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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전국에서 모인 68명의 맞춤양복 전문가들이 양복명장을 가리는 경진대회에서 열띤 경연을 펼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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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스타일
평균 경력 35년 장인들 모여 실력 겨룬 맞춤양복 소상공인기능경진대회 현장
세계주문양복연맹 총회 부대행사
이틀 동안 싱글 양복 재킷 뚝딱
경력 42년 60대 장인 우승
젊은 테일러들과 소통 부족은 아쉬워
호텔의 커다란 콘퍼런스룸에 70개의 재단 테이블이 놓이고, 흰 와이셔츠에 넥타이를 맨 중년의 신사들이 각자 테이블에 작업등을 켰다. 경기 시작을 알리자, 참가자들은 저마다 원단에 옷본을 대고 초크로 재빠르게 새하얀 선을 그렸다. 재단 가위가 사각사각 소리를 내며 거침없이 지나갈 때마다 100% 울 원단이 섬세하게 잘려나갔다.
지난 7일 오전 중소기업청이 주최하고 소상공인진흥원이 주관해 ㈔한국맞춤양복협회에서 시행한 제1회 맞춤양복 소상공인 기능경진대회가 열렸다. 지난 6~8일 우리나라를 포함해 세계 23개국 600여명의 맞춤양복 전문가들이 참가한 제35차 세계주문양복연맹 총회 부대행사의 하나로, 가장 눈길을 끌었던 자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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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 30시간 동안 진행해 가봉까지 완성한 결과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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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대회는 ‘한국 테일러’들의 위상을 나라 안팎에 선보이려고 마련한 것이다. 국내 주문양복 사업자등록증 소지자로서 전국에서 평균 경력 35년 이상의 양복기술을 보유한 68명의 참가자들이 모여 7일 오전부터 8일 오후까지 30시간 동안 그 자리에서 양복을 만드는 열띤 경연을 펼쳤다. 참가자들은 먼저 한 사람씩 밀실에 들어가 한 사람의 모델을 두고 채촌(몸치수를 재는 일)을 한 뒤 다음날 오후까지 싱글 양복 재킷 가봉을 완료하는 과제를 받았다.
총회 조직위원장인 ㈔한국남성패션문화협회 박인호 회장은 “참가자들에게 같은 조건을 만들어주기 위해 보이지 않는 곳에서 한 사람씩 채촌하도록 했다. 워낙 실력자들이라 눈대중만으로도 모델의 실루엣을 짐작할 수 있기 때문에 미리 채촌하는 사람이 나중에 하는 사람보다 불리해지지 않도록 한 것”이라고 설명했다.
‘선수들’에겐 줄무늬가 들어간 캐시미어 포함 100% 울 고급지 원단이 주어졌다. 무늬가 들어간 원단이라야 실루엣을 보기 쉽기 때문이다. 경연을 마친 참가자들은 가봉 의상을 모델에게 입힌 뒤 심사위원들 앞에서 자신이 만든 옷의 장점과 단점을 선보였다. 근육과 뼈가 있고 숨을 쉬는 사람의 몸에 착장한 옷은 편안함과 실루엣에서 마네킹에 입힌 옷과 확실하게 차이가 드러난다. 박 회장은 “양복을 어느 정도 배우기만 하면 마네킹 정도엔 옷을 해 입힐 수 있지만, 사람이 입는 옷은 움직임을 배려해야 하고 섬세함이 요구돼 실력자가 아니면 만들기 힘들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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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 입상작들. 가운데 슬림한 허리라인이 돋보이는 작품이 대상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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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가자 가운데 가장 눈을 끈 이는 최고령자인 김진성(78·인천 중구 용동 도성양복점 대표)씨였다. 그는 명장 심사위원을 지낸 한국 양복계의 원로로서 “한국 양복업계의 진가를 보여달라”는 주변의 요청에 팔순을 바라보는 나이에도 팔을 걷어붙였다. 김씨는 “우리 양복 기술은 세계에서도 상위 수준이다. 외국인들에게 우리의 고급 기술을 보여주겠다는 자부심을 갖고 나왔다”고 했다. 그는 20살 때부터 양복을 배우기 시작해 중공업회사 공채로 들어가 7년을 근무하다가 가게를 열고 다시 양복인이 됐다. 황해도 옹진 태생으로, 가족과 헤어진 뒤 6·25 전쟁과 5·16을 겪으며 양복 기술을 익혔다. 한국의 오래된 ‘테일러’(양복인)들은 대개 이런 인생의 부침 속에서 고독하게 기술을 연마해 지금에 이르렀다는 이들이 많다.
