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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4.03 15:26 수정 : 2013.04.03 15:27

왼쪽부터 ‘푸시버튼’ 박승건, ‘카이’ 계한희, ‘쟈니헤잇재즈’ 최지형, ‘제이 쿠’ 구연주·최진우, ‘레이’ 이상현의 작품들.

[매거진 esc]

2013년 3월 25일부터 3월 30일까지, 2013년도 춘계 패션위크(2013년도 가을/겨울 시즌)가 열렸다. 지난번에 이어 강남이 아닌 강북의 두 곳이 선정됐는데, 여의도 아이에프씨 서울(IFC Seoul, Three IFC) 빌딩과 한남동의 종합 공연장 블루스퀘어(Blue Square)였다. 지금껏 기성 디자이너들과 신진 디자이너들이 컬렉션 장소를 나눠 사용한 데 비해, 이번에는 상대적으로 작은 규모였던 블루스퀘어에도 기성부터 신진 디자이너까지 골고루 참여한 점이 눈길을 끌었다.

서울시가 패션위크를 ‘외국 바이어(구매자)와 언론을 포함한 서울발(發) 축제’로 위치를 잡으면서 앞서 열리는 세계 4대 컬렉션(파리, 밀라노, 뉴욕, 런던)과의 일정 조율도 중요한 문제가 됐다. 세계 각지의 바이어들 또한 한정된 자본과 촉박한 일정이 있기 때문인데, 이번에는 2012년도 춘계 패션위크보다 약 일주일가량 앞서 시작했다. 컬렉션 직전, 미리 장소를 탐방하고 온 디자이너들도 말 많던 지난 패션위크보다 기대하는 장소라고 했다.

최근 몇 년간 서울패션위크에선 ‘남성복의 강세’가 두드러졌다. 실제 판매로 이어지는 과정에서는 두터운 고객층을 지닌 여성복에 비할 바가 아니었지만, 꾸준히 참여한 디자이너들의 발전하는 컬렉션을 목격하는 것이 남성복 컬렉션만의 즐거움이었다. 이번 남성복 컬렉션에선 ‘커다란 한 방’은 없었지만, 신구(新舊) 디자이너가 조화를 이루며 서울패션위크를 지탱했다.

최근 몇년간 약진한
남성복 강세
올해도 괄목할 성과
신구 조화 돋보여

수트에 관한 독자적인 해석으로 이름 높은 김서룡 옴므(kimseoryong homme, 디자이너 김서룡)는 울(wool) 소재 진보라색 수트와 밤색 코트처럼 화려하면서도 여백이 느껴지는 남성복을 선보였다. 꽃무늬 자수가 놓인 붉은 바지에 걸친 새하얀 퍼(fur) 코트는, 세계 남성복 시장에 불어닥친 ‘모피’ 열풍을 떠오르게 했다.

‘이상한 조합(스트레인지 아쌍블라주, strange assemblages)’이란 주제로 컬렉션을 선보인 레이(Leigh, 디자이너 이상현)는 서울패션위크에 참여한 이래 꾸준히 상승세를 기록하는 디자이너이다. 몸에 꼭 붙는 감색 더블블레스티드(double breasted, 두 줄 단추식) 코트와 가느다란 실루엣의 검은 바지가 이 조합의 가장 얌전한 모습(look)이었다면, 트렌치코트를 변형한 상아색 코트와 코트보다 긴 셔츠의 조합은 ‘왜 레이가 (남성복이면서도) 여성들에게 큰 지지를 받는지’ 대변했다. 컬렉션 말미의 쥐색 에이(A) 라인 코트는 레이가 가장 잘 만드는 겨울 외투 아닌가 싶을 정도로 아름다웠는데, 얼마 전 이상현이 크리에이티브 디렉터로 취임한 기성복 브랜드 플랙 진(PLAC Jeans)의 가을/겨울 시즌 또한 함께 기대하게 했다.

