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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위의 고도 차만 1086m에 이르는 세계 최대의 화강암 덩어리 엘캐피탄(2307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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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요세미티를 국립공원으로 지킨 존 뮤어와 세계적으로 알린 사진가 앤설 애덤스 요세미티 계곡에 애초 정착한 이들은 아메리카 인디언인 어와니치족이었다. 절경 앞에서 누구나 입을 다물지 못하는 이곳을 인디언들은 ‘하품하는 입’이라고 불러왔지만 점령자들은 인디언들이 이곳에 흔한 곰을 보며 외친 “요세미티”(인디언 말로 곰)를 지명으로 알아들었다. 원주민 멸망사와 동의어인 미국의 서부 개척기와 금광개발 열풍을 거치면서 요세미티의 비경은 바깥세계에 알려지기 시작했다. 경탄이 쏟아지며 탐험가와 여행객들의 발길이 몰렸고, 요세미티는 엄청난 개발 가치를 지닌 관광자원으로 주목받았다. 요세미티를 향한 숱한 찬사에서 두 사람의 기여가 돋움새겨져 있다. 한 사람은 자연의 본래 모습이 훼손되지 않도록 그 가치를 지키는 데 평생을 바쳤고, 또 한 사람은 요세미티가 지닌 경외스런 아름다움을 이미지로 만들어 널리 알리는 방법을 택했다. 존 뮤어와 앤설 애덤스의 자취는 요세미티공원에서 쉽게 만날 수 있다. 자연은 최대한 원래대로 보존되어야 한다고 주창한 존 뮤어는 국립공원 지정을 통한 자연보호를 이끌어내고 요세미티를 미국의 대표적 국립공원으로 만든 자연주의자다. 20세기 자연주의 사진예술의 우뚝한 봉우리인 앤설 애덤스는 요세미티에 머무르며 대자연의 경이를 담아낸, ‘요세미티의 공식사진가’로 불린다. 두 사람은 젊을 때 요세미티를 방문했다가 그 아름다움에 매혹되어 자연 지킴이로서의 삶을 살았지만, 그 정신은 요세미티를 넘어 현대 환경운동과 사진예술에 뚜렷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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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어도어 루스벨트(왼쪽) 대통령과 존 뮤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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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 보존과 환경운동에 기여
기리는 여행자들 줄이어 존 뮤어(1838~1914)
스코틀랜드 출신의 이민자 존 뮤어는 1868년 요세미티를 처음 방문한 이후 시에라네바다 산맥을 중심으로 지질연구와 탐험에 나서고 산악문학가로 활동했다. 벌목과 방목 등으로 요세미티가 훼손되는 것을 목격하고 파괴를 막기 위한 국립공원 지정운동에 나섰다. 1892년에는 시에라클럽을 창설해 미국 최대의 환경단체로 키워내고 개발주의에 맞서 자연의 가치를 적극 대변하며 이후 환경운동에 큰 영향을 끼쳤다. 시에라클럽은 물 공급을 위해 요세미티공원 안에 헤치헤치댐을 짓겠다는 샌프란시스코시와 대립하며, 개발과 보존에 대한 국가적 논쟁도 불렀다. 요세미티공원 방문객센터에 있는 역사관에는 그에 관한 자료가 생생하다. 시어도어 루스벨트 대통령이 1903년 요세미티 계곡을 찾아 존 뮤어와 야영을 한 뒤 함께 골짜기를 내려다보는, 미국 국립공원 역사의 상징이 된 사진도 전시돼 있다. 사후 그를 기념하기 위해 시에라클럽에 의해 요세미티 계곡과 미국 본토 최고봉인 휘트니봉을 잇는 358㎞의 존 뮤어 트레일이 만들어졌다. 식량과 잠자리를 짊어진 채 20여일간 산길을 오르내리는 고된 여정이지만, 아름다움과 험준함으로 세계 3대 트레일로 꼽히는 길이다. 