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4.17 18:35
수정 : 2013.04.24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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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파비오 노벰브레의 인상적인 플라스틱 해골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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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스타일
거장의 귀환과
신진의 비상을 알린
밀라노 국제가구박람회
자연을 닮은 소파
바퀴와 다리를 접목한
필리프 스타르크의 테이블 등
디자인의 새로운 가치 발견
지난 9일부터 14일까지 이탈리아 밀라노에서 열린 제52회 ‘밀라노 국제가구박람회’에는 이번에도 세계적인 디자이너들과 브랜드들이 자신의 이름과 사업적 운명이 걸린 디자인을 가지고 엄청난 각축을 벌였다. 그렇기 때문에 세계 디자인의 흐름과 수준이 실시간으로 감지되며, 또 그것을 보러 세계에서 많은 사람들이 모였다. 워낙 많은 디자인들이 밀라노 도심 곳곳에서 전시되고 있었기 때문에 대표적인 디자인을 뽑아내기는 어렵다. 하지만 세계 디자인의 흐름을 엿보게 해줄 만한 눈에 띄는 디자인들이 없는 것은 아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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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마지스의 테이블로 컴백한 필리프 스타르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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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 디자인의 희망이라고 할 수 있는 파비오 노벰브레(Fabio Novembre)의 디자인이 그중 하나였다. 명성에 걸맞게 그는 여러 전시장에서 작품들을 선보이고 있었는데, 신예 가구 디자인 브랜드 구프람(Gufram)과 함께 만든 의자 ‘졸리 로저’(Jolly Roger)가 가장 눈에 띄었다. 의자 뒷면을 해골로 디자인한 발상과 등받이 안쪽에 세계지도를 부조로 새겨 넣어서 의미론적 접근을 한 솜씨가 돋보였다. 이제 디자인은 예전처럼 기능성이나 생산성만을 돌보아서는 부족하다는 것을 강렬한 시각적 이미지와 사람들을 웃음 짓게 만드는 서정성으로 웅변하고 있었다. 플라스틱이라는 재료의 특징을 최대한 활용하고 있는 그의 기술적 이해도도 눈여겨볼 만한 것이었다.
프랑스의 거장 장마리 마소(Jean-Marie Massaud)의 ‘에어버그(Airberg) 소파’도 파장이 큰 디자인이었다. 밀라노 가구박람회에서도 그랬고, 요즘 새롭게 나오는 디자인들은 거의 모두 질서정연한 형태를 추구하지 않으려고 한다. 20세기 기계미학에 입각했던 디자인들과는 완전히 다른 양상이다. 장마리 마소는 그런 불규칙성을 펠트로 된 형태로 표현하고 있었다.
그냥 보면 아무렇게나 생긴 두 개의 기다란 덩어리로 된 조각 같은 모양이라서 첫눈에 소파로 보이지는 않는다. 하지만 자세히 보면 등받이와 좌석이 있는 소파의 형상을 분명히 하고 있다. 소파로 사용하는 데 큰 문제는 없다. 이 디자인이 가진 매력은 바로 이러한 이중성, 소파로 쓸 수 있기도 한 물건이지만 전혀 소파 같지 않아서 하나의 작품처럼 보이기도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런 불규칙성이 이 형태를 단지 예술품으로만 만드는 것이 아니라 나아가 다듬어지지 않은 흙덩어리, 나무 덩어리와 같은 순수 자연물의 속성을 가지게 한다는 것도 빼놓을 수 없는 사실이다. 덕분에 이 희한한 소파는 예술품이 되었다가, 자연물이 되었다가, 생활용품이 되기도 한다. 이런 여러 의미를 장마리 마소는 소파라는 물체와 펠트라는 재료 위에다 표현하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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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관심을 끌었던 알레산드로 멘디니와 조명등 아물레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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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탈리아의 중견 가구 브랜드 마지스(Magis)에서는 거장 필리프 스타르크의 귀환을 볼 수 있었다. 마지스가 의뢰해 만든, 그의 개성이 절절히 배어 나오는 테이블 ‘빅윌’(Big Will)이 마지스 전시장 가운데에 자리잡고 있었다. 은은한 색상과 단순한 모양에서는 어떠한 자극적 내용도 발견할 수 없었지만, 자세히 살펴보면 필리프 스타르크 특유의 감각이 정신적으로 큰 자극을 주는 테이블이었다. 테이블 다리 한 짝은 그냥 다리이고, 한 짝은 둥근 모양의 바퀴로 되어 있어서 이동하기에 용이하도록 되어 있었다. 그러나 그 모양은 기능성을 그대로 드러내는 데에서 그치지 않았다. 둥근 바퀴와 그것에 가늘게 붙어서 올라갈수록 굵어지는 다리는 그것 자체가 하나의 조각이라고 할 만한 것이었다.
