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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5.16 17:51 수정 : 2012.05.16 17:51

9001번 광역버스 차고지인 경기도 죽전에서 새 차를 촬영하는 ‘버스마니아’ 백승준군

[매거진 esc]

차종별로, 노선별로 제각각 개성 숨쉬는 버스의 세계에 탐닉하는 사람들

“지금 덕수궁인데, 뵐 수 있을까요? 학교 백일장이 30분 후면 끝나서요. ㅎ 끝나고 바로 죽전 차고로 가보려고요. ㅎ”

지난 10일 오전 11시쯤 백승준(가명·ㅎ고 3)군한테서 문자가 왔다. 서울역~죽전 9001번 광역버스에 새 차가 나오니 차고지인 죽전에 갈 생각이 있다면 합류하라는 전갈이다. 1시간 뒤인 12시. 서울역 환승센터 4번 주차장에 나타난 백군은 하굣길 가방을 둘러멘 여느 고교생과 다를 바 없었다.

미묘하게 다른 디자인
노선, 기능 차이에
열광하는 버스마니아

그가 잡아탄 버스는 9001번이 아닌 8100번이다. 무작정 따라 차에 올랐다.

“8100번은 간선급행이라서 빨라요. 9001번은 완행이거든요. 단국대까지 가서 9001번을 갈아타면 시간도 단축되고 환승이 돼 별도요금이 안 들어요.”

앉은 자리는 중간쯤이다. “대우버스 FX 크루징애로우는 여기가 가장 넓어요. 발을 뻗을 수 있어 가장 편해요.” ‘중간쯤’이 아니라 왼쪽 좌석 중 출구에서부터 뒤쪽으로 두번째 좌석이다. 그러고 보니 모두 같은 줄 알았던 앞뒤 좌석 사이의 간격이 모두 달랐다. 그의 목소리에는 자부심이 묻어났다.

백군은 버스마니아다. 새 차가 나온다는 정보가 있으면 무조건 달려가 사진을 찍어 인터넷 카페에 올린다. 사이버상 그의 이름은 ‘670’이다. 그가 수색 근처 공영버스터미널을 가기 위해 집 앞에서 자주 타는 온수~상암 시내버스 노선번호에서 땄다.

그가 올린 사진은 보통 조회수가 500회를 넘는다. 신설노선이나 새로 출고된 차의 사진은 1000회가 거뜬하다. 버스가 모두 똑같아 보이지만 그에게는 모두 다르다. 현대, 대우 등 제조사, 일반, 저상, 중형, 소형 등 크기, 연식에 따른 디자인의 차이, 노선별로 다른 행선지와 번호 등등. 그것이 버스의 얼굴이다. 표정이 가장 잘 잡히는 얼짱각도도 있다. 정면에서 왼쪽으로 약간 비켜 눈높이보다 조금 낮추었을 때다. 정면과 출입구가 달린 왼쪽이 모두 나와 버스의 구조적인 특징은 물론 행선표, 광고판 등 부착물이 한꺼번에 잡힌다. 또 사진에는 등급이 있다. 백군은 새 노선, 새 버스는 뉴스이고, 처음 출고되는 신차는 특종이라고 했다. 그는 ‘버스뉴스’ 사진기자인 셈이다.

백군 같은 마니아들이 활동하는 사이버 무대는 비트랜서, 버스러브, 버스마니아 등 카페 외에 디시인사이드의 버스갤러리가 있고 개인 블로그도 상당히 많다. 마니아들은 사진을 위주로 하여, 노선정보, 전개도 등을 올리며 비장의 정보를 공유한다. 남들이 올려둔 전개도를 내려받아 모형을 만드는 수용자가 있는 반면 백군처럼 적극적으로 신차나 새 노선 정보를 올리기도 하고, 와이파이가 깔린 노선을 조사하고, 전철 개통에 따른 버스터미널의 변화상을 찍어 올리는 오타쿠 수준의 마니아도 있다. 서울에서 부산까지 시내버스를 이용해 국토종단 여행을 시도하는 행동파도 간혹 있다.

