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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보음악가들. 왼쪽부터 이상호, 이진원, 김홍기, 우주호, 강창련, 송필화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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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농어촌과 복지시설 등 다니면서 무료 공연하는 성악가들
바보는 어리석고 못나게 구는 사람 또는 지능이 부족하고 어리석어서 정상적으로 판단하지 못하는 사람을 일컫는다. 여기서 ‘정상적’이란 대부분의 사람들이 옳다고 여겨 판단하고 행동하는 기준을 말한다. 우주호, 이진원, 박정환, 구자경, 이세원, 송필화, 김홍기, 이재필, 차경훈, 유호제, 이상호, 강창련, 김준빈, 한민선, 홍민선, 송명진. 자칭 타칭 ‘극장을 떠난 바보 음악가들’이다. 대부분 10년 이상 국외에서 공부하고 돌아와 후학들을 가르치며 오페라 무대에 서는 내로라하는 실력파다. 이들은 화려한 무대에 설 시간을 쪼개 면사무소, 과수원, 해안가 뻘밭 등 농어촌은 물론 장애인 시설, 다문화가정, 보육원, 노인복지관 등을 다니며 연주회를 한다. 2004년 9월 결성해 지금껏 8년 동안 900회를 넘겼다. 소리소문도 없이. 지난 8일 오후 경기도 화성시 서신면 옥란재를 찾았다. 바보음악가들이 그곳에 출현한다는 소문을 듣고 그들을 만나 정말 바보인지 확인하고 싶었다. 옥란재는 바보들의 멘토인 홍사종 미래상상연구소 대표가 나고 자란 곳으로 홍씨 집안에서 3대에 걸쳐 가꿔온 한옥과 정원이 아름답다. 현재는 옥란재단 소유로 전통한옥과 숲을 체험할 수 있는 공간으로 활용하고 있다. 이날 공연의 관객은 숲체험학교에 온 외국인 유학생들, 도시농부학교에 참석한 기업인들과 그곳 주민들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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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8일 옥란재 공연 뒤에 열린 뒤풀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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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미복에 맨발도
할머니의 꼬깃꼬깃 만원 팁에 울컥 ‘오늘의 바보들’은 우주호, 이진원, 이상호, 김홍기, 강창련, 송필화, 한민선. ‘경복궁타령’, ‘산촌’, ‘향수’ 등 한국 가곡에 이어 ‘에 루체반 레 스텔레’(별은 빛나건만), ‘우나 푸르티바 라그리마’(남몰래 흐르는 눈물), ‘라 돈나 에 모빌레’(여자의 마음), ‘여자보다 귀한 것은 없네’, ‘푸니쿨리푸니쿨라’, ‘오 솔레 미오’(오 나의 태양) 등 이탈리아 가곡과 뮤지컬곡을 부른 뒤 관객과 함께 둥글게 원을 그리며 ‘아리랑’을 합창하는 것으로 마무리했다. 딸과 함께 온 주민 신만철·안영일씨 부부는 이런 공연은 처음이라면서 성악가들의 노래를 직접 들어보니 가슴이 벅차다고 말했다. 관객으로 참여해 지켜본 결과 이들은 정녕 바보였다. 우선 조명이나 음향시설이 있건 없건 개의치 않는다. 음악회가 열린 장소는 무대, 마이크, 스포트라이트는 물론 흡음시설도 없는 강당. 울림통이 큰 남자 여섯의 목소리는 좁은 공간을 들었다 놨다 했다. 대개 이들이 찾아가는 곳은 성악가들이 서기에는 조건이 나쁜 일반 복도, 강당 또는 툭 터진 야외. 고급한 이들의 소리가 공명하기는커녕 무질서하게 튀거나 허공으로 사라지기 일쑤. 우스꽝스럽게 연미복 차림에 맨발일 때도 있다. 