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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1.09 18:30 수정 : 2013.01.10 16:34

1945년 1월1일 천안우체국 직원들이 한자리에 모여 찍은 기념사진. 자전거를 거머쥔 이들이 우편배달부다.

[매거진 esc] 라이프

2년차 스무살 집배원의
1933년 1년치 일기
당시의 생활상 생생하게 담겨

1930년대 ‘88만원 세대’는 어떻게 살았을까?

1933년 2년차 우체국 집배원의 월급은 18원. 당시 15전인 우동값을 현재 6000원으로 환산하면 72만원가량 된다. 쓰임새는 식대가 7원50전, 저축(규약예금, 공제부금, 생명보험료)이 4원, 목욕(3회) 15전, 동생 수업료 60전, 기타 50전, 가용 7원으로 수입의 절반을 식대로 지출하고 있다. 문화생활이라고는 저녁에 동무들과 화투를 치거나 장기를 두고 명절에 연극과 활동사진을 구경하는 정도다.

이러한 생활상은 일제강점기 천안우체국에서 집배원으로 일했던 한 조선인 청년의 일기를 통해 알 수 있다. 이 일기는 <한겨레>가 최근 책 중간상 김창기씨한테서 입수했다. 세 권으로 된 일기는 1933년 1월1일부터 12월31일까지 집배원의 일과를 꼼꼼히 기록했다. 국한문 혼용의 활달한 세로 필기체에는 그날그날의 감정상태가 그대로 드러난다.

기록자는 1914년생으로 당시 한국 나이로 스무살. 천안읍에서 20리가량 떨어진 정좌리 소농집 3남1녀 중 장남. 보통학교 졸업 직후 천안우체국에 집배원으로 취직하여 2년째 근무하고 있다. 당시 천안우체국은 대흥동우체국 자리에 있었으며 청년은 그곳에서 멀지 않은 중리촌(위치 미상)에서 기숙 또는 자취생활을 하며 출퇴근했다.

일제강점기 우편배달부의 차림.
집배원의 일상 당시 천안우체국의 배달구역은 시내와 시외 6개 구역으로 나뉘어 있었다. 아침 6시 반에 출근해 전날 정해지는 담당구역의 편지와 소포 배달을 시작한다. 가까운 곳에서 먼 곳으로 이동하면서 무게를 줄여가는 방식인데, 대부분 도보로 움직이고 특별한 경우에는 자전거를 배당받기도 한다.

코스는 신작로가 일부 포함됐을 뿐 대부분 산길, 들길. 겨울이면 눈이 덮여 미끄럽고, 봄이면 질척거려 발을 옮기기 힘들 정도이며, 여름에 홍수가 나면 10여개의 내를 힘겹게 건너야 한다.

배달이 끝나면 가까운 역에서 열차를 타고 천안읍으로 복귀한다. 남쪽 방향인 시외 4, 5, 6구역은 경부선 소정리역이 반환점이며 북쪽인 시외 2구역은 두정리역을 이용한다. 나머지는 구역을 걸어서 돌아오는 것으로 추정된다. 특히 광덕리, 보산원리를 포함하는 5구역은 배달구역이 넓어 날이 저물면 현지에서 숙박을 하고 이튿날 나머지 우편물을 배달한 뒤 소정리역에서 귀환한다.

우편물은 주소지에 직접 배달하는 게 원칙. 하지만 대리배달도 잦다. 그 마을 사정을 잘 아는 동창생들이 배달을 도와주기도 하고, 학교, 양조장 등 다중이 모이는 곳에서 수신인을 아는 사람에게 우편물을 맡긴다.

한달에 두차례 <경향잡지>가 나오는 날은 어깨가 빠진다. 청년은 결근한 동료 대신 투입되어 광덕산에 사는 독자한테 잡지를 배달하느라 힘들었던 일을 인상깊게 기록하고 있다.

“조선 사람에 인사성이 없다는 것은 이미 잘 아는 바이지만 십리, 이십리를 자기 하나 찾아서 자기가 숭배하는 그 잡지를 갖다주는데 ‘고맙습니다’ ‘수고하였습니다’ 한마디 인사도 없다.” 가장 고민스러운 것은 점심. 시내일 때는 집에 들러 해결하지만 시외 배달 때는 싸가기도 애매하고, 사먹을 데도 마땅찮아 대부분 굶는다. 지인이 사는 마을이나 잔칫집이 걸리면 얻어먹기도 하고 여름이면 원두막에서 참외를 사먹고, 가을이면 무를 뽑아 먹거나 길가의 밤, 대추를 따 먹는다.