대상을 받은 이교국(66·서울 성동구 마장동 백만불양복점)씨도 양복을 배운 지 42년이 되는 경력자로, 패션복장학원을 다닌 정통 재단사 출신이다. 그는 “봉제 쪽에 좀더 신경을 많이 써서 입는 사람의 체형과 스타일을 생각하면서 재단했고, 날씬하게 보이고 허리선이 강조되도록 타이트하게 만들었는데 그게 좋은 평가를 받은 것 같다”고 말했다. 최우수상을 받은 임재현(64·대구 중구 대신동 해성라사, 경력 41년)씨는 지방 소상공인들에 대한 관심을 힘주어 말했다. 임씨는 “1980년대 경제성장기에는 지방 양복장인들이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지만, 우리들은 요즘 열악한 상황에서 매우 외로운 투쟁을 하고 있다. 아무리 열심히 해도 기성복처럼 브랜드로 만들기 어렵고, 서울처럼 외국인들이 일부러 찾아주는 것도 아니라 고전하고 있다. 지방의 이런 환경 개선을 위해 많은 지원과 배려가 필요하다”고 했다. 그밖에도 김환수(61·서울 중구 소공동 아일랜드 콜렉션)씨가 명장의 반열에 함께 이름을 올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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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 패션쇼 출품 의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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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계주문양복연맹 총회는 맞춤양복인들의 기술과 패션 정보를 교류하기 위해 만들어진 행사로, 2년에 한번씩 회원국에서 연다. 1910년 벨기에 브뤼셀에서 1차 총회가 열렸고, 한국은 1991년 개최 뒤 이번이 두번째다. 개최국 대표 디자이너들의 작품들을 선보이는 연맹 총회의 관례에 따라 이번 행사에선 앙드레 김 패션쇼, 박술녀 한복패션쇼, 정경옥 웨딩쇼 등 화려한 볼거리도 여럿 마련해 찬사를 받았다.
그러나 문제점도 적지 않았다. 준비기간이 짧고 행사장이 어수선해 참여자들이 우왕좌왕하는 경우가 적잖이 발견됐으며, 행사 시간이 밀리거나 강연장 통제가 원활하게 안 된 탓에 연설을 제대로 들을 수 없어 관객들의 불만이 터져나왔다. 무엇보다 모처럼 맞춤양복의 새 장을 열어가고 있는 젊은 테일러들을 위한 자리가 부족했다. 한 젊은 테일러는 “어렵게 양복을 배운 선배들의 경험과 기술을 존중하지만, 그들과 소통할 수 있는 프로그램이 있었다면 더 좋았을 것 같다”고 했다. 다른 참가자는 “유럽에서 온 장인의 이야기를 듣고 싶었지만 준비가 허술하고 행사장이 어수선해 도중에 나와야만 했다. 우리들로서는 배우고 익힐 만한 기회가 적어 아쉬웠다”고 말했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사진 한국맞춤양복협회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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앤드루 램루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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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든 장인들이 젊은 테일러와 기술을 공유해야죠”
영국 ‘새빌로’ 명장 앤드루 램루프
“옷 산업은 여전히 인류에게 가장 중요한 산업입니다. 테일러들의 노동력을 인정하고 대가를 높게 지급해야 합니다. ”
‘영국 신사’를 낳은 것으로 유명한 런던의 고급 양복점 거리 ‘새빌로’ 장인이 한국에 왔다. 앤드루 램루프(60)는 지난 7일 세계주문양복연맹 총회에서 세계 주문양복의 미래에 대한 강연자로 나선 양복 장인이다. 그는 새빌로의 고급 양복점 가운데서도 이름난 모리스 세드웰사의 수석 장인이자 디렉터로, 영국 여왕의 훈장을 받기도 했다. 13살 때부터 봉제를 배우기 시작했고, 지금은 세계 이름난 배우·정치인들이 그의 옷을 즐겨 입는다.
“장인들의 고령화 등 영국 양복 시장에도 도전이 많습니다. 하지만 오랜 시간 기다려 맞춤옷을 만들어 입는 수요가 여전해요. 내 신념은 ‘배운 사람’으로서 기술을 공유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후세 교육에 힘쓴다면 우리 일의 가치를 더욱 높일 수 있지요.”
2008년 그가 만든 ‘새빌로 아카데미’는 세계 여러 나라 학생들을 테일러로 양성하는 유명 복장 학원이다. 1년6개월간 견습생으로 충분히 배우고 실제 현장에서 적용할 수 있도록 했다. 그는 ‘교사’로서 볼 때 젊은 테일러들의 교육과 지원이 절실하다며 “영국을 비롯한 많은 나라의 젊은 테일러들이 혼돈스러워한다. 한국도 전문기술을 전수하는 프로그램과 단체가 필요하고, 정부 지원이 뒤따른다면 문제를 극복할 수 있을 것”이라고 말했다. 본인 또한 평생 이어온 바느질을 여전히 좋아하는 장인으로서 자부심을 보여주었다.
“요즘도 양복을 짓느냐고요? 물론이죠. 그건 화가에게 아직 그림을 그리느냐는 질문과 같은 것입니다. 제가 입은 이 양복도 직접 바느질해서 만든 것입니다. 멋지지 않나요?”
이유진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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