2년 연속 삼성패션디자인펀드(Samsung Fashion & Design Fund, SFDF) 남성복 부문을 수상한 최철용의 씨와이초이(Cy Choi)는 지난 시즌에 비해 ‘오버사이즈(oversize, 큰 치수)’가 두드러졌다. 음각과 양각 패턴의 검정 코트부터 반복되는 모노그램이 들어간 감색 코트까지 유독 큰 치수의 외투를 선보였는데, 그가 최근 밝힌 것처럼 브랜드를 보여주는 방식뿐만 아니라 판매(sales)와의 균형을 염두에 둔 작업을 천명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국내 패션 디자이너 중에서도 예술, 문학 등 다양한 분야와의 협업과 전시에 활발한 씨와이초이지만, 서울패션위크에서만큼은 ‘옷’과 ‘사람’에 집중하고 있었다.

오랜만에 서울패션위크에 귀환한 그라운드웨이브(Ground Wave, 디자이너 김선호)에 붙는 수식어는 ‘가장 한국적인 남성복’이다. 선대(先代) 패션 디자이너들이 눈에 드러나는 한국의 미를 일차원적으로 이식했다면, 김선호의 남성복은 한복의 여밈 방식이나 누빔 소재의 사용, 회색과 검정, 흰색 정도로 제한한 색의 사용으로 조금 다른 길을 가곤 했다. 그런 그라운드웨이브의 느낌이 확연히 달라졌는데, 먼저 ‘오버사이즈’에 관한 흥미로운 접근이었다. “보통 남성복 치수를 몇 배 이상 키우고, 그 안에서 다시 어깨와 팔의 형태를 수정하는 방식으로 만들었습니다.” 부드러운 울(wool) 대신 딱딱한 펠트(felt; 모직이나 털을 압축해서 만든 두꺼운 천)를 사용해 부피감을 극대화하고, 보통 내부에 숨기는 재봉 선을 바깥으로 드러냈다. 그라운드웨이브의 실루엣은 무척 정제되었고, 차분한 색 사용 덕분에 입고 싶을 만큼 매력적이었다.

이처럼 수년간 서울패션위크에 참여한 디자이너들은 각기 다른 콘셉트에 맞춰 고른 수준의 컬렉션을 선보이는데, 제너레이션 넥스트(필자 주; 참가 기준은 ‘독립 브랜드 1년 이상~5년 미만의 신진디자이너’)에 참여한 몇몇 디자이너의 컬렉션 또한 무척 흥미로웠다.

미국에서 남성복을 전공하고 톰 브라운(Thom Browne)과 로버트 겔러(Robert Geller) 등의 뉴욕 남성복 디자이너 밑에서 일을 배운 권문수는 이번 시즌 자신의 브랜드 ‘문수 권(Munsoo Kwon)’으로 첫 런웨이 컬렉션을 선보였다. 트렌치코트를 변형한 짧은 코트와 물방울 무늬의 대비를 사용한 카디건과 바지의 조합은 ‘일상적인 남성복’을 지향하는 디자이너의 생각을 드러냈다. 컬렉션의 완성도에 아쉬운 점은 있었지만, 6개월 후 선보일 컬렉션에서 더 발전할 가능성이 있으리라.

무대 뒤에서 스티브 제이 앤 요니 피의 의상을 입고 포즈를 취한 모델들.

런던에서 유학한 디자이너 듀오 ‘제이 쿠(J Koo, 디자이너 구연주/최진우)’는 남성복 테일러링을 염두에 두고 여성복을 만든다는 브랜드 철학처럼 그 둘의 균형점을 찾는 과정을 슬기롭게 보여줬다. 넉넉한 크기의 검은 울 테일러드 재킷은 같은 소재 치마와 한 쌍을 이뤘고, 긴 코트와 라이더 재킷, 바지까지 통일된 소재를 사용한 모습에서는 젊은 디자이너 특유의 에너지에 세심한 테일러링이 더해진 느낌이었다. 기하학적인 패턴이 들어간 하늘색 실크 원피스와 오버사이즈 보라색 윈드브레이커(windbreaker; 스포츠용 바람막이 재킷)로 여성스러움을 놓치지 않았다는 점 또한 훌륭했다. 다음 시즌이 더 기다려지는 일종의 ‘발견’이었다.

