곳 공사 현장을 떠돌 때가 이십대 후반이었다. 함바집 밥과 라면, 소주로만 살던 시절이기도 했다. 당시는 해 떠서 해 질 때까지가 작업 시간이어서 여름에는 아주 죽을 맛이었다. 세상에서 가장 더디고 느린 물건이 붉은 해였다(반대로 동틀 녘이면 얼마나 재빨라지던지). 그렇게 하루 종일 진땀 흘리다 보면 소증(素症)이 돋아버린다. 그게 찾아오면 한가지 음식에 대한 갈증 때문에 인생 자체가 허무할 지경이었다. 임신부의 입덧이 이것과 비슷할 거라고 나는 생각했다.

내 눈에 어른거리는 것은 장어탕이었다. 노총각 눈에 쓰인 뒷마을 처녀처럼 그것은 수시로 다가왔고 쉬 물러가지 않았다. 일을 마치고 낯선 거리 식당가를 배회하기까지 했으나 민물 장어집은 있어도 장어탕은 없었다. 나는 결국 600원짜리 정어리 통조림으로 대충 해갈을 했다. 장어탕은 여수의 특산 중 하나이다. 우리가 흔히 아나고라 부르는 붕장어로 끓인다. 지금도 남산동이나 봉산동에 가면 장어탕 골목이 즐비하다.

여수 음식은 양념이 진하고 가짓수도 많다. 예전에 어떤 사람, 여수에 와서 이틀간 식당을 돌아다니던 끝에 중얼거렸다.

“여기 사람들은 오늘 먹고 말 것처럼 사는구먼.” 솔직히 그런 말 나올 만하다. 동료 작가들이 놀러 왔을 때 유명한 한정식 집으로 모시고 갔다. 그 집은 해산물, 튀김과 이런저런 육고기, 밥·죽·찌개·국·반찬, 이렇게 세번 정도를 상에 채워준다. 매번 상이 어두웠다. 한 여성 소설가는 반찬 나오는 것 바라보다가 그만 체해버렸다. 아무것도 먹지 않고 체할 수도 있다는 것을 그때 처음 알았다. 그 사람이 그날 유일하게 먹은 것은 인근 약국에서 사온 가스명수 한 병이었다.

넘치는 찬그릇 수는 내가 봐도 질린다. 아무리 이를 악물어도 다 먹지 못한다. 그렇다면 둘 중 하나. 남은 것을 버리거나 다른 손님 탁자 위에 올라갈 것이다. 둘 다 못할 짓이다.

여수 음식이 이렇게 자리잡은 것에는 몇 가지 가설이 있다. 풍부한 물산 운운은 관공서 쪽에서 흘러나온 것으로 보인다. 예술적 심미안이 지나치게 풍부해 그만 혀까지 옮겨갔다는 설도 있다. 그게 왜 하필 혓바닥으로 번졌는지는 모를 일이다.

또 하나는 정치·사회적으로 견제와 탄압을 받다 보니 음식에 집착하게 되었다는 설이다. 왜, 누구라도 스트레스 받으면 뭔가를 먹어대지 않는가. 언제 잘못될지 모르니 우선 잘 먹고 보자, 먹는 게 남는 것이다, 먹고 죽은 귀신은 때깔도 좋다더라, 하는 케케묵은 소리가 나오는 대목이기도 하다. 덕분에 우리 동네 귀신들 인물과 때깔은 보장되어 있다.

말은 이렇게 하지만 한번쯤은 차고 넘치는 상을 받아보는 것도 나쁘진 않을 것이다. 살다 보면 커다란 대중목욕탕을 혼자 쓰게 되는 경우도 있으니까. 다만 여수 맛의 묘미는 그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과잉이 유일한 특징이라면 얼마나 불편한가.

여수 하면 보통의 사람들은 갓김치와 서대회, 게장 백반, 군평선이(금풍생이)를 떠올린다. 다 좋다. 이름난 관광 코스에는 늘 그게 들어가 있고 돌아다녀 봐도 그 가게 앞에는 관광버스가 줄지어 있으니 말을 덧붙일 필요는 없을 것이다.

여수의 장어탕. 폭 익은 장어가 맛깔스럽다.(위) 영업준비를 서두르고 있는 여수 포장마차촌.(가운데) 갖가지 생선을 햇볕에 말리는 풍경. 여수에서는 흔히 볼 수 있는 광경이다.(아래) 박미향 기자 제공
선어회, 보리밥
포장마차 해물도
꼭 즐겨보시라

인터넷 검색에 나오지 않는 곳은 따로 있다. 여수 시내를 슬슬 걸어 다닌다면 살짝 숨어 있는 곳들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뒷골목의 미학과 맛이다. 물론 섭섭한 면은 있다. 먼저, 예전의 대폿집이 거의 없어져버린 것이다. 대처의 대폿집은 막걸리 한 병 시키면 아주 간단한 안주, 이를테면 김치나 짠지 정도 나왔다. 여수 대폿집은 생오이와 생채, 고추, 된장, 찌개가 나왔다. 밑반찬의 양과 질은 그곳의 음식과 성격을 말해주는 척도이다. 그러나 효율과 이익을 찬양하는 세상의 흐름은 이곳도 예외가 아니어서 물행주에 손 닦는 주모 모습은 요즘 보기가 어려워졌다.

대신 이런저런 소규모 식당과 선어횟집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여서동이나 여천 바닷가에 가면 선어회만 전문으로 하는 큰 식당도 많다. 맛으로만 치면 활어회보다 선어회가 낫다. 생선은 죽은 지 8시간 정도 지나야 가장 훌륭한 맛을 낸다.

시장통이라면 보리밥집도 몇 개 있을 것이다. 그 시장이 서정이나 남산동 쪽이라면 바닷가에 활어회센터도 있다. 다른 항구처럼 활어회를 뜨는 곳과 먹을 공간이 따로 있다. 하나 더 추천. 밤이 깊어지면 남산동 연등천에는 야화(夜花)처럼 포장마차가 줄지어 선다. 어느 곳을 들어가더라도 여수 바닷가 싱싱한 해물을 맛볼 수 있다. 기본 안주만으로도 소주 두 병은 거뜬할 정도인데다가 여수의 말(言語)도 풍성하게 들릴 것이다.(물론 모든 곳이 다 맛있고 흡족할 거라는 보장은 전혀 할 수 없다. 그런 곳은 세계 어느 곳에도 없으니까.)

운전중이라면 기사 식당이 또 하나 대안이다. 큰 낭패 없을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여수 사람 아는 이가 있으면, 이렇게 한번 말 걸어보시라. ‘아아, 그런 유명한 데 말고 자네가 권태롭거나 쓸쓸할 때 친구와 함께 단골로 가는 그런 데 한번 가보자구. 좀 옴팡지고 쏠쏠한 곳 말이야.’

여수 사람이라면 그런 곳 최소한 한 군데 이상은 알고 있을 것이다. 나는 종종 낚시를 하는데 커다란 도미나 농어를 낚아놓고 가만히 보고 있다가 라면 끓여 먹은 적이 가끔 있다. 바닷가 음식은, 특히 생선회는 혼자 먹으면 가장 맛없는 음식이다. 그러니 아무리 좋은 식당엘 가면 뭐하겠는가. 좋은 친구가 없다면 그저 먹을 거 파는 집일 뿐인데.

여수=글·사진 한창훈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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