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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09.20 10:19 수정 : 2012.09.20 10:19

황학정 현판. 정자 내부에 태극기와 고종황제 어진이 보인다.

[매거진 esc] 고종 활 쏘던 황학정·인조때 만들어진 석호정 역사적 의미도 깊어

전국에 360개의 활터(국궁장·사정)가 있다. 서울에는 조선말까지 40여곳의 활터가 있었으나, 거의 사라지고 지금은 8곳이 남았다. 이 중 활발하게 운영되는 곳은 황학정·수락정·살곶이정·석호정 등 5~6곳 정도다. 역사적으로 의미가 있고, 새로운 변화를 겪고 있는 활터 두 곳을 소개한다.

인왕산 황학정 조선시대 활터는 관리들이나 한량들의 체력단련·정신수양 시설이자 사교 장소였다. 그러나 대한제국 군대 무기에서 활이 제외된 뒤 활터들은 쇠퇴 일로를 걸었다 이에 고종황제는 조선 궁술의 전통을 잇고 백성 체력증진을 위해 다시 궁술을 장려하게 된다. 경희궁 북쪽에 활터를 만들고 고종황제가 자주 들러 활을 쏘기도 했다. 이곳이 황학정(1898년)이다. 황학정은 1922년 일제가 경성중학교를 짓기 위해 경희궁을 헐면서 사직동 현 위치(옛 활터 등과정 부근)로 옮겨졌다.

황학정을 계기로 다시 전국 활터들이 복원되기에 이른다. ‘황학’은 누런 곤룡포를 입고 활을 쏘는 고종황제의 모습을 상징한다. 고종이 쓰던 각궁 ‘호미’(虎尾)와 화살통인 ‘전통’이 황학정에 보관돼오다 지금은 육사 육군박물관으로 옮겨졌다. 임금이 쏘는 과녁은 ‘웅후’라 하여 곰을 그려넣은 별도 과녁을 사용했다. 황학정에선 황색의 궁대(화살을 넣는 허리띠와 주머니)를 쓰는데, 황색 궁대는 황학정에서만 쓸 수 있었다고 한다.

황학정 정자 안엔 지금도 태극기와 함께 고종황제 어진이 모셔져 있다. 활 쏘러 오는 이들은 오자마자 가장 먼저 어진을 향해 허리 굽혀 인사를 드린다. 황학정 신동술 사두는 “황학정은 고종황제가 직접 활을 쏘던 곳이자, 양궁 태동기에 양궁 교육을 했던 유서깊은 활터”라고 말했다.

남산 석호정 여느 활터처럼 회원제로 운영돼왔으나, 지난해부터 서울시 직영으로 운영방식을 바꾸고 대중화를 선언해 눈길을 끈다. 회원제를 폐지해 비싼 입회비 없이도 누구나 찾아와 국궁을 배우고 쏠 수 있다. 1회 이용료 3000원, 월 이용료 3만원. 석호정은 조선 인조 때(1630년) 처음 만들어진 유서깊은 활터다. 본디 옛터는 산 아래쪽에 있었으나, 1970년 현 위치로 옮겨 복원했다. 석호정에서 국궁을 가르치는 권무석 궁장은 “조선시대 청계천 북쪽을 ‘윗대’, 남쪽을 ‘아릇대’라 했는데, 석호정은 아릇대를 대표하는 활터였다”고 말했다.

권 궁장과 함께 활쏘기 지도를 맡고 있는 연익모 국궁문화협회 총재는 “석호정은 국내 첫 개방형 활터”라며 “누구나 언제든지 와서 기본교육을 받은 뒤 활을 쏠 수 있다”고 말했다. 청소년들을 위한 10m, 30m 사대가 마련돼 있다.

글·사진 이병학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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