오로지 힘과 패기로 밀고 나갈 따름이다. 관객을 가리지 않는다. 10년 이상 유학하면서 갈고닦은 솜씨를 마구 던진다. 찾아가는 공연의 관객들은 대부분 클래식을 처음 접하는 사람들. 예컨대 손바닥 대신 몽당손으로 딱딱이 박수를 치는 한센병 환자들, ‘어으 어으’ 외마디 소리로써 따라 부르기를 대신하는 언어장애인들이다. 이날의 주요 관객인 유학생들에게 한국 가곡은 낯선 선택이었다. 그러나 낯섦은 이탈리아 가곡을 거쳐 아리랑으로 수렴하면서 소멸됐다. 툭하면 덩달아 우는 울보들이다. 바보들의 좌장인 우주호(상명대 외래교수)씨는 기억나는 공연이 뭐냐고 묻지 말라면서 사연 없는 공연이 없었다고 했다. 자폐아, 치매 노인을 위한 시설에서 ‘청산에 살으리라’를 부르자 아동의 부모와 간병인들이 울더란다. 바보들이 함께 운 것은 당연한 일. 우씨는 사회보장의 울타리 밖에서 우울증을 앓는 사람들이 참 많더라고 했다. 바보그룹에 1년 전 동참한 송필화씨는 “마음 아픈 이들이 깊이 호응하는 모습을 보면서 우리가 약은 주지 못하지만 음악치료사 역할을 하고 있음을 느낀다”고 말했다. 무엇보다 입장료가 없다. ‘귀한 소리’를 들려줘 고맙다는 할머니한테서 꼬깃꼬깃한 만원짜리 사후 ‘팁’을 받은 적은 있다. 그럼 이들은 흙 파먹고 사는가. 그렇지는 않다. 개런티는 아니어도 거마비는 받는다. 미래상상연구소 홍사종 대표는 이들을 후원하는 또다른 바보들이 있다고 전했다. 중소기업인, 대학교수, 출판인, 소설가, 변호사 등 다양한 인사들이 십시일반 후원금을 낸다. 최근에는 농협이 가장 많은 지원을 하고 있다. 후원자 중 한명인 김병종 서울대 미대 교수는 이름값을 따지는지 큰 기업에서는 후원하지 않는다며 안타까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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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기도 화성시 옥란재에서 열린 ‘극장을 떠난 바보음악가들’ 공연. 마지막에 함께 부른 ‘아리랑’은 갈등해소 구실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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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인 후원자들 십시일반 지원
대기업들은 티 안난다고 외면 이들은 왜 바보짓을 할까. 소통, 즉 관객과 하나되기 위해서다. 음악은 원래 지금처럼 관객과 분리되어 무대에서 공연되지 않았다. 일과 놀이가 함께하는 사람들의 삶터가 곧 극장이었다는 것이다. 홍사종 대표는 바보들의 행위를 두고 ‘실핏줄 문화운동’이라고 말하고 우주호씨는 ‘문화 미경험 계층을 위한 문화운동’이라고 말한다. 농어민이나 저소득층은 왜 뽕짝이나 트로트만 좋아한다고 생각하는가 말이다. 문화를 누릴 기회도 주지 않고 소외지역 또는 계층이라고 규정하는 것은 오만이라는 것이다. 우씨는 음악을 공유하면 누적된 갈등이 해소되더라면서 충북 옥천 다문화가정 세미나 사건을 들려주었다. “필리핀, 베트남에서 시집온 여성들을 위한 세미나 도중 남편들이 찾아와 항의를 하더군요. 당신들이 그들의 눈을 뜨게 만들어 언제든 도망갈 수 있게 만든다면서요. 결국 세미나를 중단하고 행사 끝에 등장할 예정이었던 우리가 나설 수밖에 없었어요. 필리핀 여성들한테도 익숙한 팝송을 부르고 나중에는 함께 손잡고 어깨를 겯고 노래를 부르자 울음바다가 되었어요. 그러고 나자 나머지 행사는 일사천리로 진행되었습니다.” 그랬다. 바보들이 조금씩 세상을 바꾸고 있었다. 우공이산이라고 하지 않는가. 글·사진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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