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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09.25 18:43 수정 : 2013.09.26 09:07

콘돔을 제작할 때 쓰이는 유리 몰드의 모습. / 일러스트레이션 김중혁

[매거진 esc] 김중혁의 메이드 인 공장 ⑮ 콘돔 제작 공장 (상)

플라스틱 바가지 공장이라면
불량품이 생겨봤댔자
바꿔주면 그만이다
하지만 콘돔은 사정이 다르다
극단적으로 생각하면
불량품 하나에 아이 한 명이다

콘돔을 생각하면 떠오르는 명장면이 하나 있다. 이명세 감독의 영화 <나의 사랑 나의 신부>에서 박중훈은 마스크를 쓰고 약국에 들어와 중얼거린다. “저어기, 콘, 콘….” 박중훈을 위아래로 훑어보던 약사가 묻는다. “콘택600 드려요?” 박중훈은 계속 ‘콘’이라는 글자만 반복한다. 약사가 다시 묻는다. “콘택트렌즈요?” 박중훈은 결국 ‘콘돔’이라는 단어를 꺼내지 못하고 밖으로 나갔다가 다시 들어와 소리 지른다. “콘돔 하나 주세요.”

<나의 사랑 나의 신부>가 1990년 영화이니 20년도 넘은 일이다. 영화 속 장면 말고도 그 시절엔 콘돔에 관한 농담이 많았다. ‘콘택600’이라고 해야 할 걸 ‘콘돔600’이라고 말해서 약국을 발칵 뒤집어 놓았(다가, 콘돔600이면 발기가 12시간 지속되느냐는 음담이 곁들여지며 한번 더 약국이 뒤집어졌)다는 일화도 있었고, ‘콘도에 놀러 가자’라고 해야 할 걸 ‘콘돔 가자’라고 했다가 여자친구에게 뺨을 맞았다는 (믿거나 말거나 한) 일화도 있었다. 모두 ‘콘돔이라는 금기어’ 때문에 생긴 일들이다. 그깟 콘돔이 대체 뭐라고 콘돔을 콘돔이라 부르지 못하는가 말이다.

그사이 세상은 많이 바뀌었다. 텔레비전에서 콘돔 광고를 절찬리에 방송중이고, 다양한 종류의 콘돔을 파는 가게도 생겼다. 콘돔이라는 단어를 발음하는 건 여전히 조금 민망하지만 콘돔은 우리 주위에 널려 있다. 앞으로 2회에 걸쳐 콘돔이라는 단어를 수도 없이 보게 될 테니 미리 마음 단단히 잡수시길 바란다. 콘돔의 일상화를 위해 모두 함께 입 밖으로 콘돔 3회 복창하고 시작하겠다. 콘돔, 콘돔, 콘돔. 거, 뒤쪽에 계신 분들, 중얼거리지 말고 크게 소리치세요. 콘돔, 콘돔, 콘돔.

콘돔 공장을 보고 싶다는 생각은 내 머리에서 시작된 게 아니었다. 지난번 초콜릿 공장에 갔을 때 취재를 끝내고 한담을 나누고 있을 때였다. 초콜릿 공장을 설명해 주던 남자 직원에게 ‘어떤 공장에 가보고 싶냐’는 질문을 했더니 ‘콘돔 공장’이라는 답변이 곧바로 나왔다. 듣는 순간 나 역시 궁금해졌다. 콘돔이 산처럼 쌓여 있는 장면을 곧장 상상해 보았다. 상상하기 힘들었다. 콘돔은 어떤 모양으로 쌓여 있을까. 포장된 채 쌓여 있을까, 아니면 추욱 늘어난 채 쌓여 있을까, 아니면 흠흠, 그것이 뭐랄까, 도르르 말린 채로 쌓여 있을까, 나도 모르게 막 상상을 하게 되는데 상상이 잘 안되는 풍경이었다. 아이디어를 내준 초콜릿 담당자에게 고맙다는 인사를 전한다. 초콜릿 담당자는 시간이 나면 같이 가고 싶다고 했지만(흠, 진심이었을까?), 잘 알지도 못하는 처지에 “저기, 이번 금요일에 콘돔 공장 가는데 같이 가실래요?”라는 말을 건네는 것도 겸연쩍어서 혼자 조용히 다녀왔다. 초콜릿 담당자에게 이 자리를 빌려 미안함도 함께 전한다.

혹시 아직까지도 잘 모르는 사람이 있을지 모르므로(또는 모르는 척하는 사람들의 귀에 못이 박히도록) 간단하게 설명하자면, 콘돔은 성교 중 남자의 발기된 음경에 씌우는 천연 고무 혹은 폴리우레탄 재질의 피임 도구이다. 콘돔의 시초에 대해서는 의견이 분분하지만 최소 400여년 전부터 쓰였다는 기록이 있다. 염소의 장으로도 만들었고, 동물의 뿔로도 만들었다. 오래전부터 콘돔을 써왔고, 예나 지금이나 기능에는 큰 변화가 없다. 임신을 막고 질병을 예방하는 것이다. 콘돔의 역사는 인간의 쾌락 추구의 역사이기도 하다. 당연한 말이겠지만, 성교시에 콘돔을 쓰는 동물은 인간뿐이다. (이렇게 말하고 보니 갑자기 자신없어진다. 설마, 누군가 쓰고 있진 않겠지? 세상에는 우리가 모르는 동물이 무척 많으니까.) 인간은 종족 번식의 본능을 유지하면서 때로는 쾌락을 위해 성교를 해왔다. 임신의 횟수를 줄이고, 쾌락의 횟수를 늘리기 위해서는 콘돔이 꼭 필요했을 것이다.

