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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12.04 20:42 수정 : 2013.12.05 12:50

1994년뿐 아니다. 아직도 지방에서 올라와 처음 살 곳 을 구하는 학생들은 드라마처럼 서울의 첫번째 밤을 추억으로 기억한다. 드라마 <응답하라 1994>에서 나온 신촌 하숙 친구들과 실제 하숙집을 구하고 이사하는 모습들. tvN 제공, <한겨레> 자료사진 ※ 이미지를 누르시면 확대됩니다.

[매거진 esc] 포복절도 가슴뭉클 하숙 체험기 10

갓 스무살, 고향집을 떠나 낯선 서울의 작은 방에 짐을 풀었을 때 하숙집 딸은 고아라처럼 예뻤을까?
<응답하라 1994>가 전하는 하숙집 풍경을 보며 “맞나” 무릎치고 “뭐대~” 핀잔할 독자들을 위해 준비했다. 하숙의 추억, 진실 혹은 회한.


“스무살만이 가질 수 있는 그 설렘과 뜨거움과 겁없음. 우린 그게 얼마나 소중한지도 모른 채 스무살의 마지막 계절을 보내고 있었다.” 집을 떠나 낯선 곳에서 시작하는 스무살. 돌아보니 30만원짜리 방 한칸에 담긴 추억에 다시 가슴이 뛴다. 폭발적인 인기몰이 중인 드라마 <응답하라 1994>는 하숙집의 추억을 호출한다. 하숙생 출신 30~40대 사회인 8명이 털어놓는 이십대 시절 하숙의 추억.

연애하자고 들어간 이대 앞 하숙
같은 생각 가진 남학생만 득시글
떠들썩한 신촌 한복판
잠옷바람으로 공중전화 찾아


하숙집 딸은 누구와 결혼했을까?
붕어빵에 붕어 없고 고시원에 고시생이 없다더니 이대 하숙집엔 이대생이 없었다. 1994년 제대한 뒤 복학을 준비하던 중 같은 과 복학생 친구가 “우리도 젖과 꿀이 흐르는 이화여대 근처 하숙집으로 가는 게 어떻겠느냐”고 제안했다. 친구의 기특한 아이디어에 고민할 것도 없이 우리는 연세대와 통학이 쉬운 이대 후문에 하숙을 구했다. 하지만 기대와 흥분이 아연실색과 어처구니로 바뀌는 데는 만 하루도 걸리지 않았다. 하숙집의 상호엔 분명 ‘이대’라는 글자가 들어갔는데 하숙생의 신분은 모두 연대 남학생이었다. 모두가 같은 심보로 하숙을 구한 복학생들이었던 것. 심지어 이들은 밤마다 ‘그 많은 이대생은 어디로 갔느냐’고 울부짖으며 술판을 벌이고 있었다.

산이 거기에 있기 때문에 오르고 음식이 거기 있기에 먹으며, 이대생이 거기 있기에 자러 간 우리는, ‘이대생만 빼고’ 다 만난 셈이었다. 이 하숙집에도 ‘여자’가 있긴 했다. 다른 대학 신입생인 그녀는 마음씨가 어떻든 간에 살벌하게 찢어진 눈과 주먹코, 다부진 육체가 더욱 부담감을 더하는 하숙집 딸이었다. 찌질한 싱글시대를 마감하겠다는 각오로 왔던 남자 하숙생들의 분노는 하숙집 딸에게 투사됐다. 밤마다 하숙생들끼리 벌이던 술판의 대미는 늘 그녀를 씹어대는 데 할애됐다. 앞장서서 그녀에 대해 가장 큰 적개심을 드러낸 남자는 다름 아닌 내 룸메이트, 내 친구였다. “저런 여자와 연애하느니 차라리 외로워서 불행한 게 낫다”던 내 친구는, 그러나 대학 졸업과 동시에 그녀와 결혼했다. 그 녀석의 기대가 절망으로 바뀌고 그 절망이 또 로맨스로 바뀌기까지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는 아무도 모를 일이다.
이름을 밝히기 두려운 방송사 피디 ㄱ


공포의 칠봉이
“어쭈구리~.” 1995년 봄, 대학로에 하숙집을 구했다는 고향 친구놈 쭈구리(별명)의 말에 난 이렇게 대답했다. 놀기 좋다는 이유 하나로 학교랑 떨어져 있는 곳에 하숙집을 얻다니. 그것도 같은 고향 친구인 체대생 심비홍(심형래+황비홍), 돈틀러(돼지+히틀러)가 함께 산다니 이건 하숙집이 아니고 ‘쓰레기’ 하치장이라는 얘기.

