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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3.28 11:24 수정 : 2013.03.28 15:40

[esc] 300호 특집 커버스토리

어느 날 갑자기 덜컥! 300만원의 공돈이 생긴다면 무엇을 하고 싶으신가요? 크다면 큰 돈이지만 또 작심하고 쓴다 치면 그닥 표 나지도 않을 수 있는 돈 300만원의 달콤한 공상에 빠져봅니다. 왜냐고요? esc가 300호를 맞이했으니까요. 놀기 좋아하고 꿈꾸기 좋아하는 10명의 몽상가들에게 돈 쓸 궁리를 들어봤습니다. 여행의 가장 큰 즐거움은 일정을 짜는 과정이라는 누군가의 말처럼 나를 위해 300만원의 사치를 부려보는 즐거움, 독자 여러분들도 한번 구상해보시죠.

백옥추남이 될 테다!

좋아서 잠이 안 온다. 새벽 2시, 양재동 꽃시장에 갔다. 매화, 진달래, 개나리, 목련의 꽃가지를 몇묶음씩 샀다. 조팝나무와 수국, 청보리도 샀다. 묶음당 3500원에서 5000원 사이. 모두 5만원. 집안은 졸지에 만화방창(萬化方暢). 놀랍다!

그래도 잠이 안 온다. 다시 일어나 새벽의 노량진 수산시장에 갔다. 도루묵과 임연수어를 한 상자씩 각 1만원, 동해 피문어 5만원, 합이 7만원. 남 보란 듯이 사치를 하고 싶어진다. 거금이 있는데 대수냐. 살아있는 바닷가재가 제일 럭셔리할 듯. 샤방샤방한 놈으로 두 마리를 15만원에 호기롭게 구입! 큰 서점에 가서 ‘빈센트 반 고흐’에 관한 국내외 서적을 모조리 샀다. 무려 80만원 지출. 외국에서 수입된 고가의 화집 때문. 이미 고흐 박사가 된 것 같다!

봄이니 꽃놀이를 아니 갈 수 없다. 네 식구 고속버스로 총출동해 경남 김해시에 내려가 어여쁜 매화들을 감상. 택시로 부산 동래로 건너가선 산성막걸리와 흑염소와 파전 먹고 금정산 주막에서 꿀 같은 낮잠을 잤다. 순천 선암사로 가야 하는데 귀찮아 국제시장 가서 씨앗호떡 사 먹고 자갈치시장에선 소주에 붕장어, 광어회를 실컷 먹었다. 고래고기와 홍해삼, 주꾸미와 고등어는 포장 주문. 케이티엑스(KTX) 타고 상경. 90만원 지출!

상경하자마자 동대문 야간시장에 가서 아내와 딸의 봄옷 몇 벌과 뾰족구두 두 켤레를 샀다. 40만원 남았다. 다음날 피부과에 가서 내 얼굴에 난 점, 주근깨, 검버섯을 모두 뺐다. 원래는 70만원인데 40만원으로 할인. 여전히 못생겼지만 얼굴이 백옥같이 깨끗해졌다. 난 백옥추남이다!

사석원 화가


3천만원이 생겨도 술 사먹을 거야

재작년 8월, 나는 어느 방송사의 한 예능 프로그램에 출연을 했다. 유명 연예인들과 고민을 나누는 프로그램이었는데 그럭저럭 즐거웠던 토크 후에 한 곡 부를 기회가 주어졌다. 그때 불렀던 노래가 ‘백수와 조씨’의 첫 번째 이피(EP)앨범에 수록되어 있던 곡, ‘아이 해브 어 드림’이라는 노래였다. ‘내가 만약 십만원이 생긴다면, 십만원어치 술 사먹을 거야’로 시작해서 ‘내가 만약 일조원이 생긴다면 일조원어치 술 사먹을 거야’로 끝나는 한심한 가사 덕에 나는 한동안 ‘루저 감성’ 충만한 ‘개그 뮤지션’이라는 평가를 들었다.

 인디뮤지션이라고 하면 많은 사람들이 경제적인 궁핍을 생각하지만 나는 그렇게 궁핍하게 살아오지도 않았다. 음악으로도 조금 벌고, 가끔 돈 떨어지면 다른 일도 하고 하면서 배는 안 곯고 살았던 것 같다. 그러다 돈이 조금 남으면 부리는 사치가 바로 ‘술 사먹기’이다.

