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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중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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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에세이
김중혁의 메이드 인 공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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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무로 만든 바다
우리가 버린 바다
누군가 되살린 바다 폐지를 재활용하는 것도 쉬운 문제는 아니다. 우선 폐지를 수집, 운반, 보관, 가공하는 데 꽤 많은 에너지가 들어가며, 어떤 종류의 폐지냐에 따라 활용률이 달라진다. 가장 이상적인 방법은 폐지를 완벽하게 분리수거하고 가장 가까운 곳에서 가공하는 것인데, 이게 말처럼 쉬울 리 없다. 음, 가까운 곳에서의 실천이 가장 중요하다는 말인데, 나부터 종이 낭비를 줄이기 위해 절필을 선언해야 하려나. 공장으로 들어서면 초지기(抄紙機)라 불리는 거대한 기계가 보는 사람을 압도한다. 글자 그대로, 실 뽑듯 종이를 뽑아내는 기계다. 이 녀석은 덩치도 엄청나지만 소리도 대단하다. 근처에서는 도저히 대화를 주고받을 수 없다. 일하는 분들은 모두 귀마개를 쓰고 있으며, 초지기를 컨트롤하는 조종실에도 방음문이 설치돼 있었다. 조종실에 들어가면 물속에 뛰어든 것처럼 모든 소리가 먹먹해진다. 종이가 만들어지는 원리는 변한 게 없다. 종이를 처음 만들었던 시대나 지금이나 ‘압착하고’ ‘물기를 빼고’ ‘건조하는’ 원리는 똑같다. 얼마나 빨리 만들어내는가의 차이다. 물에 희석된 펄프가 천에 분사되고, 이 천이 회전하는 뜨거운 롤러 사이를 지나가고, 건조되면 종이가 만들어진다. 참으로 간단해 보이지만 간단한 문제는 아니다. 펄프를 어느 정도로 희석할 것인가, 종이 표면에 막을 만들어주는 전분을 어느 정도 쓸 것인가(공장 내부의 묘하게 구수한 냄새는 이 전분 때문에 나는 것이었다) 등등 복잡한 문제가 한두 가지가 아니다. 복잡한 건 공장 사정이고, 간단하게 말하면 조각낸 나무를 곤죽으로 만들어 납작하게 누른 다음 길게 늘인 게 종이다. 초지기라는 거대한
기계가 보는 이를 압도한다
실 뽑듯 종이를 뽑아내는 기계다 공장 천장에 달려 있는 기계는 거대한 종이 두루마리를 연신 이리저리 옮기고 있었다. 공장 바닥에도 수많은 두루마리가 뒹굴고 있었다. 하얗고 거대한 두루마리를 보고 있으면 안쓰럽기도 하고, 무섭기도 하다. 저게 다 나무란 말이고, 우리가 저 큰 두루마리에다 하염없이 계속 그리고 쓴단 말이지. 거인의 화장실용 두루마리라고 하면 딱 좋을 것 같은 크기의 종이를 전부 우리가 쓰고 있다는 말이지. 그 종이로 우리는 신문과 잡지를 만들어 서로 정보를 공유하고, 연애편지를 써서 사랑을 완성하고, 화장실에서 볼 일을 완성하고, 소설을 쓰고 읽으면서 울고 웃는다. 종이가 없었다면 우리는 지금보다 덜 현명한 사람이었을 것이고, 덜 낭만적인 사람이었을 것이고, 덜 아는 사람이었을 것이고, 덜 사랑하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우리의 가장 큰 과제는, 어떻게 하면 종이를 덜 사용하면서도 더 현명하고 더 사랑하는 사람이 될 수 있을 것인가이다. 어떻게 하면 지구를 덜 쓰면서 세계에 대해 더 많이 알 것인가이다. 이보다 중요한 당면과제가 또 있을까 싶기도 하다. 제지공장을 처음으로 선택한 것은 일종의 워밍업이었고, 고사 같은 것이었다. 공장 이야기로 종이를 많이 낭비할 것 같으니 제지공장부터 들러야 할 것 같았다. 앞으로의 다짐이랄까. 말 타고 먼 산 보듯 공장을 훑어본 다음 집으로 돌아오는 기차를 기다리고 있는데, 속이 울렁거리고 메슥거리기 시작했다. 전분 때문에 공장 전체에서 구수한 냄새가 난다고 좋아했는데, 그게 전부가 아니었다. 당연히 그게 전부일 리 없었다. 공장에게 변명한다면, 거기서 일하시는 분들에게 변명하자면, 내가 좀 예민한 사람이다. 새로 지은 건물에는 (새집 증후군 때문에) 얼씬도 하지 않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이 공장 탐방기를 시작했으니 걱정이 이만저만 큰 게 아니다. 이번에는 말 타고 먼 산 보듯 훑어봤지만 다음부터는 좀더 꼼꼼하게 공장 속 깊이 들어가 볼 생각이었는데, 거 참 잘될지 모르겠다. 김중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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