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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중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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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김중혁의 메이드 인 공장 ②브래지어 공장
글도 브래지어 박음질도 시작과 끝이 맞아떨어져야
여러조각 천을
이리저리 붙이고 박음질해
탄생한 예쁘고 봉긋한 컵
아무리 봐도 신기해
‘시작과 끝이 일치해야 한다’
박음질 마무리 지시하는
작업지시서의 문장
내 책상 위에도 붙여놔야겠구나
브래지어 공장에 간다고 하자, 주위에서 다양한 반응을 보였다. ‘공장 직원의 남녀 비율이 궁금하다’는 사람도 있었고(이건 지난 회에 알려드렸죠), ‘공장 견학을 가면 회사 제품을 선물로 주기도 하던데 브래지어 공장도 그럴지 궁금하네’라는 사람도 있었다. (선물로 주기에는 제품이 고가입니다. 미니어처 같은 게 있으면 또 모르겠지만. 브래지어 미니어처라니, 그것도 좀 이상합니다.) 그중에서 가장 난처했던 것은 “야, 세상에 재미있는 일은 네가 다 하는구나”라며 음흉한 웃음을 짓는 친구의 반응이었다. 도대체 뭘 상상하는 건지 모르겠다. 브래지어를 만들고 있는 아리따운 아가씨와 눈이라도 마주쳐서 얼굴이 새빨갛게 변하는 내 모습을 상상하는 것일까. 사무실에서 브래지어를 대할 때는 어쩐지 서먹서먹하고 민망했는데 막상 공장에 들어가 수많은 브래지어 속에 파묻히고 나니 그럴 일이 없었다. 공장의 브래지어들은 아직 브래지어가 아닌, 곧 브래지어로 탈바꿈하게 될 천조각들이었다.
브래지어를 만드는 첫번째 과정에서 마법이 시작된다. 여러 조각의 천을 이리저리 이어 붙이고 박음질하고 나니 예쁘고 봉긋한 ‘컵’이 탄생했다. 재봉틀을 돌리던 분은 별일 아닌 것처럼 태연했지만, 내가 재봉틀을 몰라도 너무 몰라서 그러는 것이겠지만, 나는 아무리 봐도 그 작업의 과정이 신기했다. 그건 마치 흩어진 꽃잎을 모아서 봉오리를 탄생시키는 일 같았다. 빗방울들을 모아 구름을 만드는 일 같았고, 해체된 것들을 모아 원래의 완성체로 변모시키는 작업 같았다.
컵을 만드는 직원뿐 아니라 공장의 직원들 손놀림은 하나같이 예사롭지 않았다. 능숙하다 못해 눈을 감고도 모든 일을 처리할 수 있을 것처럼 부드러웠다. 컵을 덧씌우고, 어깨끈과 잇고, 와이어를 넣고, 컵이 눌리지 않게 포장하고 마무리하는 여러 가지 작업들이 조용하고 끊임없이 흘러가고 있었다. 문득 돌아보니 젊은 여자직원은 한 명도 보이질 않았다. 공장에서 가장 어린 직원은 37살이었다. 예전에는 젊은 여자들이 주로 봉제 작업을 했는데, 그 여자들이 지금도 계속 작업을 하고 있다. ㄱ사장님의 설명에 의하면 “일본에는 예순 넘은 사람들이 돋보기 쓰고 봉제 작업을 한다는데, 우리나라도 똑같이 닮아가고” 있다. 창밖에서는 수많은 풍경들이 바뀌고, 벽에 걸린 세월의 시계는 빠르게 움직이지만 재봉틀 앞에서 일어서는 사람은 없고, 새롭게 들어오는 사람도 없으며, 재봉틀 앞에 앉은 사람들이 조금씩 늙어가는, 어쩐지 쓸쓸한 공장의 풍경이다.
직원들이 고령화되고 전문화되다 보니 공장 운영에서 가장 힘든 점이 인력관리다. 라인에서 한 명이 빠져나가면, 정확히 그 일을 할 수 있는 대체인력을 구하기가 쉽지 않다.
ㄱ사장님이 수십 년 동안 모아놓은 작업지시서에는 어려운 용어뿐 아니라 작업의 ‘관계’에 대해서 적어놓은 것도 있었다. 공장으로 들어가기 전, 그 문장을 한참 들여다봤다.
