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바로가기 주요메뉴 바로가기

패밀리사이트

  • 한겨레21
  • 씨네21
  • 이코노미인사이트
회원가입

본문

광고

광고

기사본문

등록 : 2013.10.16 20:29 수정 : 2013.10.17 15:04

10월12일 토요일 오후 6시부터 서울 상암 월드컵공원 평화광장에서 열린 ‘에너자이저 나이트레이스 2013’에 참가한 1만여명의 참가자들이 헤드랜턴을 켜고 달리는 장관을 연출했다. 사진 ㈜에너자이저코리아 제공

[esc] 라이프

보스턴 마라톤 대회 출전을 꿈꾸는 시인 이우성의 가을 달리기 대회 순례기

텔레비전으로 보스턴 마라톤 대회 테러 현장을 보면서 결심은 확고해졌다. 내년엔 간다, 보스턴! ‘뛰지 않을 거면 왜 살아 있어’는 좌우명까진 아니지만 내게 꽤 영향을 미치는 문장이긴 하다. 뛸 때 나는 가능성을 느낀다. 뛰는 행위는 크고 작은 많은 벽을 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뛰는 것만으로, 의심할 바 없이 누구나 자신이 기어코 무엇이든 더 해낼 수 있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다. 굳이 사족을 달자면 나폴레옹은 말했다. “다른 사람이 감히 생각지도 못하고 있을 때 내가 해야 할 말과 해야 할 일이 떠오르는 것은 천재성이 아니라 깊은 명상에서 비롯되었다”고. 내게 ‘뛴다’와 ‘명상’은 동의어다.

그래서 연습 중이다. 보스턴에 가려고. 테러에 굴복하지 않는 인간의 의지를 보여주려고. 일단 이번 가을의 목표는 10㎞를 한 시간 안에 무난하게 들어오는 것이다. 물론 10㎞는 뛸 수 있다. 내가 원하는 건 뛰고 난 뒤의 상태다. 풀코스에 몇 번 도전했고 실패도 했고 성공도 했는데 돌아보면 언제나 처음 10㎞에 많은 것이 결정됐다. 호흡과 자세를 흐트러트리지 않고 10㎞를 뛸 수 있으면 42.195㎞도 뛸 수 있다고 생각하는데, 뭐, 확인되진 않았다.

10월의 밤은 빨리 찾아온다
클럽 조명처럼 수천개
헤드랜턴이 빛을 뿜었다
뛰는 동안 바람의 온도와
내 체온이 비슷해진 것 같았다

그래서 풀코스나 하프코스가 없는 작은 규모의 러닝 대회에 참가하고 있다. 풀코스가 있는 대회에서 5㎞나 10㎞를 뛰면, 풀코스 뛰는 아저씨들한테 기죽으니까. 지난 9월 스포츠용품 회사 푸마에서 주최한 ‘나이트 런’을 뛰었다. 참가자들이 모두 7㎞를 뛰는 평등한 대회였다. 저녁 7시에 레이스가 시작됐는데 깜깜하진 않았다. 나이트 런은 대부분 초저녁 레이스에 가까웠다. 장소가 경기도 과천에 있는 서울대공원이었기 때문에 풀빛이 온통 예뻤다. 가늘게 빗방울도 떨어졌다. 깜깜했으면 그 풍경을 못 볼 뻔했다. 코스 가로 폭이 좁아서 거의 걸어야 했다는 게 아쉬웠다. 하지만 그 모든 상황이 레이스라고 생각한다. 상쾌해서 몸의 세포들이 다 흩어질 것만 같았다.

직장인 한선영, 황광선씨는 야간 달리기에 푹 빠져 야간 마라톤 대회에도 참석했단다. 사진 ㈜에너자이저코리아 제공

가을은 달리기의 계절이다. 여러 스포츠 회사들이 경쟁적으로 레이스를 열고 있다. 장차 보스턴 마라톤 대회를 뛸 사람으로서 밤에 뛰는 레이스에 몇 번 참가했는데 어떨 땐 별로 어둡지 않고 어떨 땐 너무 어두웠다. 별로 어둡지 않을 땐 낮에 뛰는 것과 다르지 않아서 시시했고 너무 어두울 땐, ‘아, 뛰다가 사고 나서 죽으라는 걸까’라는 생각이 들었다. 다른 참가자들과 부딪혀서 넘어진 적도 있다.

