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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2.12.26 18:38 수정 : 2012.12.27 15: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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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커버스토리

지금은 정리할 시간입니다. 수첩 속에 꽂혀 있는 정체불명의 메모들, 서랍 속을 가득 채운 필요없는 물건들. 마음속에 남아 있는 아쉬운 이야기들, 부끄러운 추억들. 버릴 것은 버리고 남길 것은 착착 접어서 보관하는 작업이 필요합니다. 미련도 남습니다. 머뭇머뭇하게 됩니다. 그래서 준비했습니다. ‘2012년과 함께 너를 보낸다’를 주제로 문화예술인 12명이 이별편지를 보내왔습니다. esc와 함께 2012년 깔끔하게 마무리하고 산뜻한 마음으로 새해를 맞이하시기 바랍니다.

고창석 배우
노랫말이…뭐였더라?

11월 말 뮤지컬 <벽을 뚫는 남자> 공연을 했다. 공연은 4년, 뮤지컬은 12년 만이다. 정신과 의사, 경찰, 변호사 등 일인 삼역의 중요한 배역이었다. 마지막 역할인 변호사가 되어 무대에 섰는데, 머릿속이 하얗게 되어 노래대사가 생각나지 않았다.

무대에는 나 혼자. 눈치껏 애드리브로 받쳐줄 수 있는 동료도 없었다. 반주는 흐르는데 벙어리처럼 서 있었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는지 모른다. 등에 진땀이 흘렀다.

에라 모르겠다! 단편적으로 기억나는 뒷부분을 당겨서 시간을 메웠다. “너무 떨리고 준비를 못해 아무 생각이 없습니다”라는 대사였다. 마침 그때 상황과 맞아떨어졌다. 관객들은 본래 배역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가는 눈치였다. 부끄러워 쥐구멍에라도 들어가고 싶었다.

노래라는 게 본디 꾸준히 연습해야 하는 것인데, 노래극단 출신이라는 기억과 연습하는 동안 음악감독의 ‘잘한다’는 추임새를 믿은 게 화근이었다. 전성기의 기억만으로 필드에 나갔다가 자빠진 왕년의 운동선수 꼴이 된 것이다.

출연진 가운데 선배에 속하는 터라 욕심이 과했는지 모르겠다. 최근 텔레비전 예능프로그램에 얼굴을 비치면서 알아보는 사람이 많아진 것도 부담이 되었지 싶다. 잠깐이지만 색깔이 뚜렷한 단역으로 출연할 때처럼 다시 자연스러워져야 할 것 같다.

고창석 배우


손미나 여행작가
3유로는 집에 있었다네

2012년 초 프랑스 파리. 막 봄기운이 감돌기 시작할 무렵이었다. 모처럼 화창한 날씨에 마음이 들뜬 나는 거리로 나섰다. 오랜만에 한껏 멋을 부리고 찾아간 곳은 코메디프랑세즈 극장 앞의 한 노천카페였다. 겨우내 추워서 즐길 수 없던, 에스프레소 한 잔을 동반한 노천카페에서의 일광욕! 나는 커피와 거리 구경을 번갈아 즐기며, 뭔가 떠오르면 글도 한 줄 쓰고 하면서 파리 특유의 분위기를 만끽했다. 그렇게 두어시간이 지났을 무렵, 웨이터가 다가와 커피값을 계산해 달라고 했다. 돈을 꺼내려고 가방 안을 들여다보니 아뿔싸! 지갑이 보이지 않았다. 파리에선 자유로운 뚜벅이인 나. 교통패스(나비고) 하나면 문제없이 외출할 수 있는 상황에 익숙한 나머지 지갑은 생각도 못하고 집을 나선 게 화근이었다. 파리는 ‘불친절한 웨이터’들로 세계적 명성을 얻고 있는 도시 아닌가? 고민 끝에, 있는 그대로 얘기해보기로 했다. 불안한 마음으로 상황 설명을 하자 웨이터는 “멀쩡한 아가씨가 왜 단돈 3유로가 없다고 하느냐”며 따져묻더니, 이내 낄낄거렸다. 다행히도 유머감각을 갖춘 사람이었다. 그는 다음날 다시 찾아와 커피를 마시는 조건으로 돈을 대신 내줬다. ‘파리에서는 일어나기 힘든’ 일이 벌어졌으니 운이 좋았다. 하지만 생각할수록 잊고 싶은, 부끄러운 순간이다.

