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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4.24 17:48 수정 : 2013.04.24 17:48

일러스트레이션 김중혁

[매거진 esc] 김중혁의 메이드 인 공장 ⑥ 도자기 공장 (상)
로맨틱과 예술만
떠올렸던 도자기 제작
공장에는 굉음 가득
기계가 빚고 구워

도자기, 하면 두 편의 영화가 떠오른다. 언제적 얘기냐고 핀잔 듣기 딱 좋을 영화지만 <사랑과 영혼>(1990)을 피해 갈 수 없다. 데미 무어를 뒤에서 안은 패트릭 스웨이지의 자세가 얼마나 로맨틱했는지 모른다. 도자기 물레는 계속 돌아가는데 흙을 만지는 척 서로를 만지고, 쫀득한 흙더미가 망가지는 걸 아랑곳하지 않고 두 사람이 키스를 나누던 장면을 대부분 기억할 것이다. 그 장면을 본 많은 사람들이 근처 공방의 도자기 수업에 등록했다는, 그러나 영화 속 장면을 재현할 수 있으리라는 기대와 달리 자기 손만 만지작거릴 수밖에 없는 현실을 참지 못하고 만들던 도자기를 부숴버린 후 공방을 뛰쳐나갔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후문이 들리기도 했다.

또 하나 생각나는 영화가 임권택 감독의 <취화선>이다. 멀쩡해 보이는 도자기를 부수던 장승업은 결국 가마 속으로 들어가서 (말 그대로) 자신의 몸을 불태우며 도자기를 완성하는데, 그 충격적 결말을 보며 ‘아이 참, 저러실 것까지야 있나’ 싶은 생각을 했던 기억이 난다. 도자기란 어째서 그토록 까다로운 예술 장르가 된 것일까. 어째서 조그마한 티끌의 흠도 허락하지 않게 된 것일까. <취화선>에는 장승업과 화부의 이런 대화가 등장한다. 장승업이 묻는다. “자네는 어떤 그릇이 나오기를 원하는가?” 화부가 대답한다. “선생님 같은 화공들은 철사가 잘 녹아 그림이 온전히 살아 나오길 기다릴 것이고, 유약 바른 사람들은 유약이 잘 녹아내리길 바라고, 아마 주인은 한두 점 명품이 나오길 소원하겠죠. 어디 그게 도공들 마음대로 되는 일인가요? 불이 말하는 거지요.”

컨베이어벨트 위의 밥그릇과 국그릇
풍족한 저녁식사가 여기서 시작된다

‘불이 말한다’는 저 말이 도자기를 가장 잘 설명해주는 한 문장일 것이다. 불이 말하는 것이기 때문에 그토록 까다로운 것이며, 인간이 제어할 수 없는 자연의 영역에서 비롯된 작품이어서 우연에 맡길 수밖에 없는 것이다. 도자기 공장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 ‘우연의 예술’에 대해 생각해보았다. 도자기 공장이 어떻게 생겼을지는 한번도 생각해보지 않았다. 상상해보려 해도 상상이 되질 않았다. 내게 도자기는 예술의 영역이었고, ‘로맨틱’의 영역이었으므로 그런 도자기를 ‘공장’에서 생산한다는 걸 상상하기 힘들었다.

도자기 공장으로 향하는 택시 안에서 기사님과 잠깐 대화를 나누게 됐다. 도자기 공장으로 간다는 말에 기사님은 역대 대통령의 밥그릇 얘기를 꺼냈다. 역대 대통령 부부의 식기 전시회를 본 적이 있는데, “이순자 여사는 화려한 걸 좋아해서 모든 그릇이 분홍색이었고, 박정희 대통령은 어찌나 군인 정신이 투철했던지 그릇도 전부 국방색을 사용했더라”는 얘기를 했다. 이런 것도 중요한 정보다 싶어서 열심히 이야기를 들었는데, 공장에 도착해보니 응접실에서 상설로 전시를 하고 있었다. “기사님, 뻥도 잘 치셔, 국방색 그릇이 어디 있습니까! 이순자 여사의 그릇도 생각보다 화려하지 않고요!” 국방색 그릇까지는 아니었지만 박정희 대통령의 반찬 그릇이 특이하긴 했다. 강낭콩처럼 생겨서 여덟가지 반찬을 한꺼번에 담을 수 있는 그릇이었다. 그릇들은 소박했고, 간결했다. 대통령들이 사용한 도자기를 유심히 들여다보면서 내가 무언가 착각하고 있다는 걸 깨달았다. 나는 어째서 도자기라는 단어에서 ‘예술’만을 떠올렸던 것일까. 도자기에서 가장 중요한 단어는 ‘그릇’을 뜻하는 글자 ‘기’(器)인데 말이다.