지난 10월12일엔 건전지 회사가 주최한 ‘에너자이저 나이트레이스’를 뛰었다. 10㎞에 참가했다. 하지만 레이스를 며칠 앞두고 심각하게 갈등했다. 왜냐하면 그날 저녁 8시에 대한민국 축구대표팀이 브라질과 평가전을 치르기 때문이었다. 브라질 경기의 1등석 티켓을 두 장이나 선물받았다. 게다가 솔직하게 적자면 ‘에너자이저 나이트레이스’에는 기대하는 게 없었다. 이 레이스는 이번이 다섯번째다. 한국에서 나이트레이스를 가장 먼저 시작했지만 어떻게 이렇게 유명하지 않을 수가 있지? 팔굽혀펴기를 백만 스물하나나 하는 회사지만 달리기족들 사이에선 별 소문이 없었다. 그러나 결과적으로 나는 레이스에 참가했다. 브라질과의 경기라면 내가 보든 보지 않든 질 게 뻔하지만, 내가 대회에 참가하지 않으면 나 자신과의 싸움에서까지 지는 거니까. 역시 나는 근성이 있는 놈이었다.

토요일 저녁 7시에 상암에 갔다. 길 건너 월드컵 경기장에서 내가 좋아하는 이청용과 네이마르가 몸을 풀고 있을 그 시간 나는 상암 월드컵 공원 평화광장에서 몸을 풀었다. 골인지점이 축구장이면 좋겠다, 속엣말을 하면서. 7시30분 헤드랜턴을 켠 사람들이 출발점에서 뛰쳐나갔다.

헤드랜턴! 그렇다, 이게 중요하다. 10월의 밤은 빨리 찾아온다. 에너자이저 코리아에선 참가자들에게 헤드랜턴을 나눠준다. 헤드랜턴을 착용하고 달린 건 처음인데 인상적이었다. 수천개의 헤드랜턴이 빛을 뿜는 모습은 사람을 흥분시켰다. 특히 레이스 초반엔 클럽 천장에서 총알처럼 쏴대는 조명 같았다. 춤을 춰야 할 것 같아서 멈춰서 춤을 췄더니 나를 지나쳐간 참가자 몇 명이 뒤돌아봤다. 눈이 부셨다. 헤드랜턴을 착용하고 달릴 땐 뒤를 돌아봐선 안 된다. 그런데 그때 그 사람들이 이 글을 읽으면 그 정신 나간 댄서가 나였는지 알겠군.

알아도 상관없지만 조금 아쉬운 건 여자 참가자들 때문이다. 미인이 많았다. 밤에 열리는 러닝 대회에 참가할 정도면 평소에 뜀박질 좀 한다는 건데, 그래서 그런지 다들, 아니 대체로, 아니, 몇몇은, 몸매가 훌륭했다. 그중 몇몇은 쓸데없이 토요일 밤에 남자친구와 함께 참가하고 있었다. 운동을 할 땐 운동만 해야 한다고 생각한다. 그리고 다행인지 잘 모르겠지만 적당히 어둡고 적당히 밝아서 남자 참가자도 여자 참가자도 예뻐 보였다. 달리는 건 사실 조금 지루한 일이기도 해서 눈요기할 게 있어야 한다. 헤드랜턴이 빚어내는 괜찮은 레이스였다.

하지만 일종의 ‘병목 현상’은 여러 레이스를 참가할 때마다 공통적으로 느끼는 아쉬움이다. 그러려니 하고 뛰기는 하는데 어떤 대회는 5㎞나 10㎞를 완주할 때까지 목이 조인 상태가 계속되기도 한다. 에너자이저 나이트레이스는 그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종종 그냥 걸어버릴까, 생각했다. 다행히 한강의 밤공기는 달았다. 헤드랜턴이 쏘아대는 빛과 빛 사이로 나는 물을 한 모금도 마시지 않고 달렸다. 친구들에게 사진을 찍어 보낼까 하다 그만두었다. 불빛이 지나갈 때마다 드러났다 사라지는 풀들이 예뻤기 때문이다. 보고 또 보고 또 보며 달렸다.

출발선에서 몸을 풀 땐 쌀쌀했는데 뛰는 동안에는 바람의 온도와 내 체온이 비슷해진 것 같았다. 그리고 달릴 때의 내 얼굴을 볼 수 없었지만 여자들이 ‘저 남자 귀엽다’라고 생각하지 않았을까? 왠지 그런 느낌이 들었다. 피니시 라인에 설치된 시계를 보니 1시간7분25초가 내 기록이었다. 이래선 내년에 보스턴까지 못 달려갈 텐데 하는 생각을 1초 정도 하고 있는데 브라질과의 평가전 상황이 궁금해졌다. 스마트폰을 꺼내 중계 영상을 켜자마자 네이마르가 찬 공이 한국 편 골대로 우아하고 느리게 들어가고 있었다. 전반전 하이라이트였다. 그래, 잘했다. 뛰기를 잘했다.

11월17일에는 ‘나이키 위 런 서울 10K’가 열린다. 10월28일에 온라인 접수를 한다고 한다. 일요일 오후 3시부터 뛰기 시작한다니까 늦잠 자는 사람들도 참가할 수 있다.

이우성/시인, <아레나 옴므 플러스> 기자


광고

브랜드 링크

멀티미디어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광고


한겨레 소개 및 약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