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1.02 18:00
수정 : 2013.01.02 1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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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선미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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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디자인 큐레이팅
가열차게 수능시험을 준비하던 고3 시절, 우리 반에는 일종의 미신(?)이 있었다. 그 당시 교실에는 수능시험 날짜를 카운트다운하는 일력이 걸려 있었는데, 자기 번호에 해당하는 날짜를 뜯어서 간직하면 수능을 잘 본다는 뭐 그런 내용이었다.
예를 들면 10월20일(수능 D-34) 일력은 우리 반 34번이 뜯어서 부적처럼 다이어리에 간직하는 것이다.(코팅해서 손상을 최소화한 완벽주의자 친구도 있었다!) 그 당시 믿음이 이어졌던 것일까? 내 번호에 맞춰 뜯었던 그 일력 한 장은 아직도 추억 상자 어딘가에서 무사히 생존하고 있다. 일력을 뜯으며 수능시험이 다가옴을 온몸으로 체감했던 기억이 선연하다. 일력은 확실히 월력보다 시간의 흐름을 강하게 인식시켜 주었다.
그런데 얼마 전, 좀처럼 볼 수 없는 일력을 지인에게 선물받았다. 200부 한정판임을 밝히는 소개글에는 ‘일력 달력 디자인만 28년을 한 장인이 직접 디자인한 일력, 한글날 휴일을 반영하지 않아 직접 빨간색으로 칠할 수 있는 기회와 재미 제공’이라는 귀여운 멘트도 덧붙여져 있었다. 제작한 곳은 ‘길종상가’. 일종의 만물상 플랫폼으로 일컬어지는 이 브랜드는 요 몇 달 사이 여기저기서 빈번하게 회자되었다. 길종상가는 입주한 상인의 지식과 경험으로 고객에게 제품 및 서비스를 제공하고, 서로가 합의하는 비용을 지불하는 상가다. 온라인으로 시작하여 서울 한남동에 매장을 열었으며, 최근에는 더 많은 사람과 만나기 위해 이동상가를 표방하며 활동반경을 넓히고 있다. 홍대 에이랜드, 강남구 신사동 코발트팩토리 등에서 팝업 스토어 형태로 운영중이며 앞으로도 다양한 장소에서 새로운 사람들과 조우할 예정이라고.
현재 길종상가에는 한다 목공소, 밝다 조명, 꿰다 직물점, 있다 만물상, 간다 인력사무소, 걷다 사진관이 입점해 있다. 각각의 상점들은 단순히 물리적 입점에 그치는 것이 아니라, 큰 범주로서 길종상가라는 ‘브랜드’의 일환이 된다. 길종상가의 관리와 한다 목공소의 운영을 맡고 있는 박길종씨는 소비자와 직접 대면해 문제를 해결하는 새로운 소통을 시도한다. 한다 목공소는 1:1 주문과 상담을 통해 세상에서 단 하나의 이야기를 담고 있는 가구를 만들어준다. 또한 ‘간다 인력사무소’를 통해서는 적합한 도움을 주는 믿음직한 일손이 되어주기도 한다. 소셜네트워크서비스(SNS)를 통해 이벤트나 제품, 팝업 스토어의 위치 등을 실시간으로 공유하며 끊임없이 직접 소통하는 것도 길종상가의 특징 중 하나다.
그런 소통의 일환으로 각 상점 사장들의 기술과 지식을 배울 수 있는 교육 프로그램 ‘길종직업학교’도 진행하고 있다. 1월 한달 동안 매주 토요일에 진행되는 ‘박가공의 우드 아닌 우드락’에서는 우드락을 사용해서 가구 구조의 이해, 도면 그리기, 재단, 조립 등을 배우게 된다. 이외에도 손바느질, 그림 그리기 등의 수업들이 열리고 닫힌다.
길종상가의 활동이 궁금하다면 책 <길종상가 2011>을 참고해보는 것도 좋겠다. 박길종씨가 만든 사물들과 사람들에 관한 이야기가 시간순으로 엮어진 이 책은 일종의 길종상가 애뉴얼 리포트라고 할 수 있다. 동시에 길종상가를 이용하고 싶은 사람들에게는 가장 믿음직한 사용설명서가 되어줄 것이다.
김선미 디자인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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