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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중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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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김중혁의 메이드 인 공장 ③ 지구본 공장 (상)
반토막난 지구·너저분한 지구
평면 지구·완성된 지구
갖가지 지구들로 가득한 공장
마치 우주의 모습 같다
지도의 양쪽에 코팅한 다음
반구 모양 기계에 얹으면
평면 지구가 입체로 부풀어
지난 브래지어 공장 방문기의 인기가 무척 높다는 이야기를 듣고 한겨레 홈페이지를 찾아갔다가 깜짝 놀랐다. 나의 글이 <‘브라자’ 공장에 간 남자, “E, F컵 너무 커서…”>라는 제목으로 올라가 있었다. 역시 조회수 높은 건 다 이유가 있다. 짧은 순간 낯이 뜨거워지기는 했지만 한편으로는 기사를 잘 요약한 제목 같기도 했다. 정말, 저 뒷얘기가 너무 궁금해서 클릭을 하지 않을 수 없지 않은가. E컵, F컵이 너무 커서 남자는 어떻게 했을까. 어떻게 하면 좋을까. 저 남자가 나인 걸 알면서도 어쩐지 궁금하다.
이번주 기사가 큰일이다. 지구본 공장에 다녀왔다. 무척 재미있는 공장이었지만 섹시한 제목을 붙일 만한 ‘건덕지’가 없다. 기사를 쓰기도 전에 제목부터 생각해봤다. ‘지구본, 북반구 남반구를 쪼개봤더니…’(속이 텅 비어 있더라), ‘지구본, 불량품 신고 속출, 알고봤더니…’(기울어져 있다는 이유로), ‘충격, 태평양에서 이물질 발견, 자세히 들여다보니…’(지구본 회사 이름을 태평양에다 인쇄한 것) 같은 제목으로는 아무래도 약하겠지. 편집팀에서 나를 꾸짖는 목소리가 들리는 것 같다. ‘제목은 우리에게 맡기고, 당신은 글에나 신경 쓰시오.’ 네, 알겠습니다.
불량품 지구본에 대한 고전 유머가 있다. 한 초등학교를 방문한 장학사가 아이에게 물었다. “학생, 지구본이 왜 기울어져 있는지 알고 있나?” 아이가 대답했다. “제가 안 그랬는데요.” 옆에 있던 담임선생에게 묻자, 난처한 표정으로 이렇게 대답했다. “그거 사올 때부터 그랬습니다.” 장학사는 마지막으로 교장에게 말을 걸었다. “교장 선생님이 한말씀 해주시죠.” 교장이 시큰둥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국산이 다 그렇죠.” 이 짧은 유머 속에는 (거창하게 보자면) 공교육과 학교 시스템에 대한 비꼼이 들어 있고, 국산 공산품에 대한 불신이 스며 있다. 공교육과 학교의 시스템은 얼마나 나아졌는지 모르겠지만 한국산 공산품에 대해서는 이제 농담을 바꾸어야 할 것 같다. 요새는 ‘메이드 인 코리아’를 보면 어쩐지 반갑고 믿음이 가지 않나? 나만 그런가?
불량 지구본 농담을 해준 사람은 ㅅ지구본 회사의 마케팅 총괄 팀장 ㄱ씨였다. 전부터 알고 있던 우스개였지만, 지구본을 만드는 사람에게 저 이야기를 들으니 새로웠다. 자학과 자부심을 버무린 유머 같달까. ㄱ팀장의 말에 의하면, 저 우스개가 농담의 세계인 것만도 아닌 게 가끔 그런 전화가 걸려오기도 한단다. 지구본이 비뚤어진 게 아무래도 불량품 같다고, 제대로 만든 지구본과 바꿔달라고.
ㅅ지구본 회사 앞에서 ‘국산이 다 그렇다’는 말을 절대 할 수 없는 게, 이 회사는 국내에서 최초로 지구본을 제작한 곳이고, 세계 여러 나라에 지구본을 수출하고 있으며, 2011년에는 스마트폰으로 지구본을 찍으면 각종 정보가 나타나는 ‘스마트 지구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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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중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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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 개발해 세계의 이목을 집중시켰던 곳이기도 하다. 지리학과 출신인 사장님이 1977년에 직접 세운 이 회사는 초기엔 고생이 많았다. 지구본 제작의 특성상 지리 정보를 얻어내기 힘들었고, 제작의 노하우를 알려주는 곳도 없었기 때문에 모든 걸 자체적으로 개발해왔다. 처음에는 둥근 플라스틱 공에다 여러 장으로 분리된 지도를 일일이 붙이는 방법으로 지구본을 제작했지만, 지금은 플라스틱 성형에서부터 대부분의 과정을 기계화했다.