손미나 여행작가


이우성 시인
슈퍼맨 너의 별로 돌아가~

내가 저당 잡힌 슈퍼맨이 된 건 지난 10월 어느 날이다. 친구들과 모여, 토요일 밤에 남자끼리 술 마시는 게 얼마나 한심한지 얘기하고 있었다. 여자친구가 없는 건 마찬가지지만 친구들과 나는 차이가 있다. 우선 나는 잘생겼다. 애인을 사귀고 싶어 안달하지도 않는다. 하나 더 있다. 나는 술을 마시지 않는다. 한 친구가 누군가와 통화하더니 말했다. “아는 여자가 후배들이랑 여기로 오겠다는데?” 여자 셋이 왔다. 다 같이 술잔을 부딪치는데 나만 콜라 잔을 들었다. 친구가 말했다. “얘는 술 안 마셔. 시를 쓰지. 시집 제목이 미남 어쩌곤데.” 여자 한명이 “미남이래” 하며 웃었다. “시인은 바바리코트 입는 거 아냐? 수염도 기르고.” 그 순간 나는 술도 못 마시고 글만 쓰는 ‘샌님’이었다. 이렇게 잘생긴 내가 저렇게 별로인 여자들과 못생긴 친구들에게 바보로 보이는 건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술을 마셨다. 오로지 잘 노는 남자란 걸 보여주려고. 다음날 아침 침대에서 눈을 떴다. ‘불과 1분 전까지도 노래를 부르고 있었는데?’ 휴대전화에 수신된 메시지를 보고 경악했다. 영상 파일이었다. 영상 속에서 친구들이 소리 질렀다. “바지도 벗어!” 나는 날아가는 슈퍼맨이 그려진 팬티를 입고 있었다. 친구들이 다시 소리쳤다. “날아봐!” 나는 맨바닥에 누워 날았다. 여자들은 손으로 눈을 가리고, 손가락은 활짝 펼치고 있었다. 친구들은 지금도 주머니에서 핵무기를 꺼내듯 휴대전화를 꺼내 내게 보인다. “요걸 너희 회사 홈페이지에 올리면 어떻게 될까?” 친구들 전화기 속에 든 슈퍼맨, 2012년과 함께 하늘로 날아가버렸으면 좋겠다.

이우성 시인


한경록 뮤지션·‘크라잉넛’ 멤버
나도 말하고 싶다! 영어로

2012년 가장 기억에 남는 일은 ‘크라잉넛’이 한달 동안 미국 6개주 북미투어를 다녀왔던 일입니다. 록의 본토에서 미국 고추장맛을 제대로 맛보았다고나 할까요.^^

특히 텍사스 오스틴에서 열린 ‘사우스 바이 사우스웨스트 페스티벌’에서 많은 걸 느꼈습니다. 길거리부터 식당, 클럽, 아파트에서도 공연이 펼쳐지는 도심 속의 우드스탁 같은 페스티벌이었죠. 다양한 인종과 문화가 음악이라는 버터 속에 자연스레 녹아 즐기는 모습이 부러웠습니다.

잊고 싶은 기억도 있습니다. 아직도 영어가 짧아 하고 싶은 말도 제대로 못하고 계속 썩은 미소만 지었던 어두운 추억이 떠올랐습니다. 외국 페스티벌에 나가면 공연이나 음악적으로 자신이 있는 편이지만, 외국어로 말을 건네야 할 때 좀 아쉽더라고요. 세계 곳곳에서 온 음악가들이랑 이야기를 나누고 싶고, 친해지고 싶기도 한데 말이죠.

실은 페스티벌에 대비해서 새해가 되면 영어 공부를 시작하곤 했어요. 지난해 초에도 영어학원 수강증을 끊어 다녔죠. 하지만 얼마 안 가 스케줄과 일상이 바쁘다는 핑계로 점점 발길을 끊게 되더라고요. 부디 후세들은 사교육 영어가 아닌 제대로 된 영어교육을 받고 이런 암울한 추억을 간직하지 마시길.

이런 에피소드를 떠올리면 아무래도 역시 저 자신이 가장 미워요. 한 해 동안 왜 10년치 술을 마셨을까? 왜 창작에 게을러졌을까? 도대체 영어는 언제 할 거니? 난 왜 얼굴 믿고 음악을 열심히 안 했을까? 하는 후회가 밀려듭니다. 하지만 모든 후회와 반성은 이 짧은 생을 더 재밌고 낭만적으로다가 살기 위함이겠죠^^. 암울한 사회에서 최고의 저항은 돈으로도 살 수 없는 유머와 낭만이라고 생각합니다. 2013년 즐겁게 사시는 한 해 되세요.

한경록 뮤지션·‘크라잉넛’ 멤버


일러스트레이션 정훈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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