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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키보드와 터치패드의 시대에 문방구 펜 코너는 왜 늘 북적일까…소설가 한동원의 펜 찬양기
과거 이런 퀴즈가 유행했던 시절이 있었더랬다. 남성의 신체 중 가장 팽창률이 높은 부위는? 평소 이슬만 섭취하는 필자로선 그 영문 잘 모르겠다만, 주로 대학생 집단소개팅 등 이성의 관심을 선점해야 할 특수상황에서 써먹어지곤 했던 이 고색창연한 퀴즈의 정답은, 물론 동공이다.
유사한 질문이 이 경우에도 가능하겠다. 현재 여러분께서 단일품목으로서 가장 많은 수를 보유하고 계신 공산품은? 화장품? 수저? 속옷? 양말? 글쎄. 잘 살펴보시라. 큰 이변이 없는 한 그 답은 필시 펜일 것이다. 연필, 색연필, 유성볼펜, 수성볼펜, 사인펜, 붓펜, 형광펜, 매직, 마커, 심지어 몇 년 전 조카가 쓰던 분홍색 햄토리 연필까지, 출처도 사연도 모를 갖가지 펜들이 오늘도 자석 만난 쇳가루마냥 책상 위 머그컵에 달라붙어 있는 것이다. 기인열전에 출연하려 작정한 것도 아니고, 펜 도착증이 있는 것도 아니다. 그런데도 왜?
현대과학으로도 도저히 규명할 수 없…지는 않겠다만, 아무튼 이렇듯 마성적인 펜의 매력의 비밀을 풀고자, 필자, 오늘도 이렇게 머그컵에서 분연히 펜을 뽑아들었다.
연인이 될 것 같지는 않지만소개팅 시켜주긴 싫은
이성친구 같은 존재다 펜의 마력, 그 첫째 요소는 펜의 3대 고유속성이다. 펜은 작고, 싸고, 가볍다. 따라서 필요한 상황에서 언제든 손에 넣을 수 있고, 한번 손에 넣으면 좀처럼 손을 떠나지 않는다. 그렇다. 펜은 서로 연인이 될 가능성 애써 부인하지만 왠지 소개팅 시켜주긴 싫은 이성친구와도 비슷한 위치, 즉 간단한 취득-손쉬운 보유-항시적 필요의 삼각형의 무게중심에 절묘하게 자리한 채, ‘언젠가는 쓰게 될지도’라는 가능성의 페로몬 은밀히 흘리며 오늘도 머그컵들을 책상 위 버뮤다 삼각지대로 변모시키고 있다. 그리고 이러한 특징은 상품으로서도 매우 강력한 장점이 된다. 일단은 선의 형태이되, 세워 꽂아놓으면 하나의 점으로 변신하는 펜은, 문구 매장 진열대에 수천개가 꽂히면서 갖은 모양과 색의 면을 이룬다(점-선-면. 그렇다. 바로 그 원리다). 바로 여기에 펜의 마력의 둘째 비밀이 숨어 있다. 필자가 개인적으로 ‘저요저요 스펙터클’이라 칭하는 문구매장 펜 진열대의 광경, 그 흡인력이 바로 그것이다. 평소 우리는 점으로서의 펜을 전혀 눈여겨보지 않는다. 하지만 돌이켜 생각해보시라. 그것은 지금 내 배우자(또는 애인)의 첫인상과도 같다. 평소에는 완전히 잊고 지낸다. 눈여겨볼 때도 아주 짧은 순간, 극히 제한되고 협소한 부분만을 볼 수 있다. 하지만 그것은 결정적이다. 그것은 시작할지 말지가 결정되는 대목이기 때문이다. 진열대에 꽂힌 수천개의 펜이 기껏해야 지름 1㎝ 남짓한 단면만 가지고, 저마다 최선 다해 자신의 매력을 함축적 부르짖고 있는 그 광경은, 우리에게 수천명의 모델 중 단 몇명만을 선발해야 하는 심사위원이 된 듯한 뿌듯함 및 포만감을 안긴다. 덕분에 우리는 오늘도 또다시 그중 한 녀석을 골라 테스트 용지에 줄 하나 그어보고 싶은 유혹을 떨쳐내지 못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는 우리를 펜의 셋째 마력으로 안내한다. 당장은 아니더라도, 우리는 결국 펜을 사고 만다. 필기구가 없어서가 아니다. 그 펜이 꼭 필요해서도 아니다. 아니다. 우리는 화장실 휴지를 사듯 펜을 사는 것이 아니다. 우리는 저요저요 스펙터클이 제시하는 수많은 가능성들 중 하나를 못 본 척 지날 수 없을 뿐이다. 이 가능성이야말로 스마트폰과 터치패드 난무하는 작금에도 여전히 펜의 생존과 진화를 가능케 하는 핵심적 요소가 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가능성? 대체 무슨 가능성? 그렇다. 그것은 바로 궁극의 선(線) 맛에의 가능성이다. 굳이 캘리그래피 같은 엘레강스한 용어 갖다 쓸 필요도 없다. 선 맛은 의무교육을 이수한 자라면 누구나 아는 것이다. 우리는 누구나 자기 나름의 선을 긋는다. 그리고 그 선은 어떤 식으로든 나름의 맛을 가지고 있다. 선을 그은 사람을 닮은. 펜이 품은 마력의 핵심은 바로 이것이다. 우리가 특정 펜을 진열대에서 뽑아 테스트 용지에 한 줄 그으며 알고자 하는 것은 그 펜이 우리가 기대하는 그 맛을 느끼게 해줄 것인가 하는 것이다. 인간의 손과 눈은 까다롭다. 인간의 신체 중 가장 만족시키기 어려운 기관 중 하나다. 하여 필자는 진열대 가득 꽂혀 있는 펜들을 볼 때마다 거의 자동적으로 와인저장고를 떠올린다. 그렇다. 지금 필자는 펜의 선 맛(그리고 손맛)을 와인의 세계에 감히 비유한다. 우리가 그리도 많은 펜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또다시 문구 매장 펜 진열대를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이유는, 와인 애호가가 와인랙을 그냥 지나치지 못하는 그 원리와 크게 다르지 않다. 세상에 아무리 많은 와인이 존재해도 내일은 또다시 새로운 와인이 눈앞에 나타나는 것이다. 와인이 신의 물방울이라면, 펜은 신의 작대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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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선은 나름의 맛을 가졌다
펜이 품은 마력의 핵심이다 그런데 필자가 펜을 와인에 ‘감히’ 비유한다고 했던가? 꽤 오래 글을 써 온 글쟁이로서는 물론이거니와 오랫동안 갖가지 펜으로 갖가지 드로잉을 해 온 스케치 애호가로서 단언컨대, 펜의 선 맛이란 와인의 맛만큼이나 깊고도 넓은 세계다. 아, 물론 한가지 결정적 차이점이 있다. 펜 쪽이 훨씬 작고 가볍고 저렴하다. 그러니 궁극의 선 맛을 찾아 오늘도 펜 진열대 앞을 서성이는 우리의 손과 눈과 마음은 편안한 호사를 누린다. 펜은 우리를 둘러싼 고물가 고비용의 광풍 속에서 드물게 만나는, 저렴하지만 확실한 행복 중 하나다. 글 한동원 소설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장소협찬 핫트랙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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