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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6월13일 밤 8시~14일 새벽 3시, 한강의 밤에서 만난 사람들
“각자 맥주 두 캔씩안주로 치킨을 준비했어요.
스트레스도 풀고
상사 뒷담화도 합니다” 한강은 서울을 품고 흐른다. 북쪽에서 중랑천, 욱천, 홍제천, 불광천을 들이고, 남쪽에서 양재천, 탄천, 안양천을 끌어안고 묵묵히 흐른다. 때 이른 더위가 찾아온 지난 13일 저녁 한강변을 걸었다. 시내에서 흘러든 사람들이 강물처럼 왁자했다. 자정이 넘자 사람들은 조개처럼 입을 닫았다. 강남과 강북 물이 다르고 인터뷰에 응한 사람들한테서 힘든 서울살이를 읽을 수 있었다. 한강변은 또다른 배출구였다. 밤 8시 반 양화대교 밑. 흘러간 가요가 울려퍼지고 사람들이 동심원으로 모였다. 고세권(63)씨 일행의 색소폰 연주다. “7시 반부터 10시까지 연주를 해요. 오늘은 다섯 일행 중 세명이 나왔어요. 전문악사가 아니라 그냥 음악을 좋아하는 사람들이에요. 나는 정년퇴직을 한 뒤 하고 싶은 음악을 계속하면서 봉사도 할 수 있어서 좋아요. 날마다 다른 곡을 연주하려니 곡을 고르기 힘듭니다.” 편의점 주변에 삼삼오오 모여 이야기꽃이 피었다. 그 가운데 박태민(25)씨 일행 6명. 성산동 해운회사에서 함께 일하는 팀이다. “날도 좋고 회사에서 가까워 7시쯤 나왔어요. 한 사람에 맥주 두 캔씩, 안주로 치킨을 마련했어요. 스트레스도 풀고 상사 뒷담화도 합니다. 물론 그분은 안 나왔죠. 안주가 떨어지면 10시쯤 헤어질 겁니다.” 근처 물가에 최홍기(60·경기도 김포시)씨가 낚싯대를 드리우고 있다. “마누라 눈치 보여서 오후 2시부터 나왔어요. 젊어서 처자식 먹여 살리느라 고생했는데, 퇴직하고 나니 할 일이 없어요. 집사람이 파출부로 나갑니다. 쫓겨나지 않는 것만도 다행이죠. 엄청 좋아하던 술 담배 다 끊었어요.” 망원동 이창덕(55)씨는 아내 임미화(51)씨와 함께였다. 기자가 다가가자 임씨는 강아지를 안고 자리를 피했다. “나이가 드니 대화가 없어요. 텔레비전을 보다가 자는 게 고작이죠. 얼마 전 강아지를 새로 분양받으니 대화가 생기더군요. 4월부터 사흘에 한번꼴로 강아지를 안고 함께 나오고 있어요. 전에는 잘 안하던 회사 얘기, 집안 얘기를 합니다.” 9시 반 서강대교 아래. 상암고 1학년 이근수, 유한동, 김경건군이다. 이들이 타고 온 자전거는 엘이디(LED) 조명으로 번쩍거렸다. “기말고사가 3주 앞이에요. 스트레스를 풀러 나왔어요. 고교에 올라와 자전거를 타다보니 친해졌어요. 반포대교, 여의도 거쳐 성산대교까지 갔다 왔습니다. 달리고 나면 공부에 집중할 수 있어 좋아요.” 9시50분 마포대교 부근. 전 직장동료라는 김모세(32), 강명진(35)씨가 캔 맥주를 마시고 있다. “상수동에서 술 한잔 하고 2차를 하러 왔어요. 보통 만나면 고기 안주에 소주를 마셔요. 남자들끼리라 재미는 없지만 스트레스 풀기는 좋아요. 여자들은 사회생활, 군대 얘기 싫어하잖아요. 다 마시면 대리운전을 불러서 갈 거예요.” 10시 반 마포대교와 한강철교 중간. 마포구 도화동에서 온 50대 낚시꾼이 리시버를 꽂고 음악을 들었다. 혼자 있고 싶어서 나왔다고 했다. 왜 혼자 있고 싶으냐고 묻자 “잘 알 텐데”라며 웃었다. 11시 한강대교 부근. 아버지와 아들처럼 보이는 두 남자. 오늘 처음 만났단다. 아띠문학작가협회장 유병권씨와 음대생 신보석씨다. 막걸리로 얼굴이 불콰한 유씨는 시를 읊고 신씨는 아프리카 북인 젬베를 두들겼다. “울적해서 강변에 나왔다 북소리에 끌려왔어요. 