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2.10.10 23:12
수정 : 2012.10.10 23:12
[매거진 esc] 신 기장의 야간비행
승객으로서 비행기를 타고 멕시코까지 여행한 적이 있다. 민간 조종사협회에서 주최하는 회의에 참석하기 위해서였다. 로스앤젤레스까지 대한항공을 타고 가서 미국 항공사로 갈아타는 여정이었는데, 오랜만에 승객의 신분으로 비행기에 오르니 다른 사람이 운항하는 것에 이런저런 호기심이 생겼다.
먼저 체크인 카운터에서 좌석을 받는데, 전용 카운터의 직원이 웃지도 않고 눈도 잘 마주치지 않았다. 새벽부터 출근해서 몹시 피곤할 터이니 같은 직원에게까지 명품 미소를 요구하기는 무리지만 나도 사람인지라 서운한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반대로 비행기에서는 한 여승무원이 나를 알아보고는 “여행 가시나 봐요!”라고 밝게 인사하였고, 친절하게도 비행 내내 필요한 것이 없는지 물어주었다.
로스앤젤레스에 도착한 후 비행기를 갈아타기 위해 다시 미국 항공사 체크인 카운터에 갔다. 생소한 절차에 궁금한 것이 많았지만 역시 눈도 마주치지 않고 바쁘게 일하는 미국인 직원에게 이것저것 질문할 엄두를 내지 못했다. 비행기에 앉아있는데 이번에는 금발머리 여승무원이 내게 와서 미소를 지어 보이더니 대뜸 말했다. “이봐 멋쟁이, 여기 부인 짐 좀 올려줘.” 옆자리를 배정받은 키 작은 중국인이 짐을 올리지 못해 쩔쩔매자 나에게 도와주라고 한 것이다. 안 그래도 도와줄까 망설이던 나는 기꺼이 부탁을 들어주었다. 비행 중에 위스키 한잔을 주문했을 때 다시 그 승무원이 위스키 미니어처 병과 얼음을 갖다 주었다. 그녀는 “맛있게 들어”라고 말하며 친구 대하듯 내 어깨를 툭툭 쳐주었고, 나는 미소를 지으며 고맙다고 말했다.
이상한 생각이 들었다. 미국인 직원과 승무원의 태도가 전혀 기분이 나쁘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문화의 차이라고 받아들이기에는 너무 가혹한 이중 잣대가 아니냐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 우리 승무원이 내 어깨를 툭툭 치거나 “죄송하지만, 좀 도와주시겠습니까?”라고 정중하게 부탁하지 않는다면 과연 그것을 기분 좋게 받아들일 수 있을까?
사람은 항상 상대방에 대한 기대치에 따라 상대방을 평가하려 한다. 상대방이 익숙한 환경에서 만난 한국인이라면 기대치는 명확해지고 평가도 예리해진다. 내가 미국 항공사 직원과 승무원에게 기분이 상하지 않은 것은, 그들을 잘 모르기에 기대도, 평가도 할 수 없었기 때문이지 싶다. 만약 기대치를 낮추고 평가하려고 들지 않는다면, 솔직하게 상대와 소통할 수 있지 않을까?
신지수 대한항공 A330 조종사·<나의 아름다운 비행> 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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