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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9.05 18:41 수정 : 2012.09.06 14:11

드라마에서 자주 보지만 실제로 직장인들이 사표를 ‘던지는’ 경우는 드물다

[매거진 esc] 커버스토리한달에도 열두번 사표를 던지고 싶은 당신위해
‘사표 사용설명서’…‘내튀족’은 되지 말자고

안녕하세요. 저는 ‘사표’입니다. 네, 그 사표 맞습니다. 당신이 월요일이면 불끈불끈 쓰고 싶어지는 그 사표요. 여러분은 사표를 ‘던진다’고 하시죠? 과연 던지는 사람은 얼마나 될까요? 불만 가득한 직장에서 상사의 어이없는 지시와 행동에 폭발해 묵혀두었던 분노를 담아 육두문자를 날리고, 결재 서류를 사무실 허공에 팽개친 뒤 사표를 상사의 얼굴에 대고 ‘던진다’. 꿈입니다, 꿈. 실제로 이렇게 사표를 냈다는 사람은 거의 들어본 일이 없네요. 영화나 드라마에서나 볼 일이지요. 그리고 현실에서 그런 일이 일어났다면 인터넷 게시판에 동영상이든 사진이든 찍혀 나돌아 다녔을 게 분명합니다. 대부분의 직장인들은 저를 차마 던지지는 못하고, 살며시 내려놓습니다. 그리고 그보다 저를 내놓지도 못하는 사람이 더 많지요. 저를 가슴속에 5년 동안 품고 사는 직장인도 진짜 있으니까요.

그래서 여러분께 알려드리려고요. 저를 던지지 않아도, 내지 않아도 됩니다. 그저 제가 있다는 것만으로 당신의 직장생활이 조금이라도 숨통이 트일 거라는 것을 알아요. 저를 품어온 많은 직장인들을 관찰해 결론 낸 ‘사표 사용설명서’, 이제 들어갑니다.

드라마 <역전의 여왕>의 한 장면(위), 드라마 <여인의 향기>에서 사표를 던지기 직전의 장면(아래)
괜스레 뒤적여본 사직서 검색
상사·동료들이 오해할 수 있어

1. 당장 낼 생각 아니라면, 절대 들키지 말라
직장인 3년차 병을 시름시름 앓고 있는 김미연(가명·30)씨가 있어요. 회사를 그만둘 용기는 전혀 없지요. 20번째 면접을 보고 들어온 회사인걸요. 중소기업이지만 나름 견실한 회사랍니다. 그럼에도 좀이 쑤시는 겁니다. 그래서 사표를 써볼까 생각했어요. 인터넷 포털에 검색을 했습니다. 김씨의 자리 뒤에는 정수기가 있습니다. 모든 상사와 동료가 드나드는 그런, 안 좋은 자리지요.

직속 과장이 김씨를 불렀습니다. “어디 좋은 자리 생겼어?”라고 물었답니다.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고 웃으면서 “무슨 말씀이세요”라고 했으나, 굳은 과장의 얼굴은 펴지지 않았고 과장은 “그럼, 사표 쓰는 법은 왜 검색하는데?”라며 점점 분위기는 험악해졌지요.

저, 사표는 그런 존재예요. 아예 그 주어진 역할을 하지 못할 바에야 없는 게 낫죠. 괜스레 이런 곤란을 겪는 직장인분들을 참 많이 뵈었네요. 정 저에 대해서 궁금하시다면, 집에서 해주세요. 사무실은 밤말도 상사가 듣고, 낮말도 상사가 듣는 곳이랍니다. 이 점을 놓치고 회사에서 ‘곧 퇴사할 사람’으로 찍혀 불편한 세월을 보내다가 의지와 상관없이 정말 저를 만나는 수가 있다고요!

2. 여러장 써도 좋다. 다만 이유를 적어보자
날마다 마음으로는 사표를 쓴다는 분들 참 많으세요. 직장생활의 고단함이야, 말로 해서 무엇하겠어요. 그래서들 저를 그렇게나 찾고, 쓰고, 마음속으로만 내던지고 하시잖아요. 금융회사에 다니는 이명수(가명·32)씨는 날마다 금융권의 거래 마감시간이 다가오면 입뿐만 아니라 식도까지 바짝 탄다고 하소연해요. 날마다 평가되는 실적, 그에 따른 보상 또는 질책에 진절머리가 난다고 해요. 그래서 그는 회사에 들어온 뒤 적어도 한 달에 한 번은 사표를 써놓는다고 해요.