내 시 한번 들어보시오. 서강에 붉은머리 풀고/ 하루를 뒤돌아보는 노을보다/ 더 아름다운 것이 있을까/ 네 개의 별자리에 달이 들어 바람이 일듯/ 사랑도 때론 천기에 매여 날퍼런 작두를 타야 할 때가 있다/ 이렇게 핏발 세워 뒤돌아보노라면/ 껍질에 매여 차마 털어내지 못하던 진실들 툭툭 튀어나와/ 내용증명서 하나 없이 갈라진 순정들/ 금빛 작두 위에서 허물 벗으리. (얼쑤) 상고시대 시와 음악이 하나였어요. 나중에 분리돼 리듬은 시가 되고 서사는 소설이 되었지요. 그런데 여기서 하나가 된 거지요. 멋지잖아요. 시인 중에 자기 시를 암송하는 사람이 얼마나 될까요?” 11시40분 한강대교 부근 편의점. 김도현(26)씨 일행 3명. 친구 생일을 축하할 겸 데이트를 하러 나왔다고 했다. 12시 동작대교 아래. 정아무개(68·용산구)씨가 쓰레기통에서 빈 깡통을 꺼내고 있었다. 짐바리 자전거에 실린 상자에는 납작하게 밟은 알루미늄 깡통이 가득했다. “밤 7시에 나와 12시까지 잠수교에서 여의도까지 돌아요. 하룻밤을 돌면 5000원 벌이는 돼요. 나처럼 고물을 줍는 사람이 여의도에 10명, 한강변에 4명이 있어요. 이것도 경쟁입니다. 아들 둘은 신용불량자, 아내는 파출부로 나갑니다. 산 입에 거미줄 칠 수는 없잖아요. 무릎이 안 좋아 오래 걷지는 못해도 자전거로는 다닐 수 있지요. 못사는 사람들 잘살게 해준다고 했는데 점점 더 살기 힘들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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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소영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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잠수교에서 여의도까지 돌아요.
하룻밤 돌면 5000원 벌이는 돼요” 12시30분. 반포대교를 건너 강남으로 가자 분위기는 급변했다. 잘 가꿔진 수변시설 사이로 연인들이 쌍쌍이 포옹을 하고 고급 외제차에 앉아 데이트를 즐겼다. 끼어들 틈이 없었다. 한 20대 젊은이는 한국에 살지 않는다며 인터뷰를 거부했다. 커피점에서 바리스타로 일한다는 한 청년은 노트북을 켜놓고 혼자 영화를 보았다. 맥주를 마시던 10여명의 젊은이들은 파장 분위기인지 손사래를 쳤다. 수상 카페에서 나온 야회복 차림의 사람들이 모임을 마친 듯 악수를 했다. 자정을 넘은 탓일까, 사생활 노출을 꺼린 탓일까, 사람들은 조개처럼 입을 다물었다. 새벽 2시. 동호대교를 건너 다시 강북으로 갔다. 환갑을 훨씬 넘겨 보이는 노인이 휘적휘적 한남대교 쪽으로 걸어갔다. 옥수역에서 전철 막차가 끊겨 첫차가 다니는 5시 무렵까지 강변에서 시간을 보낼 거라고 했다. 3시께 반포대교를 지나 한강대교로 향하는, 지팡이를 든 노인이 있었다. 고광복 전 성균관대 교수였다. 밤 9시에 자 새벽 2시쯤에 잠을 깬다고 했다. “늦게 다니는 게 아니라 일찍 일어난 거지. ‘조기’(早起)라는 말이 사서에 나와. 좋으니까 그런 말이 생기지 않았겠어? 젊어서 술을 많이 먹어 뇌경색이 살짝 왔어. 종합병원이야. 5년 전부터 술 담배 일체 끊었어. 내가 밖에 나가면 자식들이 비상이 걸려. 서너 차례 병원에 실려간 적이 있거든.” 글·사진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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