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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염 다듬는 도구들. 빗 모양의 가위는 길이를 달리하면서 숱을 치고 자연스럽게 다듬는 데 도움을 주고 작은 가위는 미세조정을 할 때 편하다. 족집게는 삐죽나온 수염과 경계를 정리하는 데 효과적. 둥근 병은가짜수염을 붙이는 데 쓰는 풀과 수염가루. 톡톡 두드려 붙인 뒤 면봉으로 정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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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esc] 스타일
수염 기르는 남성 늘어나며 가꾸는 도구들도 세분화…
타인의 시선 의식하며 자신감 잃지 말아야
영국에는 “수염 없는 남자는 설탕 없는 홍차와 같다”는 속담이 있다. ‘앙꼬’(팥소) 없는 찐빵, 고무줄 없는 팬티 정도를 가리키는 말이겠다. 남자의 수염은 남성성의 상징이며 자랑이라는 얘기다.
남성 정치인들은 ‘나 고민중’이라는 메시지를 전달할 때 수염을 기를 때가 많다. 2011년 박원순 서울시장은 선거에 나오기 직전, 백두대간을 종주하다 안철수 의원을 만나며 산신령처럼 수염을 기른 채 언론에 등장했고 새누리당 김무성 의원도 지난해와 올해 정치적 결단을 보여줄 때마다 텁수룩한 하얀 수염으로 카메라 앞에 섰다. 손학규 민주당 상임고문 또한 ‘민심대장정’을 하면서 수염을 기르며 친근한 이미지를 전달한 바 있다.
잘 다듬지 않은 수염은 ‘낙오자’의 표지가 되기도 한다. 직장생활이나 연애 전선의 걸림돌이기도 하려니와, 무엇보다 수염을 가지런하고 보기 좋게 잘 다듬는 일이 생각보다 쉽지 않다. 그럼에도 지금 프랑스에서는 털을 기르는 ‘신 그루밍(동물이 털을 다듬는 행위)족’이 뜨고 있다고 한다. 그 나라에서는 1950년대 기성세대에 반발하는 젊은이들 사이에서 저항 정신을 담아 이러한 유행이 번져나간 바 있어 60년 만의 대유행이며 수염 손질 전문 이용소도 성업중이라고 한다.
‘털’로 읽는 세계문화사인 <털-수염과 머리카락을 중심으로 본 체모의 문화사>를 보면, 남자들의 덥수룩한 수염은 저항의 상징으로 분석된다. 예컨대 체 게바라, 마르크스, 엥겔스 등이다. 수염 기르는 방법과 그에 걸맞은 패션 스타일링을 다룬 책도 있다. <멋진 수염 가이드>는 수염을 기를 때 가장 중요한 점을 언급하며 “집을 나서기 전에 자신감을 절대 잊지 말라”고 강조한다. 사람들의 시선을 온몸에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남성 패션의 한갈래로 정착
깔끔한 멋 내려면 관리 필수
㎜ 단위로 스타일링 가능한 도구도
남의 시선 극복이 출발점
요즘은 수염을 일정한 길이로 다듬을 수 있는 트리머(털 깎는 기구), 족집게, 발모제, 심지어 인조수염이나 가짜수염까지 다양하게 시중에 나온다. 전문의약품으로 분류된 발모제의 경우 눈썹·수염·가슴털·겨드랑이털 같은 곳에 다양하게 사용할 수 있지만 반드시 의사의 처방전이 있어야 한다. 헬스 뷰티 스토어나 인터넷에서 파는 인조수염은 붙이는 수염으로, 피부에 풀을 바른 뒤 수염 가루를 붙이는 형식이다. 스펀지에 가루를 묻혀 톡톡 두드리면 얼굴에 붙는데, 실제로 보기 좋게 정리하는 것이 대단히 어렵고 머리카락 색깔 등과 어울리지 않아 가짜수염 표시가 난다는 체험담이 많다. 따라서 가짜수염을 붙일 땐 본인의 원래 수염을 보완하거나 수정하는 형태로 쓰는 것이 좋고, 세심하게 조금씩 사용하며 가위와 족집게로 하나하나 신중하게 정리하는 것이 반드시 필요하다. 수염을 제거할 땐 전용 리무버를 사용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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요즘 나오는 수염 손질 도구 ‘트리머’는 구레나룻이나 머리카락도 다듬을 수 있도록 한 것이 많다. 필립스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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면도기와 비슷한 도구인 ‘트리머’는 잔디깎이 등 뭔가 깎아내는 기구를 통틀어 이르는 것이다. 구레나룻을 비롯한 수염 스타일링을 손쉽게 할 수 있다. 필립스전자의 ‘멀티 그루밍킷’은 1㎜ 단위로 18가지 길이의 정교한 스타일링이 가능하다. 칼날을 교체하면 코털·귀털·눈썹을 정리할 수 있고 구레나룻이나 머리카락까지 손수 다듬을 수 있다. 쉬크의 ‘쿼트로 티타늄 프리스타일’은 0.3㎜에서 6㎜까지 4단계로 조정이 가능하며 수염·눈썹·구레나룻·체모도 손질 가능하다. 이 기계의 티타늄 면도날로 밀착 면도를 하고 디자인 커터로 스타일링을 잡은 뒤 트리머로 길이 정리를 하면 된다.
