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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2.13 20:58 수정 : 2013.02.16 14:56

대형서점의 자기계발서 코너. 사진은 기사 내용과 관계없음.

[매거진 esc] 라이프

영국 총리를 지낸 인물의 자서전 집필을 둘러싸고 벌어지는 정치 스릴러 <고스트 라이터>(유령 작가, 2010년). 로만 폴란스키 감독의 작품에서 이야기를 끌어가는 대필작가는 성도 이름도 없다. 처음부터 끝까지 당신, 헤이 또는 여보게로 불릴 뿐이다. 보름간의 곡절을 거쳐 결과물은 의뢰자의 이름으로 출간되지만 대필작가가 유령적 존재에서 깨어나면서 진짜 유령이 된다.

우리나라 역시 대필작가는 유령과 흡사하다. 실체는 보이지 않고 그림자처럼 어른거린다. 현대 정주영 왕회장 자서전은 아무개씨가, 대우 김우중 회장 자서전은 아무개씨가 썼다는 둥 항간에 소문이 돈다. 기업인, 정치인, 연예인 자서전은 80~90%가 대필이라는 얘기까지 돈다.

“상식적으로 생각하면 돼요. 그들한테 시간이 돈인데, 몇 달씩이나 책 쓴다고 돈 되는 일을 전폐하겠어요?” 취재 과정에서 접촉한 출판계 인사들의 이구동성이다. 유명인사들의 책 대부분이 대필이라는 것이다. 물론 예외는 있다. 개그우먼 김미화의 <웃기고 자빠졌네>를 펴낸 메디치미디어 쪽은 애초 대필을 붙였다가 직접 쓰는 쪽으로 선회했다고 털어놨다. 하지만 대개는 당사자들은 물론 그에게 접근하는 단서가 되는 인물조차 말을 하지 않아 대필 여부를 확인할 수 없다.

저자 이름값에 기댄 실용서
대필작가 활용 많아
편집자가 직접
초고의 빈 구멍 메꾸기도

“이 분야에서 익명과 비밀 엄수는 불문율입니다. 따로 계약서에 쓰지 않지만 서로 알아서들 하죠. 의뢰자는 익명을 당연시하고 대필자는 대필을 창피스러운 일로 생각하기 때문입니다.”

출판사 대표 ㄱ씨는 주변에 “대필 경험을 가진 사람이 다수 있다”며 “기자에게 소개해줄 수 있는지 알아보겠다”고 했다. 하지만 며칠 뒤 당사자 가운데 누구도 그 사실이 드러나기를 원치 않으며 자신의 이름이 행여 대필작가로 불릴까 봐 기겁하더라고 했다. 그 말끝에 자신이 서른살 무렵 지인의 부탁으로 정치인의 저서를 대필한 적이 있었다고 털어놓으며 20여년이 지난 지금도 그것은 트라우마로 남아 글 쓰는 행위가 죄스럽게 느껴진다고 말했다. 이름을 대면 금세 ‘아~ 그 양반’ 하고 알 만한 그 정치인은 책이 나온 뒤, ㄱ씨가 임의로 만들어 삽입한 에피소드를 마치 자신이 겪은 일인 양 말하더라며 넌더리를 냈다.

인터넷에서 ‘대필’을 검색하면 관련 업체, 출판사 수십개가 뜬다. 리포트, 에세이, 석·박사 논문, 간증, 자서전 등등 안 되는 게 없다. 소속 작가의 사진과 약력을 올려놓은 데도 있다. 그중 서울 마포구 서교동 ㄷ출판사를 찾았다. 이 회사 대표 ㄹ씨는 대필 비용은 700만~2000만원으로 들쭉날쭉하다고 했다. 초고가 있을 때와 전혀 없을 때, 대필작가를 누구로 하느냐 등에 따라 다르다는 것. 대필작가들은 사보, 잡지, 신문기자, 시인, 소설가, 방송작가 등이 많다고 했다. 하지만 그들의 신원과 대필한 결과물에 대해서는 말해줄 수 없다고 말을 끊었다. 부모님 칠순, 팔순을 기념한 자녀들의 의뢰가 가끔 들어오고, 선거철이면 정치 지망생들의 의뢰가 급증한다고 했다.

<경남도민일보> 김훤주 기자는 2009년 1월 한 대필업체한테서 받은 편지를 공개했다.

대필업체는 편지에서 2010년 5월에는 광역단체장 16명, 기초단체장 232명, 지역의원 4167명 전국 교육감 16명과 교육위원 선출을 위한 선거가 있다면서 경쟁률을 고려할 때 출마를 준비하는 사람은 2만명 이상이라고 자서전 수요를 예측했다. 이어서 248개 시·군·구별로 덕망 있는 전·현직 언론인 혹은 유지를 대상으로 대필사업에 참여할 지역 책임자와 일선 컨설팅 요원을 모신다면서 자서전 출판 희망자를 물색해주거나 직접 자서전을 집필하면 실적에 따라 업적수당을 지급한다고 적었다.

대필작가가 주인공인 영화 <고스트라이터>.
“정치인 책은 문제 삼을 게 못 됩니다. 그 동네는 출판의 룰이 닿지 않는 곳이거든요.” 출판기획자 ㅁ씨는 그것을 거론하는 기자를 딱하다는 투로 말했다.