 이건 정말 최고로 편리하고 즐거운 사치다. 만원이면 만원에 맞춰서, 십만원이면 십만원에 맞춰서 즐길 수 있다. 술을 마시다 보면 내가 누구인지(얼마나 저열하고 볼품없는 인간인지) 어렴풋이 알게 된다. 편리하게도 다음날 아침에 일어나 보면 기억이 나지 않기 때문에 속상할 일도 없다. 열심히 마시다 보면 친구가 늘어나고 또 여자가 생기기도 한다. 정신을 차려보면 어느새 처음 보는 아저씨와 형 동생이 되어 있기도 하고, 운이 좋으면 마음에 둔 여자와 입도 한번 맞출 수 있는 것 아닌가. 물론 지나치게 열심히 마시면 친구를 잃기도 하고 여자를 잃기도 한다. 그러나 만취한 친구들끼리 영문 모를 주먹을 뻗어 대고, 술에 취해 걸었던 전화

한 통에 사랑하는 그녀가 떠나가는 그런 사건들이야말로 노래를 만들고 글을 쓰는 나 같은 사람들에게 최고의 장사 밑천이 아닌가!

 어느 날 갑자기 눈먼 돈 300만원이 생긴다면, 나는 당연히 술을 사 먹을 거다. 비싼 술 먹으면 한 번 술 먹고 없앨 수도 있는 돈이겠지만, 나는 아직 30년 된 술과 12년 된 술을 구별하지 못하니 여러 번에 나누어 먹어야겠다. 나를 위해 번 돈이 아님에도 기꺼이 나를 위해 지갑을 열어준, 대기업에 다니는 친구들 몇몇에게 각각 십만원짜리 보드카 한 병씩을 사고 향후 몇 년 동안 술을 얻어먹을 빌미를 만들거다. 겨우내 돈 나올 구멍 없어 힘들었을 뮤지션 동료들에게는 배 든든하게 족발에 소주를 대접할 거다. 날이 새고 해가 뜰 때까지 퍼부으며 온갖 이야기들을 만들어야지. 혹시 모르지. 그게 또 새로운 노래가 되어 나의 술값을 벌어줄지.

강백수 뮤지션·시인


여친님께 깨알조공을

우선 제 주변 만화가들에게 물어봤습니다. 재치있게 대답해 달랬는데 답변은 그저 그렇더군요. 재치있게 명품 지갑을 사겠다는 답변. 로또를 전부 사겠다는 답변 등등 시시껄렁. 그나마 그중 가장 맘에 드는 답변은 ‘민구에게 주겠다’였어요. 네~ 민구는 접니다.

 각설하고 저라면 하루에 만원씩 여친님께 계좌이체 시키고 싶어요. 수수료가 더 나온다고요? ○○증권에 매월 펀드 10만원 이상씩 투자하면 수수료가 전액 무료입니다!(광고 아닙니다) 포인트는 보내는 사람 이름에 메시지를 담는 거죠. 최대 일곱자이니까. 사랑하는 여친님, 너무 보고 싶어요, 사랑 많이 주세요 등등. 손발이 오글거린다고요? 네 알아요. 하지만 전 이미 트위터상에서 팔로어들에게 2012년 팔불출상을 수상한 사람입니다. 원래 그런 놈이에요. 매일매일 보내면 300일이 지날 테고 그날은 여친님한테 시원하게 한턱 쏘고 선물도 사달라고 조를 겁니다. 아니면 그 돈으로 여친님하고 싶은 걸 하게 한다거나. 계획적이면서 로맨틱하지 않나요? 아님 말고.

마인드C 만화가


냉장고는 아느냐 오로라의 신비를

노르웨이 어딘가 있다는, 밤새 하얗게 쏟아지는 별이 고스란히 보이는 유리돔 호텔에서 자고 오로라를 보러 갈까 했다. 오로라가 지금이 시즌인지는 모르겠지만, 안 되면 뭐 블리자드가 불어서 유리돔 벽에 하얗게 얼음이 들러붙는 순간을 실시간으로 감상은 할 수 있지 않겠느냐는 생각이었다. 그러다가 좁쌀만한 깨우침이라도 있으면 얼마나 다행일까.