수염 기른 남자들은 저마다 다른 계기와 수염 손질 비법을 갖고 있다. 원래부터 수염을 좋아해 고등학교 3학년 때부터 콧수염을 기르기 시작했다는 직장인 우제용(27)씨는 이젠 수염이 없으면 인중이 길어 보여 스스로 어색할 정도라고 한다. 어릴 땐 수염이 듬성듬성 나서 발모제를 구하려고도 애를 썼다. 하지만 나이가 들면서 수염이 더 자라기 시작해 지금은 턱수염을 구레나룻까지 이어 기르고 있다. 대개 동양 남자들은 턱수염을 길러 구레나룻까지 연결시키는 일이 쉽지 않아 스스로도 “운이 좋은 편”이라고 했다. 가장 큰 장점은 얼굴이 작아 보인다는 점. 처음엔 이발기인 이른바 ‘바리캉’으로 수염을 다듬었지만 원래 머리 깎는 도구이기 때문에 원하는 길이를 만들기가 쉽지 않았다고 한다. 다양한 도구를 쓰면서 지금은 수염 길이를 6.5㎜ 정도로 맞추고 있다. 단, 도구로 수염을 다듬을 때는 절대 ‘음주운전’을 하지 않는다. 자칫 잘못 밀었다가 한쪽이 짧아지는 불상사가 발생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는 “수염은 얼굴에 큰 변화를 주는 확실한 ‘도구’임에도 ‘관리’가 없으면 그저 지저분해 보이는 털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강남에서 태닝숍을 운영하고 있는 박현석(26)씨도 고등학교 때부터 수염을 기르기 시작했다. 매일매일 수염 깎기가 귀찮아서 시작한 것이지만, 지금은 “수염도 패션의 하나”라고 생각하며 유지하고 있다. 그의 수염은 이른바 ‘소 수염’으로, 인중과 턱선 일부를 길러 한글 ‘소’자와 비슷한 모양을 만들었다. 그는 “어렸을 때부터 수염 있는 배우들을 좋아했다”며 “수염은 더 남자다워 보이고 스마트함도 느껴진다”고 했다. 수염 다듬기는 보통 더운 물로 샤워를 한 다음에 하는 것이 좋다고 한다. 열기 때문에 털이 부드러워진데다 모공이 열려 수염 모양을 만들면서 주변을 바짝 깎기에도 좋고, 나머지를 정리하는 것도 편안하기 때문이다. 여드름 같은 피부 트러블은 최대의 적이다. 수염에 가려진 트러블을 잘못 건드렸다가 피범벅이 되기 십상인 것이다. 박씨는 “저녁에 알로에 젤을 바르는 게 대단히 중요한데, 저녁때 수염을 깎고 바르고 자면 부드러워질 뿐만 아니라 수염을 밀어 하얗게 변한 피부와 원래 피부의 경계에 색깔 차이도 별로 안 생긴다”고 손질의 비결을 전했다.
콧수염이 아닌 턱수염만 기르고 있는 직장인 이아무개(54)씨는 “50대에 이르러 스스로 자존감과 자신감을 살리는 어떤 변화를 주고 싶었다”고 했다. 본격적으로 수염을 기른 지 4년째다. 10년 전에도 한번 수염을 길러본 적이 있긴 하지만 “수염을 기르는 것이 직무상 적절치 않아 보인다”는 사장의 얘기를 듣고 “목이 잘리는 대신 수염을 잘랐다”고 했다.
나이가 들어 수염을 기르자 이때는 주변 반응이 전보다 훨씬 호의적으로 돌아선 것을 느낄 수 있었다. 여전히 “늙어 보인다”며 나이 잣대를 들이대는 사람도 있지만 “스타일이 좋아졌다”며 패션의 한 종류로 받아들이는 사람들이 대단히 많다. 가장 큰 변화는 흰 수염이 검은 수염과 섞여 보기 좋게 나면서 저항감을 덜 주게 됐던 것이다. “흰 수염은 검은 수염보다 덜 공격적이고, 덜 저항적”이라고 그는 말했다. 아내나 딸은 물론이고 심지어 장모도 수염 기른 모습을 선호해 여러가지 패션 소품을 챙겨준다고 한다. 패션에도 관심이 생겨 모자도 쓰고 옷과 구두도 신경쓴다. 헐렁한 바지는 절대 입지 않는다.
처음 수염 스타일을 잡을 때는 본인의 사진을 크게 확대해 뽑아놓고 여러가지 수염 형태를 그려봤다고 한다. 콧수염은 인상에 별 도움이 안 된다는 것을 알게 됐고, 주변 사람들의 얘기를 들어가며 길이를 정했다. 그렇게 찾은 길이가 5~10㎜ 정도. “얼굴 아래쪽인 하관이 가는 편인데, 턱수염을 기르니 좀더 강한 인상이 됐고 나한테 어울리는 길이를 어느 정도 찾으면서 지금은 가위로만 다듬는다”고 한다. 더 나이든 사람들을 만나야 할 자리가 있을 땐 예의가 없거나 이질적으로 보일까봐 여전히 고민하고, 때론 모임을 포기하기도 한다. 나이가 들어 보여 물론 가끔 지하철에서 자리를 양보하는 사람들이 있긴 하지만, 지금 그는 이런 해프닝을 삶의 ‘양념’쯤으로 즐기게 됐다.
“남의 시선을 견디는 게 가장 힘든 일이긴 한데, 이것을 극복하는 것이 첫번째다. 이제 수염은 나의 트레이드마크가 됐다.”
글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참고자료 <멋진 수염 가이드>(한스미디어), <털>(작가정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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