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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미애씨가 1980년대 가내공장 동료 이경미씨한테서 받은 손글씨 편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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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라이프
1000여통의 손편지 고스란히 모은 서미애씨·편지쓰기로 문인 된 이수옥씨
“많이 기다렸지. 그럼 배달부 올 시간이
되어서 그만 쓴다” 요즘은 편지 쓰는 사람을 찾아보기 힘들다. 더군다나 손글씨로 쓴 편지라면 더 그렇다. 올해 8월까지 28억통의 우편물 가운데 사신은 4500만통으로 1.6%에 지나지 않는다. 해마다 점점 줄고 있다. 휴대전화로 당장 목소리를 들을 수 있고, 전자우편(이메일)으로도 사연을 전달할 수 있는데 굳이 편지를 고집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그것이 손편지를 전부 대신할 수는 없다. 편지지에 꾹꾹 눌러쓰는 동안의 사랑과 그리움, 답장을 기다리는 동안 우리의 삶을 채웠던 설렘을 어떻게 담겠는가. 예전에는 집집이 <편지투백과> 한권쯤은 갖추고 있었다. 가을을 맞아 소중한 사람에게 편지 한장 어떤가. 좀 생뚱맞은가? “올라간 후 몸 성히 잘 있는지. 그리고 작업이 있는지 무척 궁금하여 전화를 낼려고 몇 번이나 망설이다 전화요금 절약하려고 그냥 있다가 마침 인편이 있어 몇 자 적는다. 이곳은 다 무사하며 너의 어머니는 3일 전부터 버섯공장에 일 나가고 나는 나무라도 많이 할 예정이다. 아버지는 한동안 마음이 무척 괴로워 술을 당분간 마시다가 이젠 정신을 똑바로 차려 가정 일에 전념을 하고 있으니 아무 걱정 말고 네 일을 열심히 하기 바란다.”(하략) 서미애(51·서울 중랑구)씨는 4일 편지 몇 통을 보여줬다. 1000여통 가운데 손에 잡히는 대로 가져왔다는 낡은 편지에 우리의 70~80년대가 고스란하다. 경북 청도가 고향인 서씨는 1976년 초등학교를 졸업한 뒤 집안일을 돕다가 경산읍 소재의 섬유업체 직공으로 취업했다. 79년 상경해 성북구 장위동 가내 편물공장에서 일을 했다. 이 편지는 1980년 무렵 아버지가 인편에 부친 것이다. ‘공순이’가 보낸 돈은 시골에서 송아지가 되고, 송아지가 커서 남동생 대학등록금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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편지쓰기를 매개로 만난 서씨(왼쪽)와 이수옥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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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실이고 싶은 거짓사연으로
포장한 펜팔편지를 부치려고
우체통으로 달렸다” “책 읽기에 한결 좋은 가을이 찾아왔구나. 편지를 받고 선생님은 아주 기뻤다. 미애는 다른 어린이만큼 훌륭히 공부를 할 수 있었지만 건강 때문에 중학교에 못 간 것을 매우 안타깝게 생각했단다. 그러나-. 생각해보렴. 어려운 일을 헤치고 굳세게 살아가면 무엇인가 하늘이 돕는 일이 있단다. 꼭 미애는 남부럽지 않은 생활을 할 수 있을 거야. 선생님의 말씀을 염두에 두고 매사에 노력해 보렴. 우선 책을 구해 공부도 해보고 또 기술도 배워보렴.” 서씨는 검정고시로 중·고등학교를 졸업하고 현재 방송대 국어국문학과에 적을 두고 있다. 서씨처럼 방송대를 다니는 이수옥(60·경기도 하남시 덕풍1동)씨. 지난 6월 남편 환갑을 맞아 창작집 <동류항 두개로 이룬 꿈>을 펴냈다. 3년 전에 낸 수필집에 이은 두번째 책이다. 그를 문인으로 만든 것은 편지다. 부부싸움 끝에 보관해온 1000여통의 편지를 모두 태워 증거는 없지만 여공 시절을 추억한 글 ‘가슴시린 고구마편지’를 보면 편지로 성장해온 그의 궤적이 여실하다. “유치찬란하고 낯간지러운 연애편지, 진실이고 싶은 거짓사연으로 포장한 펜팔편지를 부치려고 점심밥을 먹는 둥 마는 둥 우체통으로 달렸다. 가난이 문신처럼 새겨진 우리들이 밥을 먹는 것보다 편지를 부치러 가는 일에 더 달떴으니 실로 풋풋한 연둣빛 시절이었다.” <선데이서울> <새농민> 같은 잡지 뒷부분에는 으레 애인, 친구 구함이라는 코너가 있었다. 거기서 얻은 주소지로 띄우는 편지는 하루 열두 시간 중노동에 시달리던 그에게 달콤한 청량제이자 넓은 세상으로 열린 창이었다. 글·사진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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