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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3.21 11:00 수정 : 2013.03.21 11:00

이기원

그 남자의 카드명세서
이기원 <젠틀맨 코리아> 피처 에디터
■ 힙플라스크

어린 시절 동네에는 항상 술에 취한 채 술병을 가지고 다니는 아저씨가 있었다. 낮이건 밤이건, 그냥 혼자 취해 있었다. 소위 ‘꽐라’ 상태. 행패를 부리지 않았고, 걸인처럼 추레하지도 않았다. 소주나 맥주 대신 항상 위스키 병을 들고 다녔다. 어떤 날에는 캡틴큐처럼 작은 병, 어떤 날에는 패스포트 같은 큰 병이었다. 가끔은 반짝거리는 금속 재질의 작은 술통도 들고 다녔다. 살짝 휘어진 모양이 예쁘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거의 30년이 지난 얼마 전 웹서핑을 하던 중에 우연히 그때 그 예쁜 술통을 발견했다. 그제야 알았다. 그걸 술통 같은 이름이 아니라 힙 플라스크(Hip Flask·사진)라고 부른다는 걸.

힙 플라스크를 처음 사용한 사람은 20세기 초반을 풍미했던 미국의 마피아 알 카포네로 알려져 있다. 1920년대 미국에 금주령이 내려졌고, 술의 판매가 엄격히 금지됐다. 하지만 술이라는 게 그렇게 쉽게 끊어지지도 않을뿐더러 하지 말라면 더 하고 싶은 게 사람의 속성이다. 알 카포네는 이 시기에 술을 몰래 유통했고 막대한 부를 쌓았다. 그가 만든 중간이 휘어진 형태의 금속통은 바지 뒷주머니에 꽂고 다녀도 티가 나지 않아 엄청난 수요를 불러일으켰다. 이게 바로 힙 플라스크의 유래가 됐다는 말이다.

그 말의 진실 여부야 어쨌건 힙 플라스크라는 물건에 꽂혔다. 이유가 없었다. 그냥 갖고 싶었다. 그 안에 위스키를 넣어 두고 홀짝홀짝 마시며 장승업 코스프레를 할 생각은 아니었다. 한국은 금주령을 내린 국가도 아니고, 현관만 나가면 반경 1킬로미터 안에 술집이 100곳은 있는 나라니까. 하지만 소비 행위가 꼭 실사구시의 목적만을 위해 존재하는 건 아니다. 이유를 대기 힘든 소비도 있는 법이다. 나는 그걸 꼭 갖고 싶었다.

이기원 제공.
인터넷상에는 100만원대부터 2만원대까지 다양한 제품이 있었다. 하지만 모니터로는 뭐가 좋고 뭐가 나쁜지 알 수 없었다. 무엇보다 내가 원한 건 손바닥 안에 들어오는 작은 크기였는데 그런 제품을 찾기가 쉽지 않았다. 언제 남대문 시장이라도 한번 방문해야 하나 생각하던 중에, 고민을 들은 친구가 말했다. “어, 나 작은 거 가지고 있는데.”

등잔 밑은 왜 항상 어두울까. 여행지의 상점에서 샀다던 친구의 힙 플라스크는 한눈에 쏙 들어왔다. 우선 크기가 적당했고, 음각한 유명 위스키 브랜드의 상징도 나쁘지 않았다. 망설일 이유가 없었다. 친구가 15유로에 샀다던 것을 감가상각을 고려해 만원을 주고 강탈했다. 플라스크의 입구가 좁아 술을 용기에 넣을 때 쓰는 깔때기까지 포함한 가격이다.

집에 와서 먹다 남은 위스키를 조금 부었다. 그리고 지금 이 글을 쓰면서 조금씩 홀짝이고 있다. 손톱만한 구멍을 통해 흘러나오는 위스키는 글라스에 먹을 때와는 다른 이상한 기쁨을 줬다. 금주령이 내려진 시대의 미국인들이 몰래 숨어 마시던 술이 아마 이런 맛이었겠지 싶다. 묘하게 은밀한 기분이 드는 건 속에 든 액체가 보이지 않는 탓일 테고, 70년대 ‘문청’이 된 것 같은 무드에 사로잡히는 건 술기운과 오랜 시간 유지돼온 특유의 모양 때문일 거다. 그럴 의도는 아니었지만, 한동안 일없었던 낮술을 한번 마셔봐야겠다는 생각이 든다. 볕이 좋은 날 공원 벤치 같은 곳에 앉아 이 통에 담긴 술을 홀짝거리면 어떤 기분이 들지 궁금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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