‘1. 인간관계 개선, LINE(라인)의 단합, 사원간의 존경, 우리 모두 좋은 LINE이 되도록 한다’
문장을 보면 볼수록 풍경이 그려졌다. 하나의 라인과 그 라인에 줄지어 앉아 있는 사람들이 떠올랐다. 라인의 단합이란 어떤 것일까, 좋은 라인이란 어떤 것일까. 라인이란 단어가 새삼 묵직하게 느껴졌다. 공장에 들어가니 라인에 앉은 사람들이 조용히 일을 하고 있었다. (라인이라) 쓸쓸하지만 (라인이어서) 따뜻하기도 한 풍경이었다.
더 늦기 전에 지난회 연재분에서 본의 아니게 출제한 퀴즈의 정답을 알려줘야겠다. 브래지어 각 품목의 사이즈별 수량표에 대한 것이었는데, 참고로 밝히자면 취재한 공장에서 생산하는 브래지어는 주로 40대 이상이 구매하는 고급 브래지어였다. 수량은 품목별로 다를 수 있고, 시기별로 다를 수 있다. 다른 연령대의 브래지어 생산 수량도 이와 다를 것이다.
(친절한) 사장님의 설명에 따르면 A컵을 만들기가 가장 쉽고, E컵이나 F컵으로 갈수록 작업과정이 까다로워진다고 한다. 당연히 그럴 것 같기도 하고, 조금 이상한 것 같기도 해서 왜 그런지 물어보았는데 “E컵이나 F컵은 너무 커서 한손으로 쥐고 작업하기가 힘들어요”라는, 상상하기에 따라 조금은 (흐음) 낯뜨거울 수 있는 답이 돌아왔다. 컵이 크기 때문에 박음질하는 양도 많고 시간도 더 길어지지만, A컵이나 F컵이나 가격은 똑같다. 가격이 똑같은 것도 어떻게 생각하면 당연히 그럴 것 같기도 하고, 조금 이상한 것 같기도 하다. 아무튼 그건 브래지어 판매 회사의 방침이다.
생각해보니, 같은 디자인의 옷은 가격이 똑같다. 재료가 훨씬 적게 드는 85사이즈든 재료가 더 많이 드는 110사이즈든 마찬가지다. 회사에서 자신들의 이익을 최소화하고 뚱뚱한 사람들에게 선심을 쓰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고, 마른 사람들이 조금씩 손해를 보고 있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그것도 회사의 방침이다.
공장을 돌아다니다 살에 직접 닿는 부분의 원단을 만져보았다. 말할 수 없이 부드러웠다. 매끈하고 폭신했다. 원단을 만져보기만 해도 고급 제품인 게 느껴졌다. 예전에는 한 달에 서너 품목을 생산했는데 요즘은 다섯 품목이나 여섯 품목을 생산할 만큼 다품종 소량생산으로 변했고, 고급화되고 있다. 물론 시장이나 대형마트에 가면 가격이 싼 브래지어도 있다. 가장 큰 차이는 원단과 와이어다. 고급 브래지어에는 형상기억합금 와이어를 쓰고, 싼 브래지어에는 철로 만든 와이어를 쓴다. 사용해보지 않았지만 형상기억합금 와이어와 철의 차이는 아마도 엄청날 것이다. 가슴을 조이는 코르셋의 압박에서 벗어나 브래지어를 쓰게 됐지만 이제는 가격의 압박이 문제다.
공장의 작업방식은 순차적이다. 75A를 450개 만들고 나면, 80A 660개를 만든다. 80A가 끝나야 85A를 시작할 수 있다. 사이즈가 섞이지 않게 하려는 것이다. 그렇게 하나씩 하나씩 수량을 채워가는 작업이다. 아득하고 막막하겠지만 하나씩 하나씩 수량을 채워나가다 보면 끝이 보이겠지. 같은 라인의 사람들과 함께 작업을 하고 있으면 수량은 금세 잊지 않을까.
공장의 작업지시서에서 또 하나 잊혀지지 않는 문장이 있다. 아마도 작업지시서에서 가장 자주 나오는 문장일 것이다.
‘시작과 끝이 일치하도록 한다’
박음질의 마무리를 일컫는 말이지만 작업의 기본을 지시하는 말이기도 하다. 만듦새는 일정해야 하고, 지속적으로 꼼꼼해야 하고, 끝을 예감하며 긴장을 풀어서도 안 된다. 시작과 끝이 일치하도록 하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인가. 책상 앞에다 큰 글씨로 프린트해서 붙여두고 싶은 문장이다. 저 문장을 읽을 때마다 브래지어 공장의 경쾌하지만 조용한 리듬의 재봉틀 소리가 기억날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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