“요즘 가뜩이나 금융권 경기가 안 좋다는데, 여기서 나가면 갈 곳도 없어요. 그렇지만 정말 미치기 일보 직전까지 갈 때가 많아요. 뛰쳐나가고도 싶고. 그럴 때 사표를 써요. 진짜 사표. 그런데 진짜 내지는 않을 거예요, 아마.” 그가 보여준 저의 속지에는 사직사유서가 꽂혀 있어요. 그러니까, 장난 아닌 저, ‘사표’이죠. 가장 큰 공란인 ‘사유’란이 빽빽해 보이네요. 보통 직장인들은 ‘일신상의 사유’라는 간단한 문구로 이 공란을 때우고 말거든요. 하지만 이씨의 사유란에는 ‘노닥노닥’ 직장 상사와 ‘갑질 대마왕’ 거래처, ‘얌체’ 동료까지 등장인물이 화려합니다. “좀 웃기죠? 그런데 이렇게 사유란에 쓰다 보면 정말 웃긴 거예요. 내가 이런 사람들 때문에, 이런 상황 때문에 회사를 그만두어야 하나 생각이 들더군요.” 그래요. 이씨에게는 제가 일기이고 일지인 셈이죠. 차분히 정리를 하다 보면 역설적으로 스스로 이 직장을 그만둘 이유는 사라진다고 하네요. 그렇다니까요, 제가. 꼭 내지는 않아도 돼요. 그냥 있는 것, 쓰는 것만으로도 위로가 되니까요.

카카오톡 오늘의 웹툰에 연재하는 이말년 작가의 4컷 만화 가운데 사표를 주제로 한 에피소드

문자, 이메일 등으로
사표 낸 뒤 바로 나몰라라
기본 상식에서 벗어나

3. 내고 도망칠 생각은 말라
저를 내고 회사를 떠나시는 분들 가운데, 이른바 ‘내튀족’이 있습니다. ‘내고 튄다’의 줄임말이지요. 저만 불쑥 내놓고 다음날 회사를 안 나오시는 직장인들이 있어요. 가끔은 휴대전화 문자로 사표를 보내는 사람도 있다지요? 뭐 그러라고 사표가 있는 것 아니냐고 하십니다. 그런데 저는 홀로 남아 얼마나 심한 욕설을 감내해야 하는 줄 아시나요? “뭐, 저런 새끼가 다 있어”부터 상상할 수 있는 모든 험담과 욕설은 저에게 쏟아진답니다.

그러니까 저를 낼 때에도 뭐 낯간지럽지만 ‘도의’라는 게 있다고들 하시더라고요. 특히 회사에서 어떤 일을 하다 손해를 입혔을 때 말이죠. 이때 저를 떠올린 분들 대부분은 참을 수 없이 미안한 마음이란 거 압니다. 오죽하면 고개도 못 들고 사무실로 쭈뼛쭈뼛하고 들어가 저를 살짝 내놓고 줄달음질쳤겠어요. 하지만 이렇게 저를 사용하시는 거 반칙입니다.

회사를 그만둬야 할 시점에 적어도 한달 정도는 앞서 회사에 알리는 게 좋겠죠. 그래야 당신이 없어도 회사가 잘 돌아갈 테니까요. 뭐 당장 당신이 없어도 회사는 어떻게든 돌아가겠지만, 그래도 무리를 줘서는 안 되니까요. 그리고 회사에 손해를 입혀 도망치고 싶을 때, 회사는 당신을 놔주지 않아요. 수습할 것을 요구하죠. 사표를 냈다간, “일단 수습하고, 나중에 내게” 하는 말을 듣게 되죠. 그 수습 기간이 짧다면 괜찮지만, 수개월 동안 이어진다면 곤란하겠죠. 실제로 이런 일을 겪어본 최아무개(36)씨는 “퇴직 의사를 밝히고 다섯달 뒤에 사표를 냈다. 그 다섯달 동안은 정말 지옥이었다”고 증언합니다.

4. 저를 정말 원하신다면
저는 마지막 보루라고 생각하시나요? 마지막이 아닐 텐데요. 저를 내고 난 뒤에도 밀려올 생활의 고단함은 어디로 가겠습니까? 어쩌면 순간일 수도 있어요. 그 해방감은. 인생에 또다른 길을 내는 기회로 삼을 수도 있지요. 하지만 그 길을 즐길 준비 되어 있나요? ‘무슨 사표가 이렇게 말이 많아?’라고 짜증내실 분 있겠습니다. 뭐 저야 짜증을 항상 듣고 살았으니, 큰 문제 아닙니다. 당신이 문제이지요. 결국엔 저를 또 휴지통으로 내던지실 거잖아요. 또박또박 써내려간 사표였지만 사무실에 들어서자마자 희미해지는 의지를 저는 수도 없이 느껴왔답니다. 출근 버스에서만 해도 의미심장한 기운에 심장까지 두근두근대더군요. 그러다가 ‘두근두근’ 소리는 ‘콩닥콩닥’으로 바뀌더랍니다. 소심해지는 당신을 나무라는 게 아니에요. 저를 내고 실업수당도 제대로 받지 못할까 전전긍긍하게 되는 우리의 현실이 어쩌면 더 문제인 것이지요. 후들거리는 다리에 힘을 주고, 한발 나가보죠. 저를 낸다고 인생은 끝나는 게 아니니까요. 부디, 저를 만날 구겨 휴지통에 넣지만 말아주세요. 그게, 제 마지막 부탁, 제 마지막 사용설명서입니다!