옆에서 듣고 있던 아내가 픽 웃는다. 야, 그 돈으로는 왕복 비행기 삯밖에 안 되겠다. 게다가 깨우침이라니. 그런 건 티베트 곰파(절)에 가서 삼천배를 매일 한다고 해도 마누라 몰래 스마트폰으로 누드사진이나 검색하는 네 태도로는 턱도 없지? 더 말 나오기 전에 돈에 맞춰 급히 방향을 중국으로 틀었다. 동정(둥팅)호에 배를 띄우고 화로에 고기를 구워 맑은 술을 한잔 하면 어떻겠냐고, 술잔에 달이 뜨면 또 어이하겠느냐고 하자 황사는 어쩌냐고 한다. 이맘때 중국은 난방으로 석탄을 때니 하늘이 자욱하고, 황사는 밀려오는 이중고란다.

달은 동정호에만 뜨는 것도 아닐 것이고, 가까운 일본이다. 이상이 헤맸다는 우에노공원에 지금 막 벚꽃이 만개하였다니 ‘벤토’에 ‘나마비루’ 한잔은 어렵지 않겠다. 이상이 먹고 싶어 했던, 잘 익어서 향이 푹푹 나는 ‘메-론’도 미쓰코시백화점 지하 식품부에는 있으리라. 그러나 내가 정작 일본에서 하고 싶은 건 귀족놀이인데, 동정호는 못 되어도 좁다란 노천온천의 욕장에서 술잔을 띄워보고 싶은 것이다. 낮에 몸을 담그면 멀리 산에 잔설이 보인다고 하였다. 밤에는 술잔을 띄우면 달이 역시 셋이고, 마셔 없애도 다시 달이 뜨는 신비를 맛볼 수 있을 것 같았다.

예의 아내의 호통이다. “온천탕 안에서 술 마시는 거, 그 동네서 절대 금기래. 등에 십이첩 화폭이 있더라도 안 된다네. 혼수로 해온 냉장고랑 세탁기나 바꿔 주시지?” 수명을 헤아려 보니 어언 이십 년이다. 전면 입체냉각 방식도, 통째로 돈다는 세탁조도 세월은 못 이기는 것이다. 문제는 삼백은 두 가지 가전제품도 제대로 바꿀 수 없는 액수라는 사실이다. 기왕 농담인 거, 한 삼천이었으면 지금 오로라를 보고 있으려나.

박찬일 요리사·칼럼니스트

초저렴 에스엔엘(SNL) 호스트

공돈 300만원이라니, 아이 신나라 했는데… 돌아서니 애걔 싶다. 이 돈이야 어디 꼴 보기 싫은 국제행사 포스터에 쥐나 닭을 그리면 벌금으로 땡 아닌가? 심부름 센터에 바람난 아내 뒷조사를 의뢰하는 데도 300만원이 든단다. 뭐 바람날 아내 같은 건 애초에 없지만 말이다.

결국 나는 초저예산으로 내가 코미디 프로그램의 호스트가 되는 <에스엔엘(SNL) 이명석>을 찍기로 한다. 방송국을 빌리기는 힘드니 우리 집에 세트를 만들자. 거실, 침실, 서재, 옷방, 욕실 이렇게 다섯 세트장을 지으려고 했는데, 창고 겸용의 좁은 옷방은 벽을 헐지 않는 한 각이 나오지 않는다. 그래서 옥상에 야외 세트장을 하나 만들기로 변경. 마음 같아서는 벽지와 인테리어를 새로 다 하고 싶지만, 소품은 있는 걸 활용하고 도배는 내가 시트지를 붙이는 걸로 한다. 여기에 50만원.

촬영은 친구 남편을 꼬드긴다. 생방으로 진행해야 하니까, 다섯군데 모두 카메라와 조명이 필요하다. 화장실은 노트북의 영상통화 기능을 사용하는 것으로 해서 제외했지만, 그래도 장비 임대와 보조 인력 식비로 100만원 정도 소요.

라이브로 방영하니 편집은 안 해도 되지만 10년 넘은 컴퓨터는 업그레이드가 불가피하다. 여기에 45만원. 대본은 내가 모두 쓸 것이니 작가료는 필요없다. 메이크업, 의상도 직접 준비. 그러나 보조 연기자가 없으면 안 되겠지? 아마추어 연극배우로 활동하는 지인들을 꼬신다. 회와 보쌈을 사줘도 식비 20만원 정도면 떡을 치겠지 했는데, 리허설 두차례에 소주까지 시켜 총 40만원. 결정적으로 라이브 밴드가 필요하다. 직접 하모니카를 불고 노래를 할 거지만, 실력이 실력인 만큼 뒤를 잘 받쳐줘야 한다. 결국 60만원을 지출해 기타와 키보드를 섭외. 남은 5만원은 방영 시간 동안의 소음을 참아줄 이웃에게 과자를 사례. 이렇게 하룻밤의 쇼에 탕진한다.

