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04.24 18:10
수정 : 2013.04.24 18:10
[매거진 esc] 독자사연 맛 선물
20년 전 일이다. 엄마가 미국 이모댁에 한 달 일정으로 다녀오시기로 하자 우리 남매 넷은 속으로 쾌재를 불렀다. 엄마는 아빠 챙기기, 학교생활 등 끝없이 신신당부하셨다. 특히 큰언니 말을 잘 들어야 한다고 강조하셨다.
대학 신입생이었던 큰언니는 고생문이 열린 거였다. 동생 사랑이 끔찍한 큰언니는 새벽같이 일어나 작은언니, 나, 남동생의 도시락을 쌌다. 평소에 엄마가 해주지 않던 반찬을 싸줘 점심시간이 은근히 기다려졌는데 그중 압권은 메추리알 프라이였다. 조그만 알을 일일이 깨서 야들야들하게 익혔는데 달걀과는 다른 심오한 맛이 있었다.
언니는 저녁식사에 적어도 국이나 찌개는 하나씩 꼭 올렸고, 외식은 물론 배달 음식도 시키지 않았다. 문제는 아침이었다. 늦게 일어나 동동거리며 등교 준비를 하는 동생을 위해 쉽게 먹을 수 있는 게 뭔지 며칠 고심했다. 누룽지도 끓여보고, 주먹밥도 만들어냈다. 어느 날 감자를 쪄 반을 가르고 녹인 버터를 넣은, 구운 감자구이를 내놓았다. 그 위에는 슬라이스치즈와 구운 베이컨도 뿌려져 있었다. 우리는 맛있게 먹었고, 큰언니는 만족스러워했다. “내일 또 해 줄까?” 하는 물음에 우리는 “응!” 대답했고, 큰언니는 다음날도, 다음날도 같은 음식을 내놓았다. 넷째 날부터인가, 우리는 큰언니 몰래 눈을 맞추고 난감한 표정을 지었다. 먹는 속도도 확연히 느려졌다. 엄마가 떠난 지 열흘째 정도 되는 날부터 우리는 매일 아침마다 ‘죽음의 통감자구이’를 먹었다. 언니가 고생하는 걸 아는지라 한마디도 불평하지 않았다.
마침내 엄마가 돌아와 밥은 잘 먹었는지 가볍게 물으셨는데 막내가 감옥에서 풀려난 양 가슴 터지게 외쳤다. “엄마, 된장찌개를 끓이더라도 감자는 절대 넣지 마!” 나중에야 우리의 인내를 알게 된 큰언니는 말을 하지 그랬느냐며 미안해했다. 하지만 이제 남편의 아침상을 차리게 된 나는 가끔 큰언니의 아침상이 그립다. 엄마가 없는 집, 주렁주렁 동생들에게 책임감과 의무감으로 양념한 그 통감자구이가 먹고 싶어 큰언니에게 전화하면 큰언니는 말한다. 이제 직접 해 먹으라고!
김경희/서대문구 홍제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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