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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6.20 17:31 수정 : 2012.06.20 17:31

정재호 작가의 회현 제2 시범아파트를 소재로 한 <회현동 기념비>. 정재호 제공

[매거진 esc] 이제는 영화와 드라마 촬영 현장으로만 주목받는 서울시내 유서깊은 아파트 3곳을 가다

미국의 한 건축가는 반복되는 상자모양의 건물들이 획일적으로 들어선 대도시를 대규모 공동묘지와 같다고 했다. 고층으로 치솟는 우리의 아파트 도시는 되돌리기 힘들 만큼 멀리 온 것은 아닐까. 서울시내의 오래된 아파트 세 군데를 찾았다. 시간을 나이테처럼 두른 그곳에서 아파트의 ‘오래된 미래’를 엿볼 수 있다.

충정아파트.
회현 제2 시범 아파트
10층인데 엘리베이터 없어
<추격자> <무한도전> 등 촬영

회현 제2시범아파트 소파길을 따라 남산을 오르다 보면 왼쪽에 보이는 낡은 아파트. 콘크리트 골조에 붉은 벽돌로 벽을 쌓고, 창문마다 달아낸 ‘닭장’이 연립주택처럼 보인다. 가까이 다가가면 남산자락을 깊이 깎아 옹벽을 친 뒤에 쌓아올린 10층짜리 ㄷ자 아파트임을 안다.

1970년 국유지에 들어선 무허가건물 278가구를 헐어낸 자리에 아파트를 지어 315가구를 입주시켰다. 당시 시민아파트가 9~10평에 공중화장실인 데 비해 16.38평(실평수는 11.5평)에 개별화장실을 갖춘 ‘시범’ 아파트였다. 입주금 30만원을 15년에 걸쳐 2000원씩 갚아간다는 조건이다. 쌀 한 가마니가 5000원 할 때니 실제 철거민은 30% 정도 입주했다. 그나마 햇볕이 들지 않는 1~2층이 돌아갔다. 주민은 주로 남대문시장 상인들. 중앙정보부 직원, 경찰, 방송사 피디, 연예인 등 특별한 사람도 상당수였다고 한다.

시민아파트인 탓에 10층인데도 엘리베이터가 없다. 두곳에 구름다리를 두어 6층과 7층으로 직접 진입할 수 있도록 하고, 1층으로는 외부의 계단을 통해 출입할 수 있도록 했다. 낮은 층에 사는 원주민들은 공동장독대를 마련해두고 함께 김장을 담갔다.

42년이 흐른 지금 원주민들은 노인이 되었다. 건물 역시 낡아 수도꼭지에서는 녹물이 섞여 나오고 비가 오면 10층은 비상이 걸린다. 2006년부터 철거정리사업이 진행돼 주민 절반은 집을 비워 떠나고 나머지는 보상비 1억1000만원으로는 전세를 얻기 힘들어 머물고 있다.

각종 파이프가 노출된 컴컴한 복도, 건물 중간에 걸린 구름다리, 가구마다 달아낸 다양한 차양 등 독특한 생김새로 <추격자>, <친절한 금자씨>, <주먹이 운다> 등 영화 촬영 장소로 쓰였고 <무한도전>의 ‘여드름 브레이크’편에도 쫓고 쫓기는 추격전의 배경으로 등장했다.

82년 된 서대문 충정아파트
79년 앞 도로 넓히면서
집 절반이 뜯겨나가기도

서대문 충정아파트 버스정류장을 앞에 두고 1층에는 편의점, 지물포, 사진관, 음식점이 들어선 녹색 건물. 현관을 들어서면 훌쩍 먼 과거의 세월로 옮아가, 남의 집에 허락 없이 들어온 듯 당혹스럽다. 지은 지 82년 된, 가장 오래된 아파트에는 현대사가 고스란히 녹아 있다.

1930년에 지어진 이 아파트는 소유주 도요타 다네오의 이름을 따 ‘도요다아파트’(혹은 풍전아파트)로 불렸다. 높은 건물이 없던 당시 지하 1층, 지상 4층의 이 건물은 반도호텔(현재 롯데호텔 자리)과 함께 서울역 부근의 랜드마크였다. 중앙난방에다 엘리베이터를 갖췄으니 짐작할 만하다. 한국전 때는 미군이 점유해 유엔군 전용 ‘트레머 호텔’이 되었다. 1961년 미군은 한국 정부에 선선히 양도하는데, 이승만 정부가 아들 6명을 한국전에 바쳤다는 김병조라는 인물에게 이 건물을 주겠다는 사연에 감격해서였다. 김씨는 한 층을 더 올려 코리아관광호텔로 신장개업했다. 하지만 이 사람은 사기꾼임이 드러나 몰수됐다. 1979년에 앞길이 8차선으로 확장되면서 길에 면한 가구의 집 절반이 뜯겨나갔다. 그들은 갑자기 반으로 줄어든 집 면적을 넓히기 위해 마당 쪽으로 별도의 계단과 복도를 달았다. 기존 계단과 복도, 엘리베이터실을 점유하고자 했던 것. 그러나 다른 입주자들의 반발에 부닥쳐 방으로 꾸미는 것을 포기했다. 그런 탓에 중앙계단과 비상계단 외에 별도의 계단이 혹처럼 붙었다.

층마다 9가구가 입주해 있는데, 7.5평부터 30평까지 다양하다. 중정에는 기능을 잃은 거대한 굴뚝이 그대로 남아 있고, 복도 난간에는 화분들이 놓여 옛 영화를 짐작하게 한다. 복도는 항아리, 세탁기, 자전거 등 넘쳐난 살림살이가 가득 차 있다. 가끔 외부인이 들어와 세간을 집어가는 듯 ‘고물장수 출입금지’ 쪽지가 곳곳에 붙어 있다. 주민들은 낯선 사람의 출입에 매우 민감하다.

동대문아파트.
창신동 동대문아파트 ‘동묘역’ 근처 번쩍이는 주상복합건물과 오피스빌딩 틈에 귀부인처럼 고요한 6층 건물. 입구를 거쳐 중정에 들면 서울 하늘이 사각형으로 잘려 사유화한다. 중정을 중심으로 장방형 복도를 두어 양쪽 변에 11가구씩 한 층에 22가구가 산다. 가구별로 별도의 발코니가 없이 복도가 통로와 발코니를 겸한다. 6m 떨어진 맞은편과는 중간에 브리지를 두어 왕래하며, 도르래를 이용한 빨랫줄로도 이어져 있다. 이웃을 모르고 살기 마련인 도시민들이 마주보며 살도록 배려한 형태다.

1965년 신축 당시 최고급 아파트였다. 1980년대엔 연예인들이 많이 살아 ‘연예인 아파트’라고도 했다. 층마다 바닥에다 고딕체 아라비아숫자를 큼직하게 박았으며 둥글게 마감한 발코니 겸 통로의 난간이 초기의 우아함을 짐작하게 한다.

글·사진 임종업 기자 blitz@hani.c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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