콘돔의 발전은 쾌락의 극대화를 향해 이루어지고 있다. 마치 착용하지 않은 것처럼 더 얇게, 더 부드럽게, 무엇보다 물샐틈없게 발전하고 있다. 성교할 때마다 ‘내가 더럽니?’ ‘느낌이 안 좋아서 빼고 해야겠어’라며 콘돔을 사용하지 않는 남성들을 위해서, 순간의 쾌감을 위해 임신의 가능성을 떠안는(혹은 여성에게 떠넘기는) 위험한 남성들을 위해서 콘돔은 계속 발전하고 있다. 콘돔 공장에서 콘돔 제조 경력 30년의 베테랑 직원을 만났는데, 예전에 비하면 제품의 질이 말도 못하게 좋아졌다고 한다. 한국은 세계에서 손꼽히는 콘돔 생산 강국이 됐다. 쓰는 사람은 별로 없어도 만드는 건 잘하고 있다. 무려 60개국 이상으로 수출하고 있다.

콘돔 공장에 들어서면 잠깐 어질어질하다. 강한 냄새가 코를 찌르고 눈이 따끔거린다. 이게 무슨 냄새였더라, 생각해 보니 홍어 향이다. 홍어 향이란 암모니아 향이다. 알고 보니, 라텍스를 보존하는 액이 암모니아 성분이라고 한다. 제조 방식은 간단하다. 강화유리로 만들어진 몰드가 배합 숙성된 라텍스를 지나간다. 몰드에 입혀진 라텍스가 굳으면서 콘돔이 되는 것이다. 유리 몰드 표면에 묻은 라텍스는 열풍 건조실을 통과하며 건조되고, 안정적인 피막을 생성하기 위해 같은 작업이 한번 더 반복된다. 다음으로 회전 브러시가 콘돔의 상단에 테두리를 만든다. 몰드에서 분리된 콘돔은 고무 특유의 들러붙는 성질을 없애기 위해 적정 온도로 가열된 물에다 담가뒀다가 꺼내게 된다.

문제는 제조가 아니라 검사다. 제조 공장은 대부분 자동화가 되어 있어 사람이 거의 필요 없다. (하긴, 암모니아 속에서 일하기가 쉽지 않겠지.) 공장에서 가장 많은 인력이 배치된 곳이 바로 검사실이다. 설마 그 많은 콘돔을 일일이 검사할까 싶지만 실제 그렇게 한다. 생각해보면 당연한 일이긴 하다. 플라스틱 바가지를 만드는 공장이라면 불량품이 생겨봤댔자 바꿔주면 그만이다. 밖에서 새는 바가지 새걸로 교체해 주면 그만이다. 하지만 콘돔은 사정이 다르다. 극단적으로 생각하면, 불량품 하나에 아이 한 명이다.

1차 검사를 위해 성형이 완료된 제품을 회전식 원통에 넣고 수분을 완전히 제거한다. 외관상의 불량품을 선별한 다음 콘돔 모양의 철형에다 콘돔을 하나씩 끼운다. 철형을 물에 통과시키면서 철형과 물에다 전압을 가한 다음 제품의 핀홀 부분에 흐르는 전류를 측정하여 불량품을 선별한다. 쓰고 보니 무척 복잡한 이야기 같지만, 모든 콘돔을 일일이 검사한다는 이야기다. 바닥에 쌓여 있는 하얀 콘돔들을 보고 있으면 아득한 기분이 들기도 하고, 콘돔을 철형에다 끼우는 직원들의 정확하고도 재빠른 손놀림을 보고 있으면 뭔가 그로테스크한 상상이 마구 펼쳐지기도 한다.(어떤 상상을 했는지는 비밀입니다.)

콘돔 공장에서 가장 재미있었던 곳은 공장 사무실이었다. 멀리서 찾아온 손님을 위해 공장 관리 직원들이 시간을 내주었다. 공장을 한 바퀴 휙 둘러보고 온 나를 위해 직원 한 분이 특강을 하기 시작했다. 특강이 시작되자 여기저기서 한마디씩 거들었다. 공장 관리 직원 두 명, 우연히 만나게 된 콘돔 생산 30년 경력의 베테랑 직원, 홍보부 직원 한 명, 그리고 나, 다섯 명 모두 남자였다. 이야기의 주제는 콘돔뿐이었다. 이건 무슨 예비군 훈련장도 아닌데, 참 재미있는 얘기들을 주고받았다. 열심히 들었던 특강 내용은 다음 주에 계속.

※취재에 협조해주신 유니더스에 감사드립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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