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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11.06 19:57 수정 : 2013.11.07 09:53

[매거진esc] 김중혁의 메이드 인 공장 피아노 제작 공장 (하)

나에게 피아노는 ‘여유로움의 상징’이었다. 초등학교 때 친구 집에 놀러 가서 피아노를 보고 기가 죽었던 게 생각난다. “이 집은 피아노를 칠 만큼 한가한 집안이에요.” “여긴 거실에다 피아노를 놓을 만큼 집이 커요.” 피아노가 이런 말을 하고 있는 것 같았다. 한대 쥐어박고 싶었다. 우리 집은 저녁에 피아노를 칠 만큼 한가하지 않았고, 거실에다 피아노를 놓을 수도 없었다. 아예 거실 같은 게 없었다. 나는 피아노를 배우고 싶었지만 부모님은 태권도를 배우게 했고, 그때 배운 태권도로 세계선수권대회에 출전하여 우승을 했으면 아쉽지나 않지, 이젠 점점 굳어가는 골반 덕분에 태권도를 배운 게 더욱 억울해지고 있다. 태권도 대신 피아노를 배웠더라면 혼자 연주를 하면서 쉴 수도 있을 텐데 아쉽다. (하긴 태권도도 혼자 발차기를 하며 쉴 수도 있겠지만, 생각만 해도 피곤하네.)

거실에다 큼지막한 피아노를 사다놓고 뿌듯해하던 우리들의 예전 모습이 순진하고 예뻤다는 생각이 든다. 엄청난 부피의 소년소녀 문학 전집을 책장에 꽂아놓고 뿌듯해하던 마음도 있었고, 생일 선물로 시집을 선물하던 마음도 있었다. 가물가물하지만, 우리에게 그런 마음이 있었다. (다들 기억은 나시려나?) 그런 걸 두고 문화적 허영이라고 부르는 사람도 있겠지만 ‘허영’이라는 말은 문화나 예술과 어울리지 않는 말이다. ‘허영’은 필요 이상의 겉치레란 뜻인데 문화와 예술에는 애당초 필요라는 게 없으며 겉치레를 계속하다 보면 겉이 속으로 변하는 순간이 온다고, 나는 생각한다. 거실에 있는 피아노를 계속 보다 보면 치고 싶어지고, 책장에 꽂혀 있는 전집은 누군가 읽게 마련이다. 사람들은 예전과 달리 마음을 잃고 점점 실용적으로 변한다. 실용이라는 말이 무슨 뜻인지도 잘 모르겠다.

나의 어린 시절인 1970~80년대는 피아노의 황금시대라 할 만했다. 피아노 공장에서 전설로 내려오는 이야기에 따르면 “그때는 피아노 재고가 전혀 없었으며 도매상들이 현찰을 들고 와서 피아노를 사 갔다.” 경리과 금고에 현금을 넣을 공간이 부족해서 과일 상자에다 현금을 쌓아 두었다는 이야기도 전해 내려온다. 피아노 공장의 직원이 자동차 공장의 직원보다 많았을 정도다.

피아노 공장은 새로운 시대에서 살아남기 위해 다양한 방법을 모색하고 있다. 아날로그 피아노보다 디지털 피아노를 더 많이 생산하고 있으며, 아날로그 피아노에 부착할 수 있는 ‘사일런트 시스템’을 개발했다. 사일런트 시스템은 혁신적인 아이디어다. 70만원 정도만 들이면 기존 피아노를 아날로그 피아노로 쓸 수도 있고 디지털 피아노처럼 쓸 수도 있다. 이제는 많은 사람이 디지털 피아노를 선호하지만 ‘나무와 현의 울림이 만들어내는 피아노 소리’를 절대 포기할 수 없다는 공장의 자존심 같다.

피아노 만드는 공정을 보다가 묘한 흥분을 느낄 때가 있었다. 피아노는 대개 프레임과 브리지만 완성된 상태로 들여온 다음 건반과 액션을 조립하는 형태로 작업이 진행되는데, 조립이라는 게 말처럼 쉬운 일이 아니다. 피아노 현이 당기는 힘은 10톤이 넘는다. 피아노 현의 균형을 맞추고 압력을 분산시킨 다음 팽팽한 힘의 균형을 잡아주는 작업을 ‘정조’라고 한다. 건반이 자리를 잡도록 ‘타건기’로 피아노 현을 때리는 순간, 커다란 굉음이 공장 안에 가득 찼다. 피아노 현이 흔들리면서 뱉어내는 소리들은 백남준의 음악 같기도 했고, 소음 사이로 아련한 멜로디가 들려오는 것 같기도 했다. 음악이라고 해도 될 만한 소리였다. 정조 작업이란, 말하자면 수많은 소리 사이에서 정확한 피아노 소리만 남기는 것이고 그 소리가 모여 음악이 되는 것인데, 나에게는 버려지는 소리 역시 음악으로 들렸다. 피아노 공장에서만 느낄 수 있는 소리의 축제였다.