이명석 저술업자


만원짜리로 유리창 닦아 봤어?

300만원이 생기면 1만원짜리로 인출해 차 수납함을 꽉 채울 거다. 그리고 소개팅을 해야지. 나는 소형차를 타는데, 소개팅한 여자에게 무시당한 적이 있다. 카페에서 얘기할 때는 내 얼굴과 말솜씨에 반했다. 자리를 옮기려고 주차장에 갔는데 여자가 태연한 척하려고 애썼다. 차 때문이었다. 얼굴이 이 정도 생기면 차는 작은 걸 타도 되는 거 아니니, 속으로 말했다. 그래서 시험하고 싶다.

차에 여자를 태운다. “거기 열어서 휴지 좀 줄래요.” 여자는 수납함을 열고 “어머 이게 뭐예요? 휴지가 안 보여요” 말하겠지. “밑에 깔려 있나? 그냥 만원짜리 몇개 집어 줘요. 앞유리 좀 닦게.” 여자의 무릎을 탁 치며 몇 장 올려줘야겠다. “저를 뭐로 보고 이러는 거예요?” 하면 그 여자랑 오래 만날 거다. 한두번 사양하다 챙겨넣으면 그날은 집에 안 들어가는 날이다.

그때부터는 여자를 꼬신다. 급히 살 게 있다고 말하고 백화점에 간다. 마음에 드는 거 고르라는 말도 덧붙인다. 얼마 전부터 ‘지 제냐’(Z ZEGNA)의 코발트빛 재킷이 갖고 싶었다. 150만원쯤 할 테니까 한참 동안 1만원짜리를 세서 계산하고, 여자에겐 아직 못 골랐으면 다음에 사준다고 한다. 미안하니까 저녁은 호텔 식당에서 먹는다. “제일 비싼 음식이 뭐죠? 와인은 여자분이 마시면 집에 안 들어가고 싶어지는 걸로 주세요.” 그리고 두서없이 이야기한다. “나랑 자요.” 식사를 마치고 객실에 들어가면… 섹스를 하겠지? 섹스가 끝나면 고백해야지. “저는 부자가 아닙니다.” 여자가 웃으면 그는 내 여자친구가 된다. 물론 여자가 허락한다면. 당황한 기색이 역력하면 내 애인이 될 영광을 안 줄 거다.

숙박·식사비는 60만원 정도다. 남은 돈으로는 의자를 산다. 사무실에서 자주 생각했다. ‘잘생긴 내가 평범한 사람들과 같은 의자에 앉아 일하다니.’ 포파페드레티의 접이식 의자는 튼튼하고 가볍다. 40만원. 차 안에 1만원짜리가 아직 많을 텐데. 그냥 둬야지. 차에 사람들이 타면 말할 거다. “가져. 정신 나간 미남이 두고 갔어.”

이우성 시인


다큐멘터리 감독 선언!

생각해 보니 300만원은 결코 적은 돈이 아니다. 중고 악기와 앰프, 스피커 등을 사서 4인조 밴드를 하나 구성할 수도 있고 참신한 소재의 독립영화 한 편을 만들 수도 있다. 심지어 부동산 투자를 할 수도 있다. 실제로 찾아보니 순천에 있는 13.2㎡(4평)짜리 가게를 최소 입찰가 270만원(6번 유찰된 가격)보다 조금 더 쓴 가격으로 입찰받은 사람도 있었다. 그렇다면 나도 불모지에 가까운 땅을 좀 살까?

300만원이면 내가 좋아하는 여러 가지 종류의 나무 묘목을 무려 1000그루쯤 살 수 있는 가격이다. 하지만 내겐 그걸 심을 만한 여분의 땅이 없다. 그렇다면 ‘우리 마을 아름답게 가꾸기’에 동참해 달라며 마을 주민들에게 골고루 나누어 주는 건 어떨까? 마을 이름이 ‘운교리’니까, 구름처럼 하얀 꽃이 피는 나무면 좋겠다. 매화나 목련, 작약, 불두화 같은. 한가한 일요일 오후 달콤한 공상을 하다가 잠깐 잠이 들었다. 꿈에서 사라방드(사라반드)가 온종일 울려 퍼지는 음악학교에 갔다. 그 때문인지 갑자기 이런 생각이 드는 거다. 중고 피아노를 사서 사라방드 딱 한 곡만 칠 수 있을 만큼의 속성 개인레슨을 받아보면 어떨까?