무엇보다 번쩍이는 금속성의 재질로 마감하여 조잡하지 않으면서도 최고로 화려해 보이게 처리한 솜씨는 필리프 스타르크의 탁월한 디자인 능력을 잘 보여주는 것이었다. 평평한 테이블 판의 깔끔한 처리는 아랫부분을 더욱 돋보이게 해주었다. 무엇보다 은퇴를 천명했던 거장의 솜씨를 다시 보게 되었다는 것은 무척이나 반가운 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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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기발한 개성과 아름다운 디자인으로 눈을 떼지 못하게 만들었던 가구 브랜드 전시장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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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0대에 접어든 살아있는 전설 알레산드로 멘디니는 이번 밀라노 가구박람회에서도 자신의 존재감을 한껏 드러내고 있었다. 관계된 전시만도 밀라노 전역에 10군데가 된다고 하니 그의 명성은 여전하다는 것을 느낄 수 있었다. 그중에서도 브랜드 라문(Ramun)과 함께 만든 조명 디자인들은 이번 행사에서 많은 인기를 끌었다. 둥근 링과 선적인 몸체로만 이루어진 미니멀한 조명 ‘아물레또’(Amuleto)는 미니멀하게 생긴 모양과는 달리 그림자가 잘 안 생기는 구조나 어느 위치든 조명등이 부드럽게 움직이는 사용감으로 사람들에게 매우 큰 만족감을 주었다. 무엇보다 멘디니가 많이 하지 않았던 조명 디자인 분야에서 성공적인 결과를 만들어냈다는 점에서 큰 의미가 있는 디자인이었다. 아무튼 멘디니는 여든을 넘어서도 자신의 디자인 세계를 변화하는 디자인 상황 속에서도 여전히 새롭게 재탄생시키고 있었으며, 그런 능력을 보면 ‘살아있는 전설’이라는 말이 그저 수사학적 표현이 아님을 느낄 수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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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신예 디자이너 마티아스 벵트손의 인상적인 의자 디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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밀라노 가구박람회는 신예 디자인들의 등용문으로서 역할 또한 크다. 산업에 아직 찌들지 않은, 젊고 신선한 감각으로 무장한 예비 디자이너들이 기업과 거장들의 틈바구니 속에서 자신들의 입지를 만들어나가고 있는 장면도 재미있는 볼거리이다. 정말 셀 수 없는 많은 신예 디자이너들과 디자인들이 참가했는데, 그중 하나가 덴마크의 마티아스 벵트손(Mathias Bengtsson)이라는 디자이너의 ‘그로스(Growth) 의자’였다. 몸체는 전부 알루미늄을 주조한 것이었고, 모양은 어떤 형체를 가지고 있지 않은 비정형적인 것이었다. 요즘 많이들 실험하고 있는 유기적 형태의 구조라 할 수 있는데, 이런 형태를 만들기 위해서는 형태에 대한 감각이나 제작에 대한 기술적 이해가 필요하다. 디자이너는 단지 희한한 모양만 디자인한 것이 아니라 그것을 뒷받침할 만한 조형적 감수성과 기술도 함께 가지고 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었다. 이런 작업들을 하면서 그는 거장으로 성장해나갈 것이다.
엄청나게 많은 디자인들을 단순히 몇 개의 단서로만 정리한다는 것이 무리이긴 하겠지만 전체 박람회를 통해 알 수 있었던 것은 예전처럼 주도적인 디자인 흐름이 거의 없다는 것이고, 북유럽의 내추럴한 디자인 경향이나 일본 디자인의 미니멀하고도 동양적인 경향들이 적잖이 눈에 띄었고, 이제는 디자인에 가치를 담으려는 의지가 매우 뚜렷하게 보였다는 것을 언급할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이 모든 움직임은 사람들의 삶을 좀더 의미있게 만드는 방향을 향하고 있다는 공통점을 가지고 있었다. 디자인 위에는 사람들의 삶이 있다는 것을 새삼 확인할 수 있었다.
글·사진 최경원 현디자인연구소 대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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