“재테크, 자기계발서 등 기획성 책이 문제입니다. 트렌드를 타고 반짝 유통시켜야 하는데 상품성 있는 저자는 쓸 시간이 없어 대필을 쓰죠. 출판사마다 작가군을 확보하고 필요할 때마다 불러 씁니다. 단기간에 뽑아내기에 방송작가가 제일 만만하죠.” 간판 저자가 전체 내용의 얼개나 초고를 주는 경우도 있고 맨땅에 헤딩하는 경우도 있다. ㅁ씨 역시 대필작가는 알려줄 수 없다며 편집자가 대필작가 역할을 하는 사례가 많다고 화제를 돌렸다. 저자의 초고를 받고 나서 그것이 시원치 않으면 편집자가 관련 책 30~40권을 사서 여관에 틀어박힌 채 읽고 완전히 새롭게 집필한다는 것이다.

“전에는 토씨 하나 못 고치게 했는데, 요즘은 잘 고쳐달라고 하는 저자들이 많아요. 완전 대필이라고 할 수는 없지만 편집자의 역할이 바뀌는 추세인 것 같아요.” 그는 파워블로거 ㅂ씨의 예를 들었다. “블로그에 올린 글이 좋아 책으로 만들려고 보면 논리의 비약이 심해요. 편집자가 빈칸을 메운 뒤 저자 확인을 받죠. 책을 만들고 나면 아는 편집자들끼리 얘기합니다. 너, 개고생했겠다고요. 편집자 가운데 그처럼 적극 개입하기를 좋아하는 사람들도 일부 있어요.”

그럼, 유령과의 접촉은 물 건너가는가.

대필작가를 주인공으로 하는 임영태씨의 소설 <아홉번째 집 두번째 대문>(2010년)이 자전적이라는데… 혹시?

“맞습니다. 요즘도 합니다.” 모두들 창피하다며 쉬쉬하는데, 그는 당혹스러울 정도로 당당했다. “대필자나 의뢰인이나 밝히길 꺼리는데, 나는 그럴 필요 없다고 생각합니다. 대부분 작가들이 글로써 생활이 안 되어 교사, 회사원 등 별도의 직업을 갖고 있는데, 나는 직업으로 대필을 하는 것입니다. 1992년 등단해 글쓰기를 전업으로 삼은 뒤 사보, 문화센터 강의 등 별의별 일을 다 했어요. 대중적으로 팔리는 작가도 아니고, 마흔 중반이 되니 돈 되는 일이 필요하더군요. 대필은 2005년부터 시작했는데, 생활이 될 때도 있고 그렇지 않을 때도 있어요. 투잡이라고 생각하면 됩니다.”

그는 대필을 글 쓰는 이의 전문 영역이라고 말했다. “정치가, 사업가 등이 자신의 집 짓기를 건축가한테 의뢰하죠. 스스로 설계와 건축을 못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건축가를 전문 영역이라고 인정합니다. 건축가는 스스로 남한테 지어준 집을 자기 작품이라고 말하죠. 대필도 마찬가지입니다.”

정치인·연예인 저서
대필작가 관행
누구나 아는 비밀이어도
좀처럼 바뀌지 않아

소설 주인공의 말을 빌리면 그의 대필작가론은 이렇다. “(대필은) 한 캐릭터의 존재론적 운명을 복원하는 일이다. (그의) 숨결이 나의 숨결이 되고 그의 발걸음 소리가 나의 발걸음 소리가 된다. 그리하여 나는 그가 무엇을 이해받고 싶었는지를 내 운명과의 일체감 속에서 느낀다. 말할 수 있는 것만을 쓴다. 말할 수 없는 것은 쓰지 않는다. 단순한 일이다.” 그는 세상에 파란만장하지 않은 삶이 어디 있느냐며 그들의 입을 대신하여 기술한 결과물은 자기 작품이기도 하다고 말했다.

최근 두 자서전이 출간돼 주목된다. <책, 박맹호 자서전>(민음사)과 <냉철한 머리, 뜨거운 가슴을 앓다­학현 변형윤 교수 대화록>(지식산업사)이 그것. 정치인이나 기업인의 유사 자서전과는 격이 다르다.

전자는 한 신문사 문화부 기자가 대형 출판사인 민음사의 창업자 박맹호 회장의 구술을 받고 자료를 보강 조사해 자술 형식으로 정리했다. 후자는 40년 제자인 윤진호 교수(인하대)가 묻고 스승인 변형윤 교수가 답하는 방식으로 정리한 변 교수의 전기다. 두 책 모두 그 분야 대가의 일생을 다루고 있으며 정리한 이 역시 식견과 능력이 두루 합당해 정본 전기로 손색이 없다. 두 주인공이 건강 때문에 스스로 글을 쓰기 어려운 형편이라 주변의 도움이 필요했던 점에서도 비슷하다. 하지만 전자가 필자를 밝히지 않은 반면 후자의 필자는 대담자의 형태로 드러나 있는 점에서 대비된다.

“<마시멜로 이야기> 대리 번역, <그림 읽어주는 여자>, <화가의 집을 찾아서> 대필 사건 이후 출판계가 바뀌었어요. <안철수의 생각>처럼 문답 형식을 취하고 대필자를 쓸 때는 적어도 판권란에다 기획구성, 구술정리 등으로 소화하는 추세입니다.” 편집기획자 ㅇ씨의 말이다.

하지만 한달여 동안의 취재 결과 내린 결론은 다르다. 대필은 계속된다. 이름을 남기고 싶은 의뢰인의 욕망과 글 쓸 줄을 모르는, 혹은 글을 쓸 형편이 못 되는 현실의 격차는 어쩔 수 없기 때문이다.

글 임종업 기자 blitz@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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