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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난 7월19일 핀란드 북부 라플란드주의 켓케 지역 백야 트레킹(백야 사파리) 때 만난 자정의 저녁노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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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커버스토리핀란드 백야 트레킹과 산타마을 여행
겨울철 북극권 여행의 하이라이트가 오로라라면 여름의 북극권에서는 기이하고 신비로운 백야가 펼쳐진다. 내려올 생각 없는 햇빛 아래서 자작나무 숲을 걷다보면 야생 순록이나 울버린과 눈이 마주칠 수도 있다. 한여름의 산타마을도 놓칠 수 없는 재미다.
누군가 “한밤중에 해 보셨느냐”고 농담 삼아 물었다. 해 봤다. 저녁 내내 기다려도 해가 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걸어도 걸어도 저녁이요, 마셔도 마셔도 저녁인 회색빛 시간. 해가 언제 떠서 언제 지느냐는 질문은 우문이었다. 새벽 2시 무렵부터 구름 깔린 지평선 위로 밝아오기 시작한 하루는, 종일 깊고 푸른 창공을 날며 지상에 긴 그림자들을 만들어내다가, 자정 무렵에야 ‘얕고 희끄무레한 어둠’ 속으로 잦아들었다. 사실상 밤은 없었다. 그렇다. 이번 여행의 주제는 저물다 말고 다시 시작되는 한낮 ‘백야’다. 아닌 밤중에 빛나는 해를 보기 위해 거리와 산길을 떠돌고 왔다.
핀란드 북부 라플란드주의 소도시 로바니에미. 북극권에 속해 한여름이면 종일 낮이 이어지는 백야를 만날 수 있는 고장이다. ‘백야’를 온몸으로 느끼며 광활한 라플란드 고원지대를 걸어서 탐방하는 ‘백야 트레킹’(백야 사파리)을 즐겼다. 하얀 밤길을 걸어, 자정 무렵 지평선을 붉게 물들이며 잦아드는 해넘이를 감상하고 돌아오는 2시간짜리 코스. 이 한밤 트레킹에 ‘미드나이트 선 페스티벌’이란 거창한 이름을 붙였다. 출발 전에 간식과 음료가 제공되고, 숲길에선 통나무집에서 소시지 구워 먹기 등 체험이 곁들여진, 여름에만 축제처럼 진행되는 프로그램이다.
저녁 해도 뉘엿뉘엿, 한밤중 해도 뉘엿뉘엿
아직 한낮처럼 밝은 밤 9시, 로바니에미에서 버스를 타고 포장·비포장길을 1시간 가까이 달려 도착한 켓케 지역의 ‘네이처 센터’. 사파리 가이드 벨리는 “라플란드 일대에선 여름철 긴 낮시간을 이용해 갈색곰·무스·순록 등 야생 생태탐방과 낚시·보트·산악자전거 등 다양한 투어를 즐길 수 있다”고 말했다. 특히 켓케 지역은 스칸디나비아에서 무스 사파리가 진행되는 유일한 곳이라고 한다. 운 좋으면 사슴과 중에서 가장 몸집이 크다는 무스(엘크)와 순록도 만날 수 있다는 말에, 카메라 렌즈를 다시 닦고, 방충망 달린 모자를 단단히 여며 썼다.(모기떼가 극성이어서 방충망 모자는 필수!)
소나무와 자작나무 빽빽한 숲길을 따라 걸으며 가이드가 가리키는 블루베리 등 식용 열매들과 큼직한 식용 버섯들을 살펴봤다. 앞서 걷던 가이드가 멈춰서며 땅바닥을 살폈다. “봐라. 무스 배설물이다.” 큼직한 ‘줄줄이 소시지’를 닮은 무스의 배설물이 한 무더기 쌓여 있었다. 당장이라도 자작나무 사이에서 커다란 뿔을 단 무스가 나타날 듯했다. 하지만 조심스레 걷고 또 걸어도 끝내 무스도 순록도 모습을 드러내지 않았다.
새벽 2시면 동트는 핀란드 라플란드 밤 9시에 출발해 무스·순록
생태탐방하는 백야 트레킹
알바르 알토가 설계한 로바니에미
근교의 산타마을로 인기 가이드가 다시 멈춰서더니 중요한 동물을 발견한 듯 쪼그려 앉았다. “이걸 좀 봐라!” 그는 신기하지 않으냐는 표정으로 분주히 움직이는 개미떼를 가리켰다. “…” “혹시, 너희 나라에도 개미 많으냐?” “물론.” “음, 그럼 됐다.” 이로써 이번 사파리에서 무스는커녕 개미 한 마리 못 봤다고 말할 수는 없게 되었다. 숲길이 끝나자 돌무더기 깔린 너덜지대가 시작됐다. 통나무를 깎아 깔아놓은 탐방로를 따라 언덕 위로 오르자, 전후좌우가 탁 트인 평원이 펼쳐졌다. 이끼 낀 돌들이 빼곡히 들어찬 광활한 너덜지대다. 1만년 전 2㎞ 두께의 빙하로 덮여 있던 지역인데, 빙하가 녹아 이동하며 만들어낸 지형이라고 한다. 평균 해발 180여m로, 깊이 50m에 이르는 돌밭이 5㎞가량 펼쳐져 있다. 당시 빙하에 눌려 있던 땅은 빙하가 사라진 뒤 융기하고 있는데, 지금도 해마다 1㎝씩 지대가 높아지고 있다고 한다. 자정 무렵에 만난 신비로운 저녁노을 너덜지대 한켠에 만들어진 나무데크 쉼터에 앉자, 뿔 달린 무스보다도 반갑고, 갈색 곰을 만난 것보다도 놀라운 풍경이 눈앞에 펼쳐졌다. 거칠 것 없이 내달리는 평원과 하늘 한쪽에 물결치듯 모습을 드러낸 자정의 저녁노을. 하얀 밤, 붉은 노을은 정말 아름다우면서도 한편으론 낯설었다. 수상쩍고 기이하고 신비로운 느낌, 어디선가 늑대 울음소리라도 들려올 듯한 분위기다. “이곳 지명이 원주민 말로 ‘켓케’다. 켓케란 울버린(족제비과의 육식동물)을 가리킨다. 울버린은 매우 사납다. 순록 등을 공격해 잡아먹는다.” 낮도 밤도 아닌 회색빛 시간, 가이드는 곧 뭔가 나타나기라도 할 듯한 분위기를 부추겼다. 제발 뭔가 좀 나타나주기를 기대했지만, 통나무집에서 장작난로에 소시지를 구워 먹고, 나무데크 쉼터에서 샴페인을 마신 뒤 다시 숲길을 걸어 내려올 때까지 아무것도 나타나지 않았다. 왕복 3㎞, 2시간의 트레킹을 마치고 버스에 몸을 실으니, 창밖은 여전히 낮도 밤도 아닌 희끄무레한 저녁의 연장이다. 야생동물 한 마리 못 만났다는 아쉬움 대신, 광활한 돌밭에서 마주친 저녁노을의 감동이 비몽사몽의 눈가에 금물결처럼 눈부시게 밀려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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로바니에미 근교 산타마을의 산타클로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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