가봐야 같은 쓰레기밖에 더 되겠나 싶어 놀러 오라는 성화를 개무시하다 중간고사를 마치고 겨우 왕림을 했더랬다. 하숙집에 들어서자마자 들짐승들의 방이 어디인지 난 직감적으로 알 수 있었다. 방문을 열어 놓은 채 녀석들은 하나같이 러닝에 반바지 차림으로 밥솥에 머리를 들이밀고 있었다. 왔느냐는 인사도 없이 서로 한 숟가락이라도 더 먹겠다고 ‘난리부르스’였다. 과연 돼지우리로구나~.

무조건 먹는 게 남는 거라며 점심을 먹고서도 밥을 비벼 또 ‘처묵처묵’ 하고 있는 녀석들 뒤로 싸늘한 음성이 들렸다. “작작 좀 처먹어라~. 니들 때문에 하숙비 올려야 쓰겄다.” 주인아주머니의 힐난에도 돈틀러는 “올리면 더 먹으면 되지”라며 낄낄거렸다. 이윽고 아주머니는 날 보며 “이건 또 뭐여? 객식구여? 얼굴 보니 밥도 많이 먹게 생겼구먼. 가지가지 한다”며 눈을 흘기고 사라졌다. 아직 밥 한 숟가락 얻어먹지 못했는데 졸지에 같은 쓰레기 취급을 받자 부아가 치밀었다. “야들아, 밥 좀 안쳐라. 나 솔찬하게 축내고 가야겄다.” 1박2일 동안 4명의 들짐승은 그 하숙집에서 무려 10끼를 처먹었다. 6개월 만에 그 집은 자취방으로 바뀌었고 들짐승들은 다른 두 군데 하숙집의 업종 변경을 이끌어 낸 뒤 졸업했다.
오승훈 <한겨레21> 기자 vino@hani.co.kr


잠옷 벗고 서울 시민 입성
“밥 잘 챙겨 먹고 공부 열심히 하고 밤에 돌아다니지 말고!” “엄마 걱정하지 마. 나 잘할 수 있어. 나 엄마 딸이잖아.” 하숙집을 정한 뒤 엄마와 딸은 펑펑 울었다. 우리 모녀의 작별하는 모습은 이산가족들이 다시 헤어져야 할 때의 모습과도 맞먹었다. 그렇게 나는 낯선 서울에 혼자 덩그러니 남겨졌다.

나의 첫 하숙집은 <응답하라 1994>에 등장하는 ‘신촌 하숙’과 거의 같은 곳에 있었다. 하숙집 문밖만 나서면 각종 술집과 식당, 카페가 즐비했다. 태어나 서울은 처음이었다.

시도 때도 없이 내 심장은 쿵쾅거리고 발은 후들거렸다. 말도 성격도 다른데 한방에 있어야 한다는 룸메이트가 어색했다. 눈 감으면 코 베어 간다는 서울 생활을 잘할 수 있을지 모든 것이 낯설고 두려웠다. 서울 사람들이 낯설기만 한 나는 공중전화 부스를 찾아 거리를 헤맸다. 엄마는 기본이고 광주에 있는 고향 친구들과 전화로 긴 수다를 떨었다.

1996년 3월, 나는 밤만 되면 늘 상경 기념으로 엄마가 마련해준 고운 잠옷을 갖춰 입고 공중전화 부스를 향했다. 신촌 한복판에 살았지만 그곳이 번화가인 줄은 몰랐다. 집 앞이라고만 여겼다. 내가 살던 동네에서는 애들이고 어른들이고 늘 어릴 때부터 봐오던 사람들이라 잠옷을 입고 돌아다녀도 이상할 것이 없었다. 속옷도 아니고. 서울살이에 얼마나 긴장했는지 신촌 거리를 지나는 사람들이 날 이상한 눈으로 쳐다본다는 사실을 일주일은 지나서야 알아챘다. ‘아~ 여기는 광주 금남로랑 비슷한 곳이구나.’ 그 뒤 비로소 나는 잠옷을 벗고 진정한 서울 시민이 됐다.
양선아 기자 anmadang@hani.co.kr


내 남친은 하숙생
90학번 내 남자친구는 처음엔 동아리 선배들이 대를 물려가며 사는 그럴듯한 하숙집에 살았다. 30만원에 독방을 쓰며 아주머니가 ‘아들처럼’ 밥을 챙겨준다고 했다. ‘아들처럼’이 문제였다. 어느 날 여관비를 아끼기 위해 월담을 해서 남자친구 방으로 숨어들던 나는 아주머니에게 딱 걸렸다. 일장 훈계를 들었다. 아들처럼 아끼는 우리 김재준(가명)이 벌써부터 이러는 꼴은 못 보겠다고 하셨다.

