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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러스트레이션 김중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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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김중혁의 메이드 인 공장 ⑪ 화장품 공장 (상)
들을 때마다 묘하게 마음이 설레는 단어가 있다. ‘방판’. 이른바 방문판매다. 쇼핑의 참다운 맛은 가게를 ‘방문하여 구매하는’ 이른바 ‘방구’지만(신조어임, 이런 말 없음) 정반대로 누군가 우리 집을 방문하여 물건을 판매한다는 상상을 하면 (누가 올까, 어떤 물건을 가지고 올까, 어떤 선물을 받을 수 있을까) 가슴이 뛴다. 한때 그런 농담도 자주 했다. ‘소설도 방문판매하면 괜찮지 않을까?’ 내 소설들을 가방에 넣어서 직접 판매하러 가는 거다. 고객의 취향에 따라 내 소설 중 한 권(혹은 여러 권)을 추천해주고, 소설을 쓰던 순간들의 짤막한 이야기도 들려주고, 연필 같은 것도 한 자루씩 선물로 주는 거다. 그리고 방판의 진정한 묘미, 다른 소설가들의 미리보기 샘플 책도 한 권씩 끼워준다. 아, 생각만 해도 (일단 가야 하는 입장에선 귀찮긴 하지만) 책을 사는 사람의 기쁨이 느껴진다. 일단 방문판매가 가능하려면 책 가격의 상향 조정이 필요하므로 도저히 시도해볼 수 없는 판매 방식이지만(책 한 권 팔아봤자 차비도 안 나옵니다!) 언젠가 신간 출간 이벤트 때 해보면 재미있을 것 같다.(그나저나, 작가가 직접 찾아오면 좀 부담스러우려나.)
‘방문판매’ 하면 어린 시절의 화장품 아주머니가 떠오른다. 많은 사람들이 그럴 것이다. 화장을 곱게 한 아주머니가 큰 가방을 들고, 혹은 자전거 뒤에 큰 가방을 싣고 골목길로 들어오는 모습이 떠오를 것이다. 방판 아주머니는 어머니보다 훨씬 예쁘고 세련됐다. 아주머니는 어머니에게 인사를 한 다음 커다란 가방을 열어서 마법의 제품들을 하나씩 선보였다. 자세한 제품명은 당연히 기억나지 않고, 어떤 종류의 화장품이었는지도 기억나지 않지만 화장품 아주머니의 ‘분 냄새’와 아주머니가 건네준 (아마도 ‘미제’였을 것만 같은) 초콜릿은 지금도 기억에 선명하다. 어머니는 그 시절을 이렇게 회상했다.
“화장품을 얼굴에 발라주기도 하고, 마사지도 해주는데, 그런 건 비싼 거 사야지 해줘. 나는 영양크림 같은 것밖에 안 샀으니까 미안하지. 그 아줌마들은 꼭 외상장부를 들고 다녔어. 외상을 해주면 다음에 또 와야 하고, 또 오면 뭐라도 하나 팔게 돼 있으니까. 신기한 게, 화장품 똑 떨어질 때면 아줌마들이 나타난다니까.”
컬러텔레비전이 보급되면서 한국에도 색조화장이 널리 유행했지만 어머니는 얼굴에 색을 입힐 시간이 없었다. 일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어머니는 얼굴에 한가득 영양크림만 바를 뿐이었다.
화장품은 내게 세련의 상징이며 욕망의 대상이며 계급의 꼬리표처럼 느껴졌다. 나에게 화장품은 세상을 양분하는 손쉬운 기준이기도 했다. 세상에는 화장을 하는 사람과 화장을 할 필요가 없는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 또는 화장을 매일 하는 사람과 아주 가끔 큰 행사가 있을 때만 화장을 하는 사람으로 나눌 수 있다. 어릴 때는 대체로 세상을 이등분해보고 싶어한다. 저기 아니면 여기, 서울 아니면 지방, 화장품 아주머니 아니면 어머니, 부자 아니면 가난뱅이.
이제는 누구나 화장을 한다. 많은 사람들이 어떻게 하면 자신의 얼굴이 더 예쁘게 보일지 고민한다. 화장품을 계급의 꼬리표처럼 느끼는 건 촌스러운 일이 됐다. 그런데도, 나는 화장품이 단순한 화장품처럼 보이질 않는다. 그 속에는 뭔가가 있다. 첨가 성분의 비율만으로 가늠할 수 없는 뭔가가 있다. 그게 뭔지 궁금해서 화장품 공장을 찾았다.