글 이정연 기자 xingxing@hani.co.kr


떠날 때는 말없이~

사표의 달인이 제안하는 ‘진짜’ 사표 잘 쓰는 법

취업포털 네이버는 재미있는 검색 행동을 한가지 발견했다. ‘사표’와 이와 관련된 검색어의 검색 빈도가 월요일에는 가장 높았다가, 금요일로 갈수록 점점 줄어든다는 사실이다. 월요일 검색 횟수를 100으로 하면, 금요일에는 60 정도로 감소한다는 이야기이다.

주말의 꿀휴식을 취한 뒤 사무실에 들어서면 불타는 노동 욕구보다는 불타는 ‘사표 던지기’의 욕구가 더욱 샘솟는다는 ‘사용자’에게는 불편한 진실.

사표가 ‘일상’과 가까운 것이라 여겼다. 그냥 감이 아니다. 실제로도 그렇다. 잡코리아의 ‘충동적인 사표 제출 경험 유무’ 설문조사 결과를 보면 알 수 있다. 직장인 746명이 이 조사에 응했는데, 10명 중 6명이 ‘이직 등과 같은 특별한 목적 없이 충동적으로 사표를 제출한 경험이 있다’고 답했다. ‘사표 내고 나만 이 사회에서 뒤처지는 것 아니야?’ 하고 걱정하는 직장인들에게는 반가운 진실.

그러나 막상 사표 내기에도 ‘처세’의 요소가 필요하다. 던지고 나와도 된다. 다음 직장을 생각하지 않는다면. 그래서 알아봤다. 사표 잘 내는 법. 사표의 달인 지명우씨에게 물어봤다. 그는 아직 세번밖에 사표를 안 내봤다고 겸손을 떤다. 그런 그의 나이 35살이다. 적지 않은 사표 제출 횟수이다.

“사표를 쓰고 싶어하는 친구들이 저에게 가장 많이 물어보는 거예요. 고민은 충분히 한 거 맞냐고. 저는 반대로 되묻죠. ‘얼마나 해야 충분히 고민하는 건데?’라고요.” 그는 직장인 자기개발서 등에 나오는 ‘사표는 최대한 고민한 다음 제출하라’는 식의 조언이 맞지 않는다고 주장한다. “직장인 입장에서 쓰지 않은 거지요. 객관적인 판단이 가능할까요? 게다가 회사를 그만두고 싶어하는 사람이요. 저는 딱 한가지 기준뿐이라고 생각해요. 월급 몇 달 받지 않고도 당당히 살 수 있는지요. 회사는 언제나 그만두고 싶은 곳이잖아요. 그만두고 싶은가 아닌가 스스로에게 계속 물어봤자 답은 안 나와요.” 지씨의 조언은 단호하다.

사표를 잘 쓰는 법도 경험에서 우러나온 이야기를 쏟아낸다. “사표 안에 퇴직사유서 등을 쓰라고 하잖아요? 여기엔 구구절절 이유를 쓸 필요가 없어요. 그걸 꼼꼼하게 따져 읽는 인사과도 없고요. 개인 사정을 이유로, 일신상의 이유로, 같은 말인데 이 정도 표현이면 돼요.” 그러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꺼냈다. “얼마 전 직장인들 사이에 화제가 된 사직서 사진이 있었어요. 여직원이 직속 부장에게 낸 사직서였죠. 당신의 입냄새가 심했다. 건강에 좋으니 ‘엿 먹어라’, 덕분에 좋은 회사 떠나게 된다 따위의 내용이었어요.” 직장인에게 낄낄거림을 선물하는 소위 직장인짤(직장생활을 희화화한 내용을 담은 사진)의 전형이다. 지씨는 “그걸 설마 진짜 냈겠어요. 직장인짤용이죠. 그리고 실제로 낸다고 해도 전 잘했다고는 못할 것 같아요. 앞으로 회사생활 안 할 게 아니라면 말이죠. 요즘 이직할 때 평판 조회가 얼마나 까다로운데요.” 결론은 간단하다. 떠날 때는 군말없이, ‘일신상의 사유로 퇴사하고자 함’이면 된다.

이정연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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