비분강개한 재준이와 나는 리어카를 끌고 산동네 하숙집으로 옮겼다. 재래식 화장실에다 방은 더 쪼그라들었지만 월 20만원인데다 부실한 대문이 마음에 들었다. 밖으로 나갈 때는 같이 쓰는 마루를 지나야 했지만 주인 할머니는 일찍 잠들어서 아침 9시는 되어야 나왔다. 하숙생들이 밥을 먹고 등교하건 말건 관심이 없었다. 집에다가는 ‘도서관에서 밤을 새운다’며 남자친구 하숙방에서 자는 날이 갈수록 늘어갔다.

어느 날 새벽, 갑자기 곡하는 소리에 눈을 떴다. 알고 보니 주인 할머니는 오래전부터 지병이 있었는데 전날 밤 심상찮았고 갑자기 돌아가셨다는 것이었다. 급한 김에 사극처럼 창호지를 뚫어 밖을 내다보았다. 며느리와 아들들이 마루에 앉아 곡을 하고 있었다. 잠시 후 마루에 사람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나중엔 내가 숨은 방 툇마루에까지 문상객들이 걸터앉았다.

김영훈 기자 kimyh@hani.co.kr

결론적으로 그날 오전 내내 나는 숨소리도 죽이며 남자친구 방에 갇혀 있었다. 밖에선 ‘호상’이라며 위로하고 음식을 나누는 소리가 왁자했다. 배도 고팠지만 치명적인 문제가 있었다. 지금 나는 재준이와 10년째 살고 있지만 우리가 그날 오전 닫힌 하숙방에서 페트병에 번갈아 소변을 보았던 이야기는 결코 하지 않는다. 1ℓ 병이 넘쳤다. 우리는 사람이 잠시 뜸해진 점심때 하숙방을 탈출했다.
회사원 성나정(가명)


‘삼천포’랑 잘해볼 걸 그랬어
먹어도 배고프고,
같이 있어도 외로웠던
집 떠난 청춘의 하숙집 송


하숙집 밥, 로망과 현실 사이
하숙생은 늘 배고픈 자들이다. 그들은 조 모임을 하다가도 스터디를 하다가도 밥때가 되면 조용히 사라진다. 늦은 시간 조용히 술자리로 돌아오지만 그때부터 또 안주발만 거하게 세운다. 그들은 먹고 또 먹는다.

1994년을 나름대로 철저히 고증했다는 <응답하라 1994>에는 ‘묵어라 묵어라 더 묵어라’를 연발하는 주인아주머니가 있지만 현실의 1994년 신촌 대학가 하숙집에는 그런 집이 없었다. 심지어 드라마 속 하숙생들은 산해진미를 앞에 두고 매워서 못 먹는다는 소리를 한다. 밥을 남기는 자, 하숙생이 아니다.

가진 것이라곤 집 한 채 달랑 있는 사람들(대개 억척 아줌마들)이 하는 가내 영세 자영업이 바로 ‘하숙’이다. 손바닥만한 자투리 공간만 있으면 쪼가리 천으로 가림막을 해서라도 하숙방을 하나라도 더 만드는 게 ‘하숙 자본’의 생리이기에 드라마처럼 넓은 마당은커녕 손바닥만한 마루도 불가능이다. 또 하숙업이라는 게 식비에서 가장 큰 이문을 남겨먹는 사업이어서, 넉넉하게 밥을 준비하지 않는다. 식사 시간 ‘땡’ 하자마자 100m 달리기를 하듯 뛰어가야 끼니를 때울 수 있는 하숙집도 많았다.

대부분의 하숙집 주인 가족은 절대 하숙생들과 함께 식사하지 않았다. 주인네 밥상을 한번이라도 본 적이 있는 사람이라면 왜 겸상을 하지 않는지 짐작할 수 있다.
김아리/자유기고가


보고 싶다, 아주머니
1997년 대학 1학년 때부터 2003년 취업할 때까지 하숙 생활을 하며, 나에게 좋은 하숙과 나쁜 하숙을 나누는 기준은 ‘밥’이었다. 하숙생에게, 밥이란 많은 것을 함축한다. 그것은 생존을 위한 기본 요소일 뿐 아니라 주인아주머니의 성품과 인심을 짐작할 수 있는 잣대였다.

2년 동안 3곳의 하숙집을 전전하다 내가 정착한 곳은 바로 ‘창천하숙’이었다. 당시 하숙생 머릿수를 ‘돈’과 연결시키던 다른 하숙집과는 달리 정이 넘쳤던 창천하숙에서 3년 반 동안 하숙을 하며, 인심 후한 아주머니의 살뜰한 보살핌을 받았다.

아주머니는 정갈한 분이었다. 매일매일 다른 종류의 국과 반찬, 그리고 햅쌀로 지은 고슬고슬한 새 밥을 식탁에 올리셨다. 무엇보다 나를 감동시켰던 것은 특별한 날 빼놓지 않고 밥상에 올라왔던 특식이다. 복날엔 하숙생 1인당 1마리씩 삼계탕이, 명절이면 집에 내려가지 못하는 하숙생들을 위해 떡국과 송편이 나왔다. 탕수육이나 스파게티 같은 특별한 요리를 만든 날이면 “오늘 특별히 맛있는 요리 했는데, 남겨둘 테니 들어오면 먹으라”고 전화도 하셨다.