그러고 보니 생각나는 사람이 있다. 트랙터로 전국 국토 순례에 이어 세계 일주 떠났던 청년 강기태. 얼마 전 전주에 가서 만나보니 헐, 이번엔 리어카 여행 중이었다. 하동에서부터 리어카를 끌고 남원, 임실, 전주를 거쳐 완주의 한 시골 분교로 가서 작은 음악회 같은 걸 열 거라고 했다. 그러고 나면 이번 리어카 여행을 후원하는 지인들 500여명에게 1만원씩을 받아서 네팔 아이들과 함께 하기로 한 여행을 떠날 계획이라고. 그 여행에 동참해 볼까? 데뷔작을 준비하고 있는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으로서 말이다.

‘네팔 아이들은 거의 평생 여행이라는 걸 모르고 산다. 어느 날 그들 앞에 여행신의 특별한 총애를 받고 있는 강기태가 나타나고 함께 노새에 짐을 싣고 여행을 떠난다. 그들 앞에 어떤 일이 벌어질까?’ 아, 무심한 듯 쿨한 거의 완벽한 연출 의도가 아닐 수 없다. 좋다. 일단 중고 카메라부터 사자.

김경 칼럼니스트


더블린의 기네스 내가 마셔주마

아무리 생각해도 애매하다. 통장 잔액이 300원도 안 되는 처지에 할 얘기는 아니지만, 300만원은 너무 애매하지 않은가. 진짜 300만원을 줄 것도 아닌데 이왕이면 3억짜리 공수표 정도는 날려줬으면 얼마나 좋은가. 여하튼 그거밖에 못 주시겠다니 300만원짜리 상상력을 발휘해보기로 하자.

어차피 상상 속의 돈이니 한껏 사치를 부려보기로 하자. 역시 최고의 사치는 ‘먹어 치우는 것’ 아니겠는가. 세계에서 제일 비싼 요리들을 찾아봤다. 캐비아를 가득 넣은 오믈렛, 와규를 갈아 만든 패티에 푸아그라와 송로버섯을 끼워 넣은 햄버거, 식용 금을 첨가한 아이스크림 등. 근데 이런 것들은 너무 거창해서 되레 사치를 부린다는 느낌조차 들지 않는다. 더군다나 저런 고급 재료들은 자주 먹어봐야 그 진가를 알 수 있다는데, 배고프면 가장 먼저 라면을 떠올리는 내가 그 참맛을 알 리 만무하고.

이런 쓸데없는 생각을 하고 있던 중 갑자기 아일랜드가 떠올랐다. ‘우리는 유럽의 검둥이’라고 자조하던 영화 <커미트먼트>의 주인공들이 열정적으로 솔(soul)을 연주하던, 그리고 록밴드 유투가 목놓아 외쳐 부른 ‘블러디 선데이’ 사건이 일어난 바로 그 아일랜드 말이다.

그런데 이 비극의 고장을 다녀온 사람들이 한결같이 하는 말이 있다. ‘한국에서 먹는 기네스 맥주는 진짜배기 기네스 맥주에 비하면 너무 맛이 없다.’ 이런 역사의식 없는 인간들 같으니라고. 비싼 돈 들여 아일랜드까지 가서는 기껏 한다는 얘기가 겨우 그거냐? 근데 얼마나 맛있기에 다들 그런 말을 하는 것일까? 그 실체를 직접 확인해보고 싶어졌다.

일단 더블린 공항까지 가는 왕복 운임이 210만원 정도, 그리고 호텔 숙박료가 대략 10만원 정도 하는 것 같으니 비행일정 등을 고려해 50만원으로 5일간 숙박을 하자. 그러면 정말 밥값하고 맥주 마실 돈 정도가 남을 것 같다. 맥주 한 잔에 300만원이면 정말 사치 중의 사치라고 할 만하지 않은가? 여기에 먼저 말한 오믈렛이나 햄버거 등을 곁들이면 금상첨화겠다. 그러니 부디 통권 500호 특집 때는 5000만원 정도는 주기 바란다.