공장에 들어섰을 때 가장 재미있는 풍경은 수많은 지구들이 널브러져 있는 것이었다. 어딜 둘러봐도 전부 지구다. 반토막 난 지구, 동그랗게 변모하기 이전의 종이 위에 인쇄된 평면 지구, 손질이 덜 끝나서 너저분한 지구, 깔끔하게 완성된 지구, 상자 속에서 출고되길 기다리는 지구. 이건 마치 우주의 모습 같기도 하다. 수많은 행성들이 사방에 널브러져 있고, 어떤 행성은 반토막 난 채로 차곡차곡 엎어져 있다. 우주를 만든 하나님이 있다면 그 작업실의 풍경이 이렇지 않았을까. 하나님도 ‘우주 공장’이란 걸 만든 다음 수많은 시행착오를 거쳐가며 이토록 거대한 우주를 만든 것은 아닐까.
지구본 만드는 과정을 지켜보고 있으면 재미있기도 하고 신기하기도 하다. 다른 게 아니라 지구니까, 우리가 살고 있는 곳을 압축해서 만드는 거니까, 우리보다 커다란 지구를 우리보다 작게 만드는 곳이니까, 기분이 묘하다. 우선 (지구본을 만들 때 쓰는 특별한 도법을 이용해) 평면에다 지도를 인쇄한다. 작은 원 속에 반구의 모든 면적이 압축돼 있다. 오밀조밀, 바글바글하다. 지도 양쪽면에 코팅을 하고 난 다음에는 (코팅이란 어쩌면 지구의 오존층 같은 것일까?) 반구 모양의 기계에다 얹는다. 열이 가해지고, 코팅된 평면 지구는 조금씩 부풀어서 반구형으로 바뀐다. (ㄱ팀장의 표현에 의하면 ‘풀빵기계와 비슷한 원리일 것 같다’) 평면에서 작았던 글씨는 조금 커지고, 평면이었던 바다는 둥그런 모양이 된다. (맞아, 지구는 둥글고, 바다는 평면이 아니었어!) 반구형의 지도를 둥근 플라스틱 구에다 씌우고, 북반구와 남반구를 결합하면 된다.
“쉬워 보이지만 어려운 기술이 많이 들어가 있습니다. 코팅 기술만 해도 외국에서는 절대 흉내 못 냅니다. 외국에서는 코팅하는 대신 두꺼운 곳에 인쇄를 한 다음 약품 처리를 하는 경우가 많은데, 그런 경우는 지도가 지워지기 쉽죠. 아예 종이로 지구본을 만드는 곳도 있고요. 플라스틱 성형하는 기계를 제작하는 것도 무척 힘든 일이었습니다.”
기술에 관련된 것들을 설명해주시는 상무이사님의 얼굴을 보면서 나는 자꾸만 ‘코팅이라면 나도 잘 아는데, 피비 케이츠와 소피 마르소와 브룩 실즈를 통해 많은 기술을 배웠는데…’라는 생각을 하다가 문득 그때 이런 기술을 알았더라면 평면인 피비 케이츠의 얼굴을 코팅한 다음 입체 모형으로 만들 수도 있었겠다는, 지구본 공장과는 어울리지 않는 공상도 해보았다. 어린 시절의 코팅 얘기를 잠깐 꺼냈는데, 상무님은 조용히 한말씀 하셨다. “그런 코팅과는 다릅니다.”(죄송합니다, 상무님)
그나저나 지구본 공장에는 일반인들이 상상하기 힘든 고충이 따로 있었으니, 그것은…, 이런, 저도 자꾸만 제목으로 사람을 낚시하는 어부가 되려나 봅니다. 아무튼 고충에 대한 이야기는 다음 회에 계속.
취재에 도움을 주신 서전지구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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