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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12.21 10:03 수정 : 2012.12.21 16:16

이기원 피처 에디터

아내와의 특별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조 말론 레드 로즈 향초

그 남자의 카드명세서
이기원<젠틀맨 코리아> 피처 에디터

시각보다 더 오랫동안 기억에 남는 건 후각이라는 말을 들은 적 있다. 이 말이 신빙성 있다고 생각한 건 길을 지나가던 여자의 샴푸 냄새에 옛 연인과의 추억을 떠올린 적 있어서다.

나이가 들수록 냄새에 민감해지고 내 체취에 예민해진다. 이제는 샤워 후 샌들우드향(백단향)이 나는 보디크림을 꼼꼼히 바르고 중요한 외출 전에는 향수를 옷깃과 손목에 뿌린다. 흡연자로서 피할 수 없는 눅진한 아저씨 냄새를 지우고도 싶었지만 내 살갗에서 비 온 뒤 젖은 솔밭길을 걷는 듯한 향이 느껴질 때마다 이상한 안도감이 들었다. 향초에 관심을 갖게 된 것은 이 안도감의 영역을 넓히고 싶었기 때문이다.

공간을 향으로 채우고 싶다면 에프킬라처럼(!) 뿌리는 룸 스프레이도 있고, 나무로 만든 스틱을 사용하는 디퓨저라는 것도 있다. 하지만 룸 스프레이는 애초에 싫었고, 디퓨저 역시 시간이 지날수록 ‘집냄새’와 유야무야 섞여버렸다. 그에 비하면 향초는 이제 막 연애를 시작한 여자친구 같다. 불을 붙일 때마다 생생한 향이 피어나고, 나를 기쁘게 한다. 하지만 담배처럼 불만 붙이는 성의 없는 태도로는 향초를 온전히 즐길 수 없다.

이기원 제공
먼저 커터로 심지를 조금 잘라 그을음이 생기는 것을 막아야 하고, 타닥타닥 타는 모습과 그 향이 아무리 좋아도 30분 이상 켜두면 안 된다. 감질나는 연애처럼 절정에 오르기 전, 불을 꺼야 한다. 이때도 입김을 후 불 것이 아니라 스너퍼라 불리는 일종의 모자를 심지에 씌워 끈다. 향초를 제대로 사용하려면 귀찮고 번거로운 일투성이다. 그러나 (조금 과장을 보태) 공기의 아래층부터 차오르는 향이 후각신경을 자극해 뇌에 전달되는 순간, 그 기분 좋은 노곤함은 고급 스파에서 받는 마사지 이상의 감동이다. 그러니 이 정도 수고는 즐겁게 감수할 수 있다.

아내와 나, 둘 다 ‘향초 덕후’인 덕에 집안 곳곳에는 서로 다른 향초가 있다. 현관에는 오렌지 향이 나는 향초, 서재에는 소나무 향이 나는 향초, 침대 머리맡에는 라벤더 향의 향초. 하지만 비밀병기처럼 아껴둔 향초는 따로 있다. 영국의 향수 브랜드 조 말론의 레드 로즈 향초(사진)다. 사실 장미 향을 썩 좋아하지 않지만, 이 향초가 특별한 이유는 ‘추억’ 때문이다. 아내와 연애 초창기에 영국 출장을 다녀오며 특별한 선물을 하고 싶어 고른 것이 바로 이 향초였다. 그리고 이 선물은 연애와 결혼 기간을 통틀어 그녀를 감동시킨 몇 안 되는 선물 중 하나다. 그래서 아내가 뾰로통해 있거나 술 먹고 늦게 귀가했던 날, 사과의 표시로 식탁 위에 이 향초를 올려놓고 잠깐 불을 붙인 뒤 끄곤 했다. 이 향초는 향이 깊고 진해 잠깐 불을 붙이는 것만으로도 충분한 향이 난다.

조금씩 아껴 쓰곤 했던 그 향초도 이제 바닥이 드러나 똑같은 제품을 구입했다. 집에 둘 큰 것과, 아내의 출장용으로 쓸 작은 것을 함께 사는 데 15만원쯤 들었다. 향초 사는 데 들인 돈치고는 크지만, 다시 한번 연애의 추억을 되살리기에 드는 돈이라 생각하면 그리 아깝지는 않았다. 선물에 대한 아내의 들큼한 반응을 기대했으나 아내는 시크하게 말했다. “다 좋은데, 하나는 다른 향으로 사보지 그랬어.” 세상에서 제일 힘든 건 아내의 마음을 헤아리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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