‘컨셉코리아’로 두 번 뉴욕패션위크를 밟은 카이(KYE, 디자이너 계한희)는 런웨이 컬렉션 경험을 더할수록 디자이너 특유의 유머와 섬세함을 영리하게 조합해낸다. 화려한 그래피티(graffiti) 프린트는 황금색부터 검은색까지 다양하게 변주되었고, 발목까지 내려오는 긴 코트와 스웨트셔츠(sweatshirt), 레깅스의 조합은 ‘스트리트 패션’과 ‘기성복’이 어떻게 소통하는지 보여주는 방증이었다. 앞좌석 가장 좋은 자리에 앉은 지드래곤(G-Dragon of BigBang)과 씨엘(CL of 2NE1)에게도 무척 잘 어울릴 듯했다.

최고 인기쇼
스티브 제이·요니 피
개성과 변화의 앙상블
불황 탄 보수적 분위기 속
푸시버튼 박승건 단연 튀어

가장 인기 있는 쇼 중 하나로 자리매김한 스티브제이 앤 요니피(Steve J & Yoni P, 디자이너 정혁서/배승연)는 ‘클래식 미트 펑크(Classic Meet Punk)’라는 주제로 그들이 생각하는 ‘스트리트’와 ‘패션’의 교차점을 풀어냈다. 높은 웨지힐에 시스루(반투명) 코트를 겹쳐 입고 ‘다이아몬드’와 ‘해골’을 조합한 프린트가 들어간 실크 원피스는 스티브제이 앤 요니피의 ‘정석’이었지만, 갈수록 비중이 커지는 남성복에선 그대로 길거리에 입고 나갈 만한 옷들이 가득했다. 큰 치수의 가죽 스타디움 점퍼에 무릎까지 내려오는 데님 셔츠와 체크 셔츠를 겹쳐 입고, 니트 레깅스와 스터드(stud, 징) 달린 모카신을 신은 남자 모델은 마치 디자이너 정혁서를 보는 듯했다. 그들이 은유한 클래식이 고급스러운 여성복을 칭한다면, 펑크는 섹스피스톨즈(Sex Pistols) 시대의 영국이면서도 2013년, 우리가 접하는 길거리 문화를 뜻하지 않을까? ‘스티브 요니’의 색이 드러나면서도 점진적인 변화들이 자연스럽게 안착한다는 점에서, 고개 끄덕일만한 컬렉션이었다.

쟈니헤잇재즈(Johnny Hates Jazz, 디자이너 최지형)는 서울패션위크에 참여한 후로 많은 여성이 기대하는 컬렉션 중 하나였지만, 브랜드 콘셉트와 시즌의 주제가 명확하게 겹치지 않은 컬렉션을 선보일 때에는 내심 갸우뚱한 면도 있었다. 디자이너가 절치부심하며 준비한 흔적이 역력한 이번 컬렉션 주제는 ‘헌터 온 더 그레이(Hunter On The Grey)’였다. 20세기 중반 숙녀들에게 영감 받은 컬렉션은 그간의 우려를 털어낼 만큼, 디자이너 최지형의 존재감을 여실히 드러냈다. 다양한 색상을 사용했던 지난 컬렉션들과 달리, 이번에는 ‘회색’을 바탕으로 몇 가지 색만을 사용했다. 그것은 일종의 제한으로, ‘남성복을 여성복 디자이너가 변형했을 때 얼마나 아름다울 수 있는가?’에 관한 명민한 해답이었다. 퍼(fur)와 니트(knit)의 사용은 과하지 않았고, 절제할수록 드러난 아름다움이 컬렉션 전반을 지배했다. 상반신 절개선을 드러낸 회색 울 원피스에는 여성 특유의 관능미는 없었지만, 섬세한 테일러링과 함께 한 스포티즘으로 브랜드는 물론 서울패션위크에도 활력을 불어넣었다.

