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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은 개성 있는 비문이 많아졌다. 비석엔 고인의 이야기를 적거나 가족들이 추모의 뜻을 담을 수도 있다. 가운데는 영화감독 고 박철수의 비석. 분당메모리얼파크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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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웰다잉’을 준비하는 사람들
엔딩노트 어떻게 써야 할까…사전의료의향서 법제화 움직임
임권택 감독의 <축제>(1996)는 한 노인을 떠나보내는 가족의 애도 과정을 그렸다. 이 세상에서 87년을 살다 간 치매 노인의 죽음을 둘러싸고 시어머니를 모셔온 주인공 소설가 이준섭(안성기)의 형수, 가출했다 돌아온 조카 용순(오정해), 취재를 하러 온 기자 장혜림(정경순) 등이 갈등을 빚다가 장례식을 치르며 결국 뜨겁게 화해하게 된다는 내용이다.
그러나 현실은 이런 어른들의 동화처럼 아름답지 않다. 본인이 생전 준비를 해놓지 않았을 때 유가족이 겪어야 할 혼돈과 갈등은 필연적이다. 자신의 존엄한 마지막과 가족을 배려하고 싶다면 미리 자신의 손으로 중요한 정리를 해두는 것이 필요하다.
먼저 해야 할 일은 죽음에 대한 가치관을 정립하는 것이다. 한국인들은 다른 나라 사람들에 견줘 죽음을 터부시하고 이에 대한 고민이 부족하다는 얘기가 나온다. 최근 <임종 준비>라는 책을 펴낸 이화여대 최준식 국제대학원 한국학과 교수는 “한국인들은 내세관이 없는 유교의 영향으로 죽음을 준비하려는 마음가짐이 부족하고, 정신보다 물질을 추구하는 경향이 강하다”며 “젊어서부터 죽음에 대해 공부하고 고민해야 삶을 어떻게 살아야 할지에 대해서도 알게 된다”고 말했다. 많은 이들이 죽음을 부정하고 회피하는 반응을 보이지만 몸이 건강할 때 ‘좋은 죽음’이란 어떤 것이며 어떻게 자신의 죽음을 맞이해야 할 것인가 생각해놓는 편이 좋다는 것이다.
정현채 서울대 의대 내과 교수는 “생사학이나 근사(임사)체험 등 죽음에 대한 임상연구는 이미 서구의 여러 나라 여러 병원들이 공동연구를 진행해 최고권위의 의학 학술지에 논문을 게재할 정도로 과학적으로도 입증되고 있다. 죽음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삶의 일부이기 때문에 이를 ‘마지막 기회’로 삼고 영적인 성숙을 추구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정 교수는 가장 기본적인 단계인 유언을 작성할 때 “세속적인 것에는 미리 신경을 꺼버리고, 남은 사람들에게 ‘고맙다, 용서한다, 용서해달라’는 얘기를 남기는 것이 필수”라고 권했다. 원한이 있거나 감정싸움을 해왔다면 부정적인 인간관계를 만나서 풀고, 감상에 젖지 말고 담담하게 지난날을 바라보는 마음가짐이 좋다. 시각장애인으로 미국 백악관 국가장애위원회 정책차관보를 지낸 고 강영우 박사의 작별은 참조할 만한 사례다. 그는 2011년 12월 투병중 지인들에게 연하장으로 임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점을 밝히고 “여러분으로 인해 저의 삶이 더욱 사랑으로 충만하였고, 은혜로웠다”며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의료인, 장례 전문가, 종교학자, 호스피스실 간호사, 철학자 등이 함께 제정한 <한국인의 웰다잉 가이드라인>(한국죽음학회)을 보면, 병이나 사고로 다시 건강을 찾을 수 없게 돼 수개월 안에 사망이 예상되는 경우 꼭 유언장을 쓰도록 권유한다. 법적인 유언장은 자필로 쓸 때 공증 절차 없이도 효력을 가지며, 회사나 단체 등에 관한 유언을 남기려면 공증을 해야 한다. 그 안에는 내용, 날짜, 주소, 성명, 날인까지 다섯가지가 반드시 필요하다. 타인이 대필하거나 컴퓨터로 작성해 출력하면 효력이 없다. 내용은 시신이나 장기 기증 여부, 유산상속, 금융정보 등으로 한다.
법적 효력에 큰 의미를 두지 않는다면 ‘엔딩노트’ 같은 자유로운 형식도 가능하다. 집이나 병원 등 원하는 임종 장소나 본인이 의식을 잃었을 때 실행을 부탁하고 싶은 일, 집행을 맡을 사람, 예산 등 꼼꼼할수록 좋다. 임종 직전까지 힘든 육체적·정신적 과정이 남아 있기 때문에 그때 도움이 될 만한 음악이나 독송을 들려달라고 써놓는 것도 좋다. 가는 길을 방해받고 싶지 않다면 큰 소리로 슬퍼하거나 몸을 흔들지 말아달라고 부탁할 수도 있다. 전문가들은 부음을 알릴 사람들의 범위, 이름, 연락처, 매장·화장 등 장례 방식, 비석 설치 여부, 제사나 추모 형식 등을 함께 밝힐 것도 권한다.