‘메이드 인 공장’ 기획을 몇 년만 일찍 했더라도 내 고향의 공장을 소개할 뻔했다. 지금은 경기도 오산으로 옮긴 이 공장은 2011년까지만 해도 내 고향 경북 김천에 있었다. 어릴 때부터 공장 이름을 들으며 자랐기 때문에 낯설지 않았다. 어쩌면 내가 다니게 됐을지도 모를 공장이었고, 친구들이나 부모님 친구들의 자녀들이 다녔을 공장이었고, 지금도 아는 사람이 한 명쯤 있을지도 모르는 공장이었다. 화장품 공장에 들어갔을 때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대부분의 직원들이 여성이라는 점이다. 공장이 김천에 있었더라도 내가 다니긴 힘들었겠다.(공장을 견학하던 도중, 설명해주시던 분이 김천 출신의 직원에게 ‘이분이 김천 출신의 소설가야’라며 나를 소개하는 통에 등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직원분은 “아, 예” 하며 건성으로 인사를 했다. 일하시는 데 귀찮게 해드려 무척 죄송합니다.)
개화기 이후 화장이라는 말을 쓰기 전에는 ‘단장’이라는 표현을 사용했던 모양이다. 개인적으로 단장이라는 말이 조금 더 예쁘지만, 단장보다는 화장이라는 단어가 좀더 적확한 것 같기도 하다. 자신을 꾸미고 돋보이게 하려는 목적이 ‘단장’이라면, 내가 꿈꾸던 외모로 변화하게 만드는 것이 ‘화장’인지도 모르겠다. 화장이란 변화하는 것이고, 바뀌는 것이니까 말이다. 화장을 통해서 새로운 사람으로 거듭나기도 하고(누, 누구세요?) 화장을 통해서 자신이 어떤 사람인지 정확하게 알려주기도 하고(투명 화장을 한 당신은, 투명한 사람이로군요.) 화장을 지우고 나면 자신으로 되돌아오기도 하는(다시 한번 누, 누구세요?) 것이다.
화장품 공장에 들어섰을 때 기계가 돌아가는 굉음을 들으면서, 수많은 향과 색이 어우러져 있는 풍경을 보면서, 이곳은 ‘현대의 무기 공장’ 같은 곳인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저처럼 얼굴이 무기인 사람도 있지만) 많은 사람들은 이곳의 화장품을 무기로 사용하는 것인지도 모르겠다. 누군가를 파괴하는 무기가 아니라 상대방의 공격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주는 무기. 얼굴에 두드려 흡수시키고, 얼굴에 연필로 그리고, 또 크림을 찍어 바르며 그렇게 아침마다 무기를 장착한 다음 새로운 인간으로 변하여 사람들을 만나고, 일을 하고, 혼나고, 혼내고, 울고 웃다가 집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화장을 지우고 나서야 감정의 전쟁터에서 겨우 벗어나는 셈이다.
화장품 공장의 가장 특이한 점은 모든 벽이 하얀색으로 칠해져 있다는 것이다. 병원 같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하얀 벽 앞에는 (회사 대표님이 워낙 미술에 관심이 높은 탓에) 유명 아티스트들의 작품들을 설치해두었고, 천장을 뚫어서 자연채광을 할 수 있게 했다. 화사하고 근사하다. 왜 하얀색으로 벽을 칠했는지 알 것 같았다. 하얀색은 처음의 색이다. 색 이전의 색이고, 색 이후의 색이고, 모든 색이다. 하얀색은 화장의 시작점이기도 하지만 모든 화장을 지우고 난 뒤 감정의 전쟁터에서 벗어난 휴식의 색이기도 한 셈이다.
화장품 공장의 구조는 (생긴 모습을 무시하고 내 마음대로 설명하자면) 비행기처럼 되어 있다. 새가 좌우의 날개로 난다면 화장품 공장은 (로션과 스킨 같은) 기본 화장품과 (파운데이션이나 립스틱 등등의) 색조 화장품이라는 두 개의 날개로 날아간다. 양쪽에서 만들어진 제품이 가운데로 모인 다음 다른 세상으로 날아간다. 기본 화장품과 색조 화장품은 제조 방식이 완전히 다르기 때문에 서로 오염될 수 있는 여지를 완전히 없애기 위해 아예 공장 자체를 분리시켜놓은 것이다. 언뜻 보면 두 개의 작업장이 대칭처럼 보인다. 원료를 칭량(저울로 무게를 다는 일)하고 내용물을 제조한 다음 용기에 투입하는 작업이 거의 비슷하다. 하지만 거의 비슷해 보이는 두 작업장에는 차이점이 몇 개 있었다. 차이점에 대해서는 다음 시간에.
※취재 협조해주신 아모레퍼시픽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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