두 번의 정조 작업(예전에는 3차 정조까지 했다고 한다)과 마지막 정음 작업을 거쳐 피아노의 소리가 완성되는데, 조립에서 정음까지 한 사람이 모든 과정을 도맡아 한다. 대량생산을 하던 시절에는 작업자들이 단순공정을 맡았지만 지금은 한 사람이 모든 공정을 책임진다. 휴대전화의 소리는 꺼두고 이어폰을 쓰는 일도 없다. ‘보이싱 룸’에 들어가서 정음 작업을 할 때면 모든 신경을 귀에다 집중시킨다. 오케스트라의 지휘자가 하는 일을 정음 작업에서 하는 셈이다. 각각의 소리가 제대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튀어나온 소리는 눌러주고 가라앉은 소리는 끄집어 올린다. 정음 작업에 집중하면 피아노 현에 묻어 있는 먼지도 느낄 수 있다고 한다. 직원 9명이 한 달 동안 생산하는 피아노는 그랜드피아노 10대, 업라이트피아노 12대 정도다. 이쯤 되면 장인이라 불러도 될 것 같다.

직원들의 공구함에는 무시무시해 보이는 도구가 많았다. 직원들은 그 도구들로 피아노를 조이고 풀고 때리고 누르면서 소리를 맞춰 나갔다. 해머를 매끄럽게 하고, 해머에 붙은 양모펠트를 바늘로 찔러 부드럽게 만들기도 한다. 30년 동안 피아노를 만들었지만 달라진 것은 별로 없다. 많은 기술이 개발되고 재료도 개선됐지만 조이고 풀고 누르면서 소리를 찾아낸다는 점은 바뀌지 않았다.

지금까지 보아온 공장의 제품 중에 가장 까다로운 게 피아노가 아닐까 싶다. 먹는 제품도 있었고 얼굴에 바르는 제품도 있었고 입는 제품도 있었지만 피아노만큼 까다롭지는 않았다. 엄밀히 말하자면 피아노 공장에서는 피아노를 만드는 게 아니라 소리를 만드는 것이다. 피아노를 파는 것이지만 소리를 파는 것이기도 하다. 피아노를 만드는 데는 정답이 없다. 피아노 전문가들은 피아노를 옮길 때 전문가의 도움을 받으라고 한다. 까다롭다. 피아노는 가구가 아니다. 그럼 과학인가? 그것도 아니다. 피아노를 옮기고 난 다음에는 며칠 동안 제자리에 가만히 두어야 소리가 잡힌다고 한다. 까다롭다. 피아노는 전자제품이 아니다. 이건 마치 반려동물 같다. 살아 있는 생물 같다. 전문가들은 피아노를 험하게 치는 것보다 아예 안 치는 게 더 나쁘다고 말한다. 피아노를 외롭게 두면 안 된다는 얘기이기도 하고, 피아노는 나무로 만들어졌기 때문에 가만히 놓아두면 길이 들지 않는다는 것이다. 진동이 있어야 부품과 나무가 결합되고 내부에 울림이 있어야 안정을 찾게 된다. 피아노는 살아 있다.

그랜드피아노와 업라이트피아노의 가장 큰 차이는 액션의 방향이다. 업라이트피아노의 현은 수직으로 놓여 있어서 해머가 앞뒤로 움직이지만 그랜드피아노의 현은 수평으로 놓여 있어서 해머가 위아래로 움직인다. 연주자들이 그랜드피아노를 사용하는 이유는 위아래로 움직이는 해머 덕분에 연속 타건을 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랜드피아노 속에서 해머는 중력의 영향을 받고 아래로 떨어진다. 건반을 누르면 해머가 일어나서 현을 한 대 때리고 다시 아래로 떨어진다. 피아노 공장에 다녀온 뒤부터 자꾸 그런 장면을 상상하게 된다. 피아노 속 보이지 않는 공간에서 수많은 해머가 일어나서 현을 때리고 제자리로 돌아간다. 어쩐지 무척 외로워 보이는 풍경이다. 해머가 현을 때린다. 현이 떨린다. 현이 떨며 소리를 낸다. 피아노 공장에서 생산한 바로 그 소리다. 소리는 피아노의 내부를 한바퀴 스윽 돌아본 다음 피아노 밖으로 날아간다. 날아가서 공기에 뒤섞인 다음 어디론가 사라진다. 기껏 공장에서 생산해놓았더니 어디론가 사라진다. 아무리 생각해도 참으로 실용적이지 않은 공장에 다녀왔다.

김중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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