공장에 들어섰을 때의 풍경을 잊을 수 없을 것 같다. 거대한 기계가 굉음을 내며 그릇을 만들고 있었다. 로맨틱은 없었다. 누군가의 손도 필요없었다. 기계가 원료를 자르고 회전시켜 그릇을 빚어냈다. 자동성형기와 자동정형기를 빠져나온 밥그릇과 국그릇은 일렬로 가지런히 컨베이어벨트를 타고 이동했다. 하얀 밥그릇 하나에 하얀 국그릇 하나가 한 조로 움직였다. 나는 그 장면이 사뭇 감동스러웠다. 컨베이어벨트 위의 밥그릇과 국그릇에 따뜻한 쌀밥과 칼칼한 고깃국이 담겨 전국으로 뻗어나가는 장면을 상상했다. 하루 일을 마치고 온 사람들이 컨베이어벨트로 모인다. 그들은 나란히 앉아 자신의 밥그릇과 국그릇에 담긴 밥과 국을 먹는다. 흉물스러운 장면이지만 내게는 경건한 장면이기도 했다. 나는 공장에서 만들어지는 수많은 그릇에 압도당했고, 그 그릇에 담기게 될 수많은 밥과 국을 상상하며 행복했고, 그릇들이 만들어낼 풍족한 저녁 식사 시간의 웃음에 흐뭇했다.

어린 시절, 밥을 먹지 못할 정도로 가난하지 않았지만 나는 이상하게 밥그릇과 국그릇을 보면 마음이 설레곤 했다. 반찬은 모두 준비가 됐고, 숟가락과 젓가락도 잘 정돈되어 있고, 이제 밥과 국만 도착하면 된다. 밥그릇과 국그릇은 어머니 옆에 포개져 있었다. 다른 일은 자식들에게 시켰지만 밥을 푸는 일과 국을 푸는 일은 어머니의 역할이었다. 어머니 옆에 포개져 있는 하얀 사기그릇들은 곧 있을 포만의 예감인 셈이었다. 공장에 쌓여 있는 그릇들을 보면서 마음이 푸근해졌다.

공장에서 생산하는 도자기는 두 종류인데, 하나는 ‘파인차이나’이고 또 하나는 ‘본차이나’이다. 두 제품의 생산 방식은 완전히 다르다. 그릇을 좋아하는 사람들은 이미 다 알고 있는 정보겠지만 (저는 이번에 처음 알았습니다) ‘본차이나’는 젖소의 뼈를 태워서 생긴 재, 즉 ‘본 애시’(Bone Ash)를 50% 이상 함유한 제품으로 일반 도자기에 비해 강도가 높고 가벼운 게 특징이다. ‘파인차이나’는 젖소 뼈가 들어가 있지만 본차이나보다 가격이 조금 저렴한 제품이다. ‘본차이나’라는 단어를 들을 때마다 도대체 일반 도자기와 ‘뭔 차이인가’ 싶었는데 이제야 궁금증이 풀렸다. 일반 도자기보다 훨씬 가볍고 투명하며 단단한 게 뼈 때문이었다. ‘태어날 때부터 차이나’는 제품인 셈이다. (아, 이런 개그 죄송합니다.)

그릇을 만드는 성형 과정은 (기계로 만드는) 자동성형과 (기계로 생산하기 어려운 주전자 등을 석고형틀로 만드는) 주입성형으로 나눌 수 있는데, 공정도 다양하고 공간도 세분화되어 있어서 이곳저곳을 둘러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꽈배기를 굽듯 주전자의 손잡이 부분만 성형하는 작업장도 있었고, 도자기에 인쇄될 전사지를 붙이는 곳도 있고, 찻잔에다 직접 그림을 그리는 작업장도 있고, 고급 제품을 위해 보석을 일일이 붙이는 작업장도 있다. 밥그릇이나 국그릇뿐 아니라 간단한 접시와 찻잔부터 보석을 박은 고급 도자기까지 공장 곳곳에 흩어져 다양한 그릇들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가장 재미있어 보이는 작업장은 전사지를 붙이고 찻잔에다 그림을 그리는 곳이었다. 재미있어 보이지만 절대 간단한 작업이 아니었다. 작업장으로 걸어가다가 거기에 적힌 표어를 보게 됐는데, 묘하게 마음을 울리는 내용이었다. 표어 내용은 다음 회에 계속.

취재에 도움을 주신 한국도자기에 깊은 감사의 말씀을 드립니다.

김중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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