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거진 esc] 미루기 극복 신드롬
미국인 5명 중 1명은 자신을 ‘만성적인 미루기 환자’라 여긴다고 한다. 우리나라 상황도 다르지 않다. 이 못된 습성은 왜 고쳐지지 않는 걸까. 미루기는 정말 고쳐야만 하는 병일까. 쌓이기만 하는 일이 문제일까 내가 문제일까. 직장인 박솔재(24·출판사 근무)씨는 자타공인 ‘미루기 달인’으로, 글쓰는 사람 특유의 ‘초치기’를 자주 한다. “당장 일하지 않으면 안 되는 순간이 오면 죄책감이 절정을 찍고, 바닥까지 푹 들어갔다 나온 다음에 겨우 일을 시작하는데, 그때는 온갖 찌질한 ‘하위정서’를 다 겪는다”고 말했다. 그러다가 반전이 온다. 초인적인 힘을 발휘해서 일을 마무리하고 났을 때다. ‘이렇게 빠른 시간에 끝내다니 난 초능력자인 게 분명해.’ 이번에는 자아도취에 빠진다. 죄책감과 우월감 사이 양극단을 오가기 때문에 그는 스스로를 “정신적인 변태”라고 결론내렸다. 이렇게 엄살 부리지만 사실은 무척 노력하는 성실한 직장인이기 때문에 그는 미루는 문제로 결정적인 상처를 입은 적은 없다. 그래선지 나름 긍정적인 분석도 내놓는다. 조직은 갈수록 촘촘해져
사람이 널널하게 있는 꼴을 못 보고
개인은 자기계발을 하면서
남부럽지 않게 살고 싶은
욕망도 커져간다
욕망과 기대를 완수 못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면
일의 시작을 최대한 미루면서
자기에너지를 보존하려고 하게 된다
하지현 정신과 전문의 “내 미루기의 방점은 ‘잉여짓’에 있다. 마감인데도 웹툰과 다 끝난 드라마 시리즈 전편을 정주행하고, 죄책감에 시달리면서 금기를 즐기며 잉여짓을 한다. 고통스러울지라도 잉여짓은 소중하다. 예술이란, 뒹굴거릴 때 나오는 법이니까.” 한국청소년정책연구원 이유진(47) 선임연구위원도 ‘미룸’을 풍요로운 삶의 한 부분으로 본다. 그는 “원래 미룸 없이 모든 일을 착실하게 검토해서 완료하는 타입이었지만, 미루기를 해보면서 더 행복해졌다”고 말했다. 온종일 일과 공부에만 매달리던 그는 어느 날 ‘이렇게만 살다 죽을 것인가’ 하는 생각이 들어 일을 미뤘다가 마지막에 바짝 일하는 사람들을 관찰하고 흉내를 내봤다. 그 결과 업무수행도 결코 질이 떨어지지 않았고 직관력과 통찰력까지 긴장감 있게 발휘돼 훨씬 효율적으로 일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요즘 그는 예전에 엄두도 못 내던 봉사, 강연, 요리, 산책, 운동 등 다채롭고 유익한 경험을 하고 있다. 물론 자기 일에 ‘전문가’가 돼야 가능한 일이다. 최근 몇년 새 ‘미루기’에 대한 다양한 이야기들이 쏟아져 나오고 있다. ‘미루기 극복 신드롬’이라고 할 만하다. 이 담론을 이끄는 선두에는 심리학의 유행과 다양하게 출간되고 있는 자기계발책들이 있다. 지난해 한 취업포털과 출판사가 직장인 259명을 대상으로 미루기에 대해 조사한 결과, ‘헬스나 요가, 수영 등 등록해놓고 안 가기’가 46.3%로 1위를 차지했다. 그밖에는 ‘아침에 5분 더 자려다 택시 타고 출근하기’, ‘기안서 작성 미루다 마감일 놓치기’ 등이 있었다. 미국 심리학자 윌리엄 너스는 미루기가 효율성의 극대화가 아니라 불필요한 고통을 줄이는 측면에서 접근될 필요가 있다면서도 이것이 “시한이 있는 중요한 활동을 다음으로 넘기는 자동화된 문제행동이자 이에 상응하는 결과를 낳는 과정”이라고 정의했다. 미국의 심리학전문지 <사이콜로지 투데이>를 보면, 미국인 5명 가운데 1명은 자신을 ‘만성적인 미루기 환자’라 여긴다고 한다. 미루기는 학계에서 ‘지연행동’이라고 일컬어진다. 