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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중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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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김중혁의 메이드 인 공장 ⑦ 도자기 공장 (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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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있는 듯 움직이며
자연건조된 뒤
초벌과 재벌 거쳐 완성 공장 뒤뜰에
쌓여있는 불량품 조각들
가루로 분쇄해 매립
시간의 무덤이 여기구나 도자기 공장에 쓰여진 표어는 이런 내용이었다. ‘전사, 화공 능률 10% 향상으로 회사 발전, 나의 행복’. 표어 전문가의 눈으로 평가해 보건대 운이 좀 맞지 않는다. 표어란 하이쿠처럼 압축되어 딱 맞아떨어지는 맛인데, 이건 좀 늘어진다. ‘전사, 화공력 십퍼 향상, 회사 발전 나의 행복’쯤으로 줄여보는 게 어떨까. (농담입니다. 저 때문에 고치지 마세요!) 전사란 도자기에다 그림을 입히는 작업이다. 전사지 공장에서 전문가에게 물어봤다. “저, 전사지란 게 판박이랑 비슷한 겁니까?” “하하, 네, 뭐, 비슷하다고 할 수 있죠”라며 구체적인 설명을 해주셨지만 이하 생략, 아무튼 도자기에다 전사지를 붙인 다음 그걸 태워서 표면에 그림을 새기는 작업이다. 정확한 위치에다 전사지를 붙여야 하기 때문에 신입사원들은 하기 힘들고, 숙련공들이 맡아서 하는 일이다. 화공 작업이란 전사지를 이용하지 않고 화공들이 도자기에 직접 그림과 무늬를 그려 넣는 것이다. 파인차이나에는 전사지 작업이 많지만 본차이나와 고가의 도자기에는 화공 작업의 비율이 훨씬 높아진다. ‘전사, 화공 능률 10% 향상’이란 표어는 말 그대로 작업에 집중하고, 실수를 줄이자는 의미일 것이다. 저 말을 실천하기가 얼마나 힘든 일일지, 10%라는 수치의 정확함이 작업자에게는 얼마나 불투명한 목표일지 상상하기 힘들지만 회사도 발전하고 화공도 행복하길 진심으로 바랐다. 전사지를 붙이는 직원들의 집중력도 놀랍지만 도자기의 미세한 부위에다 선을 긋고, 물레 위를 도는 찻잔에 붓을 대고 절대 움직이지 않는 화공들의 집중력은 감탄스러웠다. 도대체 저기에서 10%를 더 향상한다는 게 말이 되나 싶었다. 화공들은 자신들을 예술가라고 생각하지 않겠지만 (물어보지 못했다) 자신의 작업에 자부심이 있을 것이다. 내가 포스터를 그리며 느꼈던 희열, 직선을 그을 때의 뿌듯함이 그들에게도 있지 않을까 싶었다. 그런 게 없다면 그 일을 계속할 수 없지 않을까. 커피잔에 정확하게 붓칠한 선을 볼 때면 찻잔 속에 그려진 그림을 보고 ‘참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순간이 올 때면 나는 화공들을 생각하게 될 것 같다. 어쩌면 거대한 도자기 공장이 한 장의 아름다운 포스터가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포스터 속에 표어와 그림이 함께 들어 있듯 도자기 공장 속에 예술과 기술이 공존하고 있었다. 기계가 만든 그릇에다 사람이 색을 입히는 곳, 틀에다 넣어 만든 주전자에 사람이 빚어 만든 손잡이를 붙이는 곳, 바람에 말리고 불로 달구어 강하게 만든 그릇에다 아름다운 그림을 입히는 곳, 사람과 기계와 자연이 하나가 되어 아름다운 실용을 창조하는 곳이 도자기 공장이었다. 이런 표현들이 과하다고 느낄지도 모르겠지만 도자기 공장에는 여느 공장과 다른, 느슨한 분위기가 있다. 그릇을 성형해서 완성된 제품으로 나오기까지 보통 일주일이 걸린다. 공장에서는 그 과정을 고스란히 볼 수 있다. 자동성형기와 정형기에서 나온 그릇들은 컨베이어 벨트를 거친 뒤 차곡차곡 쌓여 여섯 시간 동안의 자연건조 과정을 거친다. 그릇들은 천천히, 아주 천천히 움직인다. 운반대에 담긴 그릇들은 움직이지 않는 것처럼 움직이며 조금씩 건조된다. 그게 도자기의 시간이다. 건조가 끝난 그릇들은 1250~1300도의 가마에서 초벌구이를 거친다. 유약을 바른 뒤 다시 1100도로 재벌구이를 한다. 가마 안을 볼 수는 없지만 그 속에서 도자기는 강해진다. 그것도 도자기의 시간이다. 전사지를 붙인 다음 그림을 태우고, 화공들이 그림을 그려 넣는 것도 도자기의 시간이다. 그런 시간들이 공장 안을 천천히 배회하고 있다. 기계가 움직이고 무언가 계속 만들어지고 있지만 알 수 없는 여유 같은 게 있었다. 도자기 공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시간이었다. 공장 뒤뜰에 가면 불량품 도자기들이 깨진 채로 쌓여 있는 곳이 있다. 이를테면 도예가들이 ‘에잇, 이건 아니야’ 하고 망치로 깨버린 그릇들이 거기 모인 셈이다. 불량품들이 모인 곳이라곤 하지만 풍경은 장관이다. 하얗게 반짝이는 도자기 조각들을 멀리서 보면 아름답기까지 하다. 불량품들은 불에 들어갔다 나온 것들이다. 초벌구이 이전까지의 불량품들은 재생이 가능하지만 일단 불에 들어가고 나면 돌이킬 수 없다. 시간을 견디고 형태가 굳어진 뒤의 불량품들은 버려질 수밖에 없다. 불량품들은 가루로 분쇄한 뒤 매립한다. 한때 젖소뼈의 가루였던 도자기들은 다시 가루가 되어 땅에 묻힌다. 나는 그곳을 ‘시간의 무덤’이라 부르고 싶었다. 어쩌면 내 마음에도 저런 무덤이 있을 것이다. 놓친 시간들, 잘못 보낸 시간들이 부서진 채 반짝이고 있을 것이다. 공장에 들어가기 전에 생각했던 도자기와 들어갔다 온 후에 생각하는 도자기는, 완전히 다른 물질이었다. 김중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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