존 뮤어가 ‘빛의 산맥’이라고 이름 붙인 하이 시에라의 비경을 걷기 위해 미국만이 아니라 세계 곳곳에서 등반 신청이 쇄도한다. 계곡에서 만난 일본인 젊은이 4명은 4일간의 일정으로 “투올러미 초원까지 존 뮤어 트레일을 걷기 위해 처음으로 미국을 찾았다”며 허리부터 머리 끝까지 등짐을 진 채 산속으로 들어갔다. 산길에서는 요즘 차림 대신 100여년 전의 장비와 복장을 그대로 갖춘 채 아미시처럼 ‘존 뮤어 스타일’ 트레킹을 하는 이들도 만났다. 면직 배낭 위에 모직 담요를 말아 맸고 나무지팡이에 투박한 구두를 신었다. 사진과 이름 공개 제의에 고개를 내저은 두 젊은이는 “휴가를 내고 존 뮤어 트레일의 일부 구간인 33㎞를 6일간 걷는다”며 “이런 차림으로 트레킹은 매우 힘들지만, 존 뮤어의 정신에 가까이 가고자 함이다”라고 말했다. 요세미티 계곡에서 하프돔으로 가는 길이 존 뮤어 트레일의 들머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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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원 안에 있는 앤설 애덤스 갤러리에서는 작품 전시와 함께 애덤스의 사진집을 판매한다(위), 앤설 애덤스의 작품 ‘달과 하프돔(아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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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세미티 알리는 데 결정적 역할 앤설 애덤스(1902~1984)
요세미티와 앤설 애덤스를 모르는 이들도 그의 작품을 접해본 경우가 많다. 거대한 바위산 위에 달이 떠 있는 흑백사진 ‘달과 하프돔’을 비롯해 그의 작품이 워낙 널리 알려져 있기 때문이다. “요세미티를 처음 본 14살 때 내 운명을 알았다”는 애덤스는 평생에 걸쳐 요세미티의 아름다움을 흑백사진으로 기록했다. 사람은 그림자도 담지 않고 장엄한 자연을 세세하게 묘사한 그의 작품은 보는 이에게 자연에 대한 경외감을 불러일으킨다. 정밀한 노출을 위해 존(Zone) 시스템을 개발하고 완벽한 인화 품질을 고집한 그는 노출과 빛의 마술사로 불리며 현대 사진예술의 기법과 철학에도 상당한 영향을 끼쳤다. 애덤스는 18살 때 시에라클럽에 요세미티 자연감시원으로 첫발을 내디딘 이후, 클럽 전속 사진가로 활동하며 탁월한 작품으로 요세미티와 자신의 이름을 알렸다. 흑백사진으로 완벽한 표현을 추구한 그는 37년간 시에라클럽의 이사로 활동하며 이 단체의 환경운동에 적극 참여한 것으로도 높은 평가를 받는다. 예술가가 지속된 작품 활동을 통해 현실에 개입하고 영향을 끼친 본보기다. 애덤스 때문인지 요세미티에는 등반객과 관광객 못지않게 사진 장비를 짊어진 채 빛과 구도를 찾아 나서는 이들도 많다. 엘캐피탄 아래나 글레이셔 포인트 등 애덤스의 작품이 만들어진 숱한 촬영 명소마다 그와 비슷한 앵글에 풍광을 담으려는 이들의 시도가 가득하다. 요세미티공원에는 앤설 애덤스 갤러리도 있다. 미국의 주요 사진갤러리로 꼽히는 곳으로, 깊은 산속에서 현대 사진작가들의 작품 전시가 이뤄지는 곳이기도 하다. 6일 코스의 워크숍을 비롯해 전문가와 관광객을 위한 다양한 프로그램의 사진찍기 교육과 실습도 이뤄진다. 애덤스 작품집과 프린트물도 전시·판매하고 있다. 요세미티(미국 캘리포니아)=글·사진 구본권 기자 starry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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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에라 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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