아주머니 건강이 악화돼 하숙집을 그만두시면서 나는 그분과 이별을 했다. 입사시험에 합격해 기자 생활을 시작한 뒤 신문에서 내 이름을 보신 아주머니께서 언젠가 딱 한 번 연락을 하셨던 적이 있었다. 그 뒤 몇 번의 휴대전화 고장과 교체를 겪으며 연락처를 아주 잃어버리고야 말았다.

아주머니, 혹시 이 글을 보신다면 꼭 연락 주세요. 보고 싶습니다.
유선희 기자 duck@hani.co.kr


바밤바로 변신한 하겐다즈
여자 4명이 살던 하숙집에 남자 하숙생 최아무개가 들어온 건 2003년, 내가 대학교 2학년 때였다. 녀석은 나의 같은 과 후배이자 동아리 후배. 능구렁이 같은 성격 탓에 하숙집 언니들은 ‘우쭈쭈~’ 녀석을 귀여워했지만, 나의 ‘생얼’을 적나라하게 학과로 퍼나르던 녀석은 내게 눈엣가시 같은 존재였다.

여자들만 사는 집에는 암묵적인 규칙이 있다. 남이 사온 물건은 건드리지 않는다는 것이다. 내건 내거, 니건 니거라는 여자들 세상의 규칙은 남자 하숙생이 들어온 뒤에 슬금슬금 무너지기 시작했다. 거실 냉장고에 들어 있던 값비싼 하겐다즈 아이스크림이 행방을 감추었다가 며칠 뒤 돌아왔다. 500원짜리 바밤바로. 여자 4명이 머리를 대고 고민해봤지만, 아이스크림이 어떻게 변신했는지 알 길이 없었다.

게다가 하숙집 최고령자 ‘대전 언니’는 “값비싼 샴푸만 기하급수적으로 주는 미스터리가 발생하고 있다”고 발표했다. 의혹은 서서히 녀석을 향해 갔지만, 물증은 없었다.

어느 날 밤 대전 언니와 나는 거실에서 라면을 끓여먹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욕실 문이 열렸고, 최아무개가 지나갔다. 그가 짧은 머리 휘날리며 지나간 자리 낯익은 샴푸의 향이 거실을 가득 메웠다.

“왜 좀 쓰면 닳아요? 쪼잔하구로~” 언니의 추궁에도 녀석은 당당하기만 했다. 명품 샴푸가 금세 닳아버린 지 일주일 뒤 저렴한 덴트롤 샴푸가 욕실에 놓였다. 범행 수법으로 보아 하겐다즈 사건의 범인은….
황춘화 기자 sflower@hani.co.kr


다시 보자 삼천포
2002년 내가 살던 하숙집은 20층 아파트였다. 19층 아파트에는 주인아주머니와 아들 형제, 그리고 남자 하숙생들이 살았다. 여자 하숙생들은 20층에 살며 19층에서 밥을 먹었다. 여자 일곱, 남자 여섯은 자주 어울렸다.

3월이 지나면서 눈이 맞는 하숙생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어느 날 주인집 큰아들이 내게 호감을 표시했다. 다 같이 노래방을 다녀온 뒤로 “네가 그렇게 노래 잘하는 줄 몰랐어”라거나 “너의 차분한 점이 괜찮아 보인다”는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드라마에서 촌스러운 삼천포와 능글능글한 해태가 나오면 여자들은 대부분 해태를 택한다. 내가 살았던 하숙집 큰아들은 곰과고 둘째 아들은 여우과였는데 여자들은 모두 둘째에게 호감을 가졌다. 큰아들은 영 인기가 없었고, 나한테도 그랬다.

그런데 나이 들어보니 큰아들이 진짜 괜찮은 사람이었구나 싶다. 여자를 배려하는 스타일과 결혼해야 후회가 없다. 이런 깨달음은 항상 늦게 찾아온다.
정다영/주부


옥상에서의 첫경험
2001년 봄 서울 신촌 작은 하숙방에 들어갈 땐 드라마 <남자셋 여자셋>을 상상했다. 그러나 작은 방이 다닥다닥 이어진 30만원짜리 하숙집에는 조인성도 양동근도 없었다. 쓰레기와 칠봉이는 말할 것도 없다.

어느 맑은 5월 하숙집 생활이 외로워졌다. 견딜 수가 없어서 하숙집을 나와 슈퍼로 갔다. 담배와 라이터를 샀다. 하숙집 옥상으로 올라갔다. 아무도 가르쳐주지 않았지만, 꺼내든 담배