각종 연구들을 종합하면, 지연행동은 단순히 시간관리의 문제 때문이 아니라 중층적인 마음이 만들어낸 결과다. 허찬희 정신과 전문의는 “미루기는 직면을 회피하려는 마음 때문에 생긴다. 예컨대 지각을 반복적으로 하는 바탕엔 업무를 피하고 싶은 무의식적인 동기가 있을 수 있고, 아이들 꾸물거림은 억압적인 부모에 대한 분노, 화, 적개심에서 비롯된 소극적인 저항으로 풀이할 수 있다”고 말했다. 미루기에 대한 성별이나 세대별 특성이 있다는 연구 결과도 있다. 심리학 분야의 논문들을 보면, 학생들이나 여성의 경우 권위적인 부모와의 관계에서 미적거리는 행동이 발생하거나 강해질 가능성이 커진다는 분석이 많다. 나임윤경 연세대 문화학 협동과정 교수는 “실제 요즘 학생들은 부모를 실망시키거나 실패하는 데 대한 두려움이 부쩍 는 것 같다. 특히 여성들의 사회적인 약진 때문에 엘리트주의를 딸에게 강요하는 부모가 많은데, 그럴수록 실패에 대한 두려움은 커진다”고 말했다. 이런 가운데, 압축적인 근대화를 겪으면서 집단주의와 개인주의가 혼재된 우리나라에서는 앞으로 이런 문제가 더욱 크게 불거질 것이라는 전망이 나온다. 문요한 정신과 전문의는 “우리나라가 집단주의에서 개인주의 시대로 이미 넘어왔지만 개인은 실제로 주체적이고 독립적으로 살아갈 수 있는 힘이 대단히 떨어져 부모나 주변 요구에 기대 살아가는 경우가 많다”고 말했다. 타인의 평가에서 다소 자유로워질 필요도 있다. 문 전문의는 “남의 시선에 따라 완벽주의를 요구할수록 자존감 저하와 우울감은 상호작용하기 때문”이라고 설명했다. 미루기를 극복해야 할 과제로 보는 심리학적 진단도구나 분석에는 개인의 시간과 육체를 관리하고 자발적인 노동을 강화하려는 신자유주의의 특징이 반영돼 있다는 분석도 나온다. 하지현 정신과 전문의는 “요새 들어 미루기의 문제가 쏟아져 나오는 이유는 각자 해야 할 일들이 너무 많이 주어진 반면, 정작 할 수 있는 일은 별로 없어 해결할 엄두가 나지 않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그는 “조직은 갈수록 촘촘해져 사람이 널널하게 있는 꼴을 못 보고, 개인은 자기계발을 하면서 남들이 사는 대로 먹고 살고 싶은 욕망도 커져만 간다. 시간과 자원이 부족한 사람이 욕망과 기대를 성공적으로 완수하지 못하는 악순환이 반복되다 보면 일의 시작을 최대한 미루면서 자기에너지를 보존하려고 하게 된다”고 덧붙였다. 결국, 가진 것이 적을수록 실패의 가능성이 뚜렷하고 과제를 직면하는 데 어려움을 느끼면서 일을 회피할 가능성이 높아진다는 풀이다. 아무리 심리학과 정신분석학을 동원해도 본인의 꾸물거림 때문에 고통스러울 수밖에 없다면, 전문가들이 내놓는 공통적인 해법에 귀기울여볼 수도 있겠다. ‘천리 길도 한걸음부터’라고 되뇌면서 업무를 쪼개 하나씩 완수하는 것이다. 소설가 앤 라모트는 <글쓰기 수업>이란 책에서 이렇게 말한다. “오빠가 10살 때 일이다. 3개월 동안 미뤄오던 새에 관한 보고서를 쓰느라 여러 권의 책을 펼쳐놓고 중압감 때문에 울기 일보 직전이었다. 그때 아버지가 말씀하셨다. 얘야, 한마리씩 하거라, 한마리씩. 그냥 한마리씩 차근차근 하면 된단다.” 이유진 기자 frog@hani.co.kr 참고서적 <미루기의 기술>(존 페리, 강유리 옮김·21세기 북스), <굿바이 미루기>(제프리 콤, 이지영 옮김·가디언), <심리학, 미루는 습관을 바꾸다>(윌리엄 너스, 이상원 옮김·갈매나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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