배달 외에 ‘수도’, 즉 편지통 우편물을 거둬들이고 열차에 실려오는 우편물을 실어오는 일을 하며, 천안~장호원을 오가는 우편행낭을 운송하는 일도 이들의 몫이다. 일기를 보면 그해 4월1일 특급열차인 ‘히카리’가 경부선에 처음으로 운행되었으며, 지금은 없어진 철길인 경기선(천안~장호원)이 운영됐음을 알 수 있다.

집배원 일기 소장자 김창기씨.

집배원 일기.
조선인 배달부의 애환 “세상에 제일 고마운 자는 집배인일 것이다. 비 나리는 여름날이나 눈보라 치는 겨울날이나 급한 일, 반가운 일, 모든 소식을 일전 오리나 삼전 받고 곳곳이 전하여 주니. 그 반가울 데가 한이 있으리요.” 청년의 집배원에 대한 생각은 이중적이다.

“요새는 어쩐 일인지 통부 댕기기가 싫다. 모찌장사 그것이 과연 어떠할까. 통부의 부자유하고 불평 많은 생활보다는 자유생활이라고. 자본이 없기 때문에 돈 안 드는 걸로 합당하다고 생각한다.” 하는 일에 비해 수입이 적고 조선인이라는 차별을 받기 때문이다.

그는 일본인 고참과 농담을 하다가 그것이 시비가 되어 주먹으로 얻어맞은 적이 있다. 그는 “젊은 놈에 주먹을 들어 마주 한번 칠 것인가, 참고 말아야 하나” 고민하다가 “그네에게 압제를 받으며 생활하는 우리 조선인이다. 마주쳐서 해가 될 뿐 아무 소용 없을 것”이라며 “단지 피가 끓어오르는 젊은 주먹을 강제로 억제하니 그것이 원통하다”고 적고 있다. 일본인 국장한테 불려가 사택에서 하루 종일 장작을 팼던 일도 있다.

일본인 간부는 배달을 일찍 마치고 귀국하면 혹시 배달하지 않는 우편물이 있나 검사를 한다. 함께 일하는 동료는 “젊은 청춘으로 구루마를 끌고 밥 먹고, 구루마 끌고 밥 먹고 이 일을 계속한단 말이냐. 과연 우리 앞길은 어떻게 진전되며 무슨 희망이 성공될 날이 있을까. 벌써 통부에 생활을 7년간이나” 하는 탄식을 하고, 청년은 자신의 암울한 미래를 상상하며 운다.

그는 배달하는 사이사이에 “무산계급의 괴로움, 하등계급의 슬픔을 하소연하고 유산계급의 교만한 태도를 꾸짖고자” 소설을 구상한다. 하지만 “마음만은 태산을 오르고 황하를 건널 듯하나 실력이 모자라 누구를 주인공 삼을지 어떤 순서로써 한단 말이냐”며 고민한다. 시외 배달을 하면서 얻은 시상도 기록했다.

“백설이 흩날리는 치운 겨울날/ 모진 북풍 몰려오는 산모퉁이를/ 힘없는 다리를 옮겨놓으면서/ 우편배달부는 달음질쳐요/ 이 서방 편지 왔소 들여가시오/ 소래 높여 부르나 대답은 없고/ 의심 많은 삽살개 물려 덤비니/ 우편배달부는 떨고 섰어요.” 이와 함께 각처의 채굴 상황을 보면서 “돈 좀 있으면 금광이나 좀 하여 보고 싶다”고 생각하고 배달하면서 산을 올라가면 혹 광석이나 없나 하고 돌을 깨뜨려 보기도 한다. 나중에는 지인들이 청년에게 순사시험을 보라고 권유하고 그는 과연 그것이 합당한지를 고민한다.