박근홍 게이트 플라워즈 보컬리스트


럭셔리 와인 한병 훌렁~

‘공짜로 300만원이 생긴다면 뭘 할 것인가?’라는 질문에 내가 뭘 제일 먼저 했을 것 같은가. 당연히 ‘300만원’을 구글 검색 창에 쳐 넣었다. 300만원으로 뭘 할 수 있을지 도무지 생각나는 게 없었던 탓이다. 생각해보면 300만원은 참 어중간한 돈이다. 뭘 해도 애매한 금액이다.

100만원이 조건이었다면 ‘신발을 사겠다’고 답했을 것이다. 신발은 옷보다 오래간다. 옷보다 더 큰 돈을 써도 죄책감이 덜 든다. 게다가 나는 신발 중독이다. 돈이 생기면 일단 신발을 살 궁리부터 시작한다. 그러나 300만원이라니. 신발 한 짝에 300만원을 쓸 수는 없는데다, 그만큼 비싼 신발 또한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구글에 300만원을 쳐 넣었다. ‘바람난 아내 뒷조사 300만원 줬더니…’라는 기사와 ‘300만원으로 100억 번 개미의 색다른 투자’, 그리고 ‘리미티드 에디션 와인이 한 병에 300만원…’이라는 기사가 나온다. 300만원은 바람난 마누라 뒷조사를 맡길 수 있는 돈이고, 100억을 벌 수 있는 종잣돈도 되며, 그냥 와인 한 병 값이기도 하다. 셋 중 하나를 고르라면? 그냥 300만원짜리 와인 한 병을 사고 말겠다. 나는 아내가 없고, 300만원으로 100억을 벌려다 10억을 잃을 가능성이 더 클 정도로 돈 관념이 없다. 그러니 답은 와인뿐이다. 가만 생각해보니 이거 꽤 근사한 300만원 탕진법이다. 공짜로 들어온 돈은 공짜처럼 써야 제맛이다. 누구도 초대하지 않고 혼자 식탁 앞에 앉아 300만원짜리 와인을 거침없이 따버린 다음 커다란 글라스에 콸콸 붓고 맛을 음미할 순간도 없이 훌렁 마셔버려야지. 이토록 방탕한 호사라니, 이토록 방자한 사치라니.

김도훈 피처 디렉터


300만원짜리 심리검사에 투척

최근 인기 있는 시에프(CF)의 한 장면, ‘장롱면허 4년, 택시도 무섭고 버스도 무섭지만 나는 내가 제일 무섭다.’ 그렇다. 내 얘기다. 장롱면허란 얘기가 아니고, 나도 내가 제일 무섭다는 거다. 대체 어떻게 생겨 먹었기에, 이리도 정체성이 모호한지. 바른 사회 정의를 부르짖다가도, 술 먹고 길가에 쓰러진 사람을 모른 척 지나치는 이 무심함, 지하철 쩍벌남에게 찍소리 못하고, 한쪽 구석에 더 바싹 붙는 이 소심함, 영원한 사랑을 맹세했던 현빈을 지우고, 동생을 사랑하는 조인성을 짝사랑하는 이 변덕, 한국에서만 유독 비싼 명품 브랜드를 욕하면서도, 세일 시즌을 기다리는 이 이중성이란!

나는 이런 사람이야, 난 뭘 좋아해라고, 머릿속으로 생각하던 나의 모습과 실제의 내 모습을 들여다보면 놀랍다 못해 신비하기까지 하다. 그래서 나는 예측할 수 없고, 대체 무슨 생각으로 살아가는지, 내가 궁금하다.

그래서 공짜로 300만원이 생긴다면 뭐에 쓸 거냐란 질문에 답해보자면, 한마디로, 나는 진정한 나를 찾는 구도의 길을 조금 단축시켜 볼 생각이다. 어떻게? 전문가의 도움을 빌려서! 얼마 전 신문에서 보니 유명한 정신과 의사가 자신도 모르는 자신의 심리를 꼼꼼하게 조사해서 “당신은 어떤 사람입니다”라고 얘기해주는 검사가 있다고 한다. 300만원이 조금 넘는다는데 그땐 하고 싶어도 엄두가 안 났는데, 공돈 300만원이라면 과감하게 나를 알아보는 검사에 투자할 수 있을 것 같다. 구도의 길도 돈이 있으면 좀 단축되는 좋은 세상이다.

심선애 샘표식품 홍보팀 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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