서울패션위크를 보면서 종종 드는 아쉬움 중 하나는, 경기 불황의 여파인지 극적인 쇼를 추구하는 디자이너들이 줄고 상업성에 집중하는 컬렉션이 절대다수를 차지한다는 것이다. 1년에 두 번 열리는 패션쇼에서 ‘감동’을 찾을 수 없다는 점은 꾸준히 이 분야를 지켜본 필자에겐 아쉬운 대목이다. 하지만 이번에는 극적이면서도 자기 색을 확실히 다진 디자이너가 있었으니, 바로 푸시버튼(pushBUTTON)의 박승건이었다. 콧소리 가득한 샹송 음악과 뚜벅뚜벅 모습을 드러낸 자주색 코트의 모델은 20세기 초반 파리(Paris) 어느 골목에서 튀어나온 것처럼 보여서, 어딘지 뻔한 컬렉션이 되지 않을까 우려했다. 걱정은 기우였다. 견장 달린 금색 단추의 롱코트와 자주색 더블블레스티드 코트는 분명히 ‘복고’적이었지만, 그 실루엣까지 답습하진 않았다. 특히 남성 테일러드 재킷과 입은 바지는 요새 길거리에서 보기 어려울 정도로 헐렁했고, 지그재그 패턴이 들어간 퍼(fur) 코트와 니트 카디건 시리즈는 긴 호흡으로 양껏 다양한 스타일을 선보인 컬렉션의 ‘쉼표’이자 ‘느낌표’였다. 패션 사진가 보리가 찍은 사진을 콜라주한 에코백에는 ‘패션 피플(Fashion Peple)’을 줄인 ‘패-피(Fa-Pe)’라는 머리글자가 들어갔다. 패션의 과시적인 외양을 비아냥거리던 단어를, 디자이너 박승건은 패션과 패션을 사랑하는 사람들에 대한 헌사로 사용했다. 2000년대 초반, 처음 이태원 푸시버튼 매장에 들어섰을 때 느낀 충격 속의 조화가 떠올랐다. 처음 그 모습대로 컬렉션을 구현한 것처럼 느꼈다.

지난 서울패션위크 비평에서는 컬렉션을 구성하는 가장 중요한 요소인 ‘디자이너’와 ‘컬렉션’ 대신, 그것을 담아내는 그릇 - 외부 요인 - 에 관해 더 성토했다. 이번에도 문제가 없던 건 아니다. 패션쇼가 지연된 가장 큰 이유는 제한된 공간에 입장하지 못한 유료 관객들의 항의였다. 결국, 지금 서울패션위크 웹사이트에는 환불에 관한 공지가 떠 있다.

소위 ‘스트리트 패션’을 찍는 패션 블로거들의 폭발적인 참여 또한 흥미로웠다. 컬렉션 자체에 집중하기 어려울 정도로, 자신을 꾸미고 그것을 포착하는 데 집중하는 ‘스트리트 패션’의 과잉된 측면도 느껴졌다. ‘모델’들의 열성 팬이 기하급수적으로 늘어난 점 또한 재밌는 점으로, 뉴욕에서 온 어느 편집매장 바이어는 서울패션위크가 아니라 서울‘모델’위크‘ 아니냐는 농담도 곁들였다. 하지만 이것들은 패션위크를 둘러싼 현상이지 본질은 아니다. 본질은 컬렉션 자체에 있다.

그라운드웨이브 김선호는 한국적인 남성복을 만들어 눈길을 끌었다.

이번 서울패션위크를 보고서, 외국 패션위크 사대주의를 떨칠만한 시금석이 이번 패션위크가 되지 않을까 기대하게 됐다. ’싸이(Psy)‘와 ’케이팝(K-pop)‘을 필두에 둔 한류의 존재를 이제 누구도 부인하지 않는 것처럼, 서울에서 만들어가는 패션이 세계를 이끌 패션은 아닐지언정, 그 흐름을 답습하지 않고 독자적인 트렌드를 만들어내는 창구 구실을 할 수 있지 않을까? 눈에 보이는 몇 가지 트렌드 - 미니멀리즘(최소주의)와 레트로(복고)가 혼재한 열풍, 오버사이즈의 귀환과 퍼(fur)의 절제된 사용, 남성복과 스트리트 패션의 영향 - 를 넘어서 각각의 디자이너가 각자의 트렌드를 만들어가는 것과 동시에 컬렉션의 옷들을 더 쉽게 접할 수 있도록 관계자들의 고민과 구조적인 해법이 함께 한다면, 여전히 ’그들만의 축제‘에 가까운 서울패션위크가 새로운 한류의 축을 담당할 날도 머지않을 것이다.

글 홍석우 패션 저널리스트 / 스펙트럼 매거진 편집장 yourboyhood@gmail.com

사진제공 서울패션위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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