지난 1일 출범한 ‘한국 1인가구연합’(singlesunion.or.kr)은 가족이 곁에 없는 사람들을 위한 후견 지원, 임종기 보살핌 등 무연사(연고가 없는 죽음) 방지 운동을 벌이고 있다. 만 45살 이상 65살 미만의 홀로 사는 사람들을 주요 대상으로 하고, 회원이 되면 장례 방식, 장지, 공부 정리, 유품 처리, 영정사진과 신변 정리를 위한 ‘엔딩노트’와 유산을 위주로 한 유언장 작성을 할 때 변호사들의 법률 지원을 받을 수 있다.
또 최근 중요하게 떠오르는 것이 사전의료의향서다. 의식불명 상태에 들어가 의견을 개진할 수 없을 때 평소 환자의 뜻을 존중해 연명치료 등 의학적 처치를 해달라고 당부하는 서류다. 아직 제도화 전이라 법적인 효력은 없다. 그러나 올 1월 서울대학교병원 김범석·윤영호·허대석 교수팀이 전국 17개 병원 암환자들과 가족, 전문의, 일반인 3840명을 대상으로 설문조사해 발표한 것을 보면, 암환자 93%, 가족의 92.9%, 암전문의의 96.7%, 일반인 94.9%가 사전의료의향서의 필요성에 대해 공감하는 것으로 나타났다. 대통령 소속 국가생명윤리심의위원회 산하 특별위원회가 ‘환자의 연명치료 자기결정에 대한 권고안’을 마련하면서 법제화도 속도를 내고 있다. 적잖은 논란이 예상되지만 머잖은 미래에 의료 현장에서도 긍정적으로 활용될 가능성이 크다. 사전의료의향서 실천모임 남궁명 사무국장은 “담당 의사에게 ‘의무기록부에 사전의료의향서를 첨부해달라’고 부탁해야 한다”고 말했다. 실천모임은 전화 상담(02-2281-2670) 뒤 의향서를 우편송부해준다. 법적 양식이 정해져 있는 것은 아니기 때문에 인터넷에서 ‘사전의료의향서 양식’을 검색한 뒤 내려받아 사용해도 된다.
온라인 디지털 콘텐츠의 ‘잊혀질 권리’를 위해 계정을 없애고 싶다면 구글의 경우 생전의 본인, 싸이월드는 상속인이 요청할 수 있다. 페이스북은 유족이나 유언 집행자가 계정을 삭제요청할 수 있도록 했다. 인터넷에서 ‘잊혀질 권리’가 법제화되지 않는 이상 가장 좋은 방법은 생전 본인이 계정 삭제를 하는 것이다.
참고자료: <한국인의 웰다잉 가이드라인>(한국죽음학회, 대화문화아카데미), <임종 준비>(최준식, 모시는 사람들), <의미있는 삶 아름다운 마무리>(창간호, 한림대 생사학연구소)
글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사진 분당메모리얼파크 제공
>>> 이런 비문은 어때요? ‘쉿! 깰라’ 수목장을 하거나 납골당에 안치되거나 매장을 하거나 이 세상에 마지막 한마디쯤 남기고 싶다면 어떤 문구가 좋을까? 작가 조지 버나드 쇼는 자신의 묘비명으로 ‘우물쭈물하다가 내 이럴 줄 알았다’라는 명언을 남겼다. 영화인 고 박철수 감독 비문엔 ‘바람이 분다, 모여라!’, 가객 김현식씨의 추모비엔 ‘비가 내리고 음악이 흐르면 난 당신을 생각합니다’라는 글귀가 새겨져 있다. 그밖에도 분당메모리얼파크 공원묘역엔 ‘여기도 참 좋다’, ‘아름다운 이 세상 잘 다녀갑니다’, ‘지구별에서의 아름다운 인연을 추억합니다’, ‘산은 산이요 물은 물이로다’, ‘아름다운 이 세상 소풍 끝내는 날 가서 아름다웠더라고 말하리라’ 등의 개성 있는 비문이 많다. 이곳에선 본인이나 유족이 직접 비문을 쓰거나 참조할 수 있도록 다양한 문구를 제공하고 있다. 코미디언 김미화씨는 ‘웃기고 자빠졌네’라는 비문을 택하고 싶다고 밝힌 바 있다. ‘촛불 사회자’ ‘국민 사회자’로 유명한 최광기씨는 “큰일이 있을 때마다 늘 사람들의 함성과 함께하다 보니 내가 잠에서 깬다면 그건 세상이 시끄럽다는 증거일 터, 내 비문에는 ‘쉿! 깰라’라고 쓰고 싶다”고 했다. 사진가 임종진씨는 “서투른 여유의 삶, 그저 이렇게 살다 간다”라는 잔잔한 비문을 선택했다. 대전 사랑의 교회 김완수 목사는 “놀이터에선 노는 게야!”를, 마포 민중의 집 최현숙 운영위원은 “가부장과 액취증은 덫이자 축복이었다”라는 말을 남기고 싶다고 했다. 최 위원은 “어린 시절 나에겐 가부장적인 아버지에게서 유전된 액취증이 큰 상처였지만 돌아보니 사회적으로 낙인찍히고 외면당하는 사람들에 대한 관심을 갖는 출발이 됐다”고 그 이유를 밝혔다. 이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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