무산계급의 서러움
하등계급의 슬픔까지
지금의 88만원 세대와
겹치는 고민도

집배원의 눈에 비친 식민지 “소송서류가 많다. 조선 농민에 형편을 이다지도 표시하는 지불명령서. 일년 내 땀 흘려 농사라고 좀 지여 노니까 벼가 익기 전에 벌써 집행하겠다고. 채권자가 옆에 있다면 당장 주먹으로 때리고 싶다. 금융조합 자체는 농촌을 위해서란 간판을 붙이나 농촌에 대하여는 조금도 고맙지 못한 큰 악마다.”(9월22일)

실제 청년의 아버지는 금융조합 빚 이자를 갚지 못해 차압을 붙이려 하자 아들한테 5원을 융통해달라고 말한다. 하지만 돈이 없는 청년은 어쩔 수 없는 심정을 일기에 썼다.

“나는 사람의 가치가 없다. 불과 5원이란 금액에 창피한 거동을 당하는 부친을 구치 못하니. 그런 편지를 보내는 부친의 마음이야 오죽하겠는가. 나이 20에 불과한 소년의 몸이 되어 만고풍상을 다 겪은 노인보다 질 곳이 없을 것이다.”

그의 집은 메밀국수로 연명하고 국수에 멀미 난 조모와 여동생은 자주 굶는다고 한다. 식구들은 “백미 밥 맛보기는 큰 요리나 먹는 듯 생각한다.” 일제는 조선의 옷과 풍습을 유지하는 서당을 없애는데, 천안의 청년한테도 목격된다.

“용정리 통화재 서당이 폐지되었다고 한다. 경찰서에서 심히 취체하여 폐지 지경에 이르게 하고 매일 찾아와서 글을 못 읽게 하기 때문에 할 수 없이 폐지하였단다. 조선 사람으로 조선에서 조선글을 읽는 것을 왜 그다지 심하게 하며 서당을 전부 폐지시키니 그 무슨 주의인지.”

2월부터는 군대가 1만5000명이 만주로 이동하는데, 천안에서도 전장으로 끌려가는 청년들이 목격된다. “정차장에서 북만으로 가는 군인을 봤다. 영송하는 군중도 봤다. 안성에서는 소학생부터 유지단체를 (경기선을 이용해) 임시열차까지 운반하여 천안까지 군인 송영차로 왔다.”(2월6일)

일제 때의 천안 중앙시장.

식민지 청년의 문화생활 식민지 천안의 청년에게 문화생활은 사치다. 퇴근 뒤에 동료들이 모여서 10전 내외의 내기장기와 화투치기를 하는 게 고작. 여름에는 천안을 관통하는 하천에서 메기를 잡아 매운탕을 끓여 먹는 재미도 있다.

젊음을 허송해서는 안 된다는 것을 절감한 청년은 월구독료 75전을 내고 신문을 구독한다. 신문에서 투르게네프를 알게 되지만 작품을 구할 길이 없다. <愛에 指環>(사랑의 반지)이 꿩 대신 닭. 내용은 알 수 없지만 애정소설로 보인다.

그는 만종좌, 태양극장, 조선소녀극좌 등의 연극을 구경하는데 봄, 가을 두차례 관람한 태양극장의 연극은 김연실과 최승희가 각각 주연. 김연실의 독창에 대해서는 “누구나 그 소리를 듣고 사랑을 던지지 않을까”, 최승희에 대해서는 “젊은 놈을 막 녹인다. 그 신기한 기능은 참으로 귀엽다고 칭찬을 아낄 수 없다”는 평을 남기고 있다. 당시 천안은 교통의 요지로 전국을 순회하는 신파극단이 단골로 들러 공연을 하던 도시다. 두 연극 모두 이틀에 걸쳐 내용을 이어 연속적으로 공연하는 게 특징.

설에는 이틀에 걸쳐 <엇더한 일막>, <금강에 파란>이란 활동사진을 본다. <금강에 파란>은 “금강산을 배경으로 하는 만치 조선영화계를 조금도 부끄러이 여기지 않을 것”이라는 평을 남겼다. 설 무렵 천안관에서 열린 윷놀이대회를 구경한다. 그는 그곳이 “경우나 이치보다도 떼와 힘을 제일로 하는 독립국이더라”면서 아무리 경관일지라도 어쩔 수 없더라고 분위기를 전한다. 또 “기생은 ‘모’ 하는 사람이 있으면 ‘지화자, 지화자’ 노래를 부르더라”고 했다.

글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사진제공 천안우체국, 우정박물관, 천안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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