승준군이 주로 활동하는 인터넷 카페 ‘비트랜서’(위) 비트랜서 ‘벙개’에 참석한 운영자 김상욱씨(맨 왼쪽)와 회원들(아래)
“친구들 ‘내비게이션’ 별명
의사에서 버스운전사로
장래희망도 바뀌었죠”

“자꾸 왜 그런 일을 하느냐고 묻는데, 그냥 자기가 좋아서 하는 거예요. 좋아하는데 꼭 이유가 있어야 하나요?”

전날 서울역 앞 카페에서 만난 인터넷 카페 ‘비트랜서’ 운영자인 김상욱씨는 마니아들은 극히 정상적인 사람들이라면서 이상한 눈으로 보지 말라고 말했다. 굳이 이유를 찾자면 버스가 주변에서 가장 쉽고 흔하게 접할 수 있는 기계장치이며 주머니가 얇고 자투리 시간밖에 없는 청소년에게 잠시 현실을 벗어날 수 있는 이동수단이라는 것이다.

“용돈을 타서 쓰는 학생들에게 시내버스는 적은 비용으로 여행 기분을 낼 수 있어요. 왕복 4000원에 김밥 한 줄 정도면 자기가 사는 곳을 벗어나 낯선 곳에서의 설렘을 즐길 수 있거든요. 차창 밖으로 지나가는 차량이나 건물 등은 덤이고요. 학교의 규제와 부모님의 보호 아래에 있는 중고생한테는 금세 시치미를 떼고 현실로 복귀할 수 있다는 게 커다란 장점입니다.”

김씨는 6년 전인 중학교 때부터 ‘싸돌아다니기’를 좋아해 시내버스 여행을 하다가 전개도 만들기, 사진 찍기로 버스와 관련한 취미를 넓혀왔다. 현재 거주지인 경기도 안양과 고향인 부산의 시내버스 노선표를 알기 쉽게 그려 인터넷에 올리는 재미에 푹 빠져 있다.

그에게 버스는 세상을 내다보는 창이었고 친구들과 소통하는 미디어였다.

창쪽 옆자리에 앉은 백군 역시 시선을 창밖에 두고 세상과 소통하고 있었다. 마주 오는 차들의 얼굴을 열심히 살피고, 휘리릭 지나가는 풍경들도 꼼꼼히 지켜보았다. 백군의 얼굴에 잠시 그늘이 비쳤다.

“아빠나 엄마가 이렇게 다니는 걸 알면 큰일 나요. 공부에 취미가 없는 건 아시지만 ‘방과 후 취미’를 가진 것은 모르거든요.” 그의 꿈은 얼마 전 의사에서 ‘버스 승무원’ 즉 버스 운전사로 바뀌었다. 부모님한테는 아직 비밀이다.

오후 1시께 단국대 앞에서 그냥 지나치려는 9001번 버스를 잡았다. 차고지까지 백군만을 위한 전용차다.

시골 분위기가 풍기는 차고지. 임시번호판을 단 새 버스 7대를 보자 백군의 얼굴에서 빛이 났다. 버스 안에서 카드기와 시시티브이(CCTV)를 달고 있던 정비사들은 백군과 구면인 듯 반갑게 인사했다. 백군은 맨 뒷좌석에도 앉아보고 운전석에도 앉아보았다. 시트에서 풍기는 가죽 냄새와 백군한테서 나는 풋풋한 냄새가 묘하게 섞였다. 백군을 바라보는 정비사의 눈길이 부드러웠다.

“대개 돈 내고 탈 줄만 알지요. 백군처럼 재밌어하며 새 차를 따라다니는 것을 보면 나쁘지 않아요. 아무 목표도 없이 무관심하게 살아가는 여느 학생들보다 훨씬 낫죠.”

새 차나 헌 차나 네 바퀴 위에 직육면 공간을 얹은 것은 매한가지. 백군은 심드렁해하는 기자를 딱하다는 듯 쳐다보고, 신차 출입문 옆 ‘FX Ⅱ 116 CROUSING ARROW’라 쓰인 글자를 가리켰다. “함수 투 116 크루징 애로! 투가 더 들어 있잖아요?” FX를 함수로 읽다니 역시 ‘고딩’이다.

백군은 서울로 돌아오는 길 중간에 다른 차고지 한군데를 더 들르겠다면서 내렸다.

글·사진 임종업 선임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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