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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5.01 17:48 수정 : 2013.05.01 17:48

[매거진 esc] 임경선의 남자들

직장생활의 많은 부분을 ‘을’ 여자로 보냈다. 다양한 ‘을’의 직업이 있겠지만 내 경우엔 기업의 홍보담당자로서 매체사를 상대로 ‘을’이었고, 광고대행사의 기획자(AE)로서 광고주를 상대로 ‘을’이었다. 갑이 부르면 저녁이건 주말이건 달려갔고 뭘 해달라는 것을 거절도 못했다. 어떤 기자들에겐 아예 기사를 대신 써 주거나 외신을 번역해 주기도 하고 야간 당직 때는 야식도 대령했다. 광고주 회사에선 일과 관련이 없어도 인력이 필요하면 출동을 했고 갑 실무자가 써야 할 본사용 기획서나 보고서를 대신 썼으며 접대 자리에선 비위를 맞춰야 했다. 힘들고 더럽고 치사해서 못 해 먹겠다 싶었지만 그럼에도 을 동료 간의 연대감으로 즐겁게 버텼다. 일부 갑의 무능함과 게으름을 대신하여 ‘진짜’ 일은 사실상 우리가 하는 거라며.

갑들의 ‘갑질’로 힘들다고 당시엔 투덜댔지만 돌이켜보면 을로서의 직장생활이 훨씬 재미있고 치열했던 것 같다. 3분 대기조에 어떤 사고가 터질지 몰라 하루하루가 초긴장 상태였지만 그만큼 버티는 힘이나 위기관리능력도 생겼고 일부 지독한 ‘진상’ 갑들의 괴롭힘도 하나의 도전처럼 여겨져 어느새 사람을 주무르는 잔챙이 기술도 자연스레 터득되는 부분도 있었다. 게다가 깊숙이 일에 발을 담그다 보면 갑들도 그쪽에선 나름 을의 입장임을 이해하기도 했다.

을의 실무를 하면서 사실 내가 더 예의주시했던 것은 갑의 실무자나 갑의 책임자가 아니다. 되레 을의 실무책임자, 다시 말해 내 쪽의 상사였다. 대개의 일이 그렇지만 을의 일은 업무 특성상 특히나 더 실무자들이 훨씬 더 일상적으로 많이 움직이고 드러난다. 을의 책임자는 갑과 업무를 시작할 때 이후로는 뒤로 빠져 있다가 갑 쪽과의 갈등, 가령 말도 안 되는 일로 갑이 억지를 부리거나 갑 쪽 담당자의 잘못을 을에게 덮어씌우거나 할 때에야 비로소 수면 위로 모습을 드러냈다. 이때의 그들의 역할이 어찌 보면 모든 것을 말해주었다.

내가 주로 겪었던 타입은 “너네가 능력껏 알아서 하라”며 자율성을 존중해주는 양 평소에도 실무에 개입을 안 하며 갑과 문제가 생겨도 좋게 좋게 ‘인간적으로’ 상황을 둥글게 처리하려는 나태한 하회탈 상사들이었다. 우리한테 못되게 굴면서 갑에게는 비굴한 ‘유사 갑’이라면 차라리 대놓고 욕이라도 할 수 있는데 이런 느물느물한 책임자는 사람 참 허탈하게 만들었다. 그렇다고 우리에겐 너그러우면서 갑에게는 맵고 혹독한 을의 책임자를 바라는 건 비현실적이다. 그런 ‘멋진’ 사람이 을 조직을 운영하다간 망하기 딱이다. 되레 내가 뿌듯함으로 기억하는 그 남자는 이랬다. 갑 못지않게 악마처럼 우리를 일로 들들 볶았지만 우리가 갑과 대치 하는 결정적인 순간에는 우리의 말을 전적으로 믿고 우리를 지키기 위해 자기 직책을 걸고 광고주를 상대로 감히 정면으로 으르렁 항의하며 반격했다. 상황이 받쳐주는 한 갑은 이름값도 못하고 결국엔 늘 을이 하기 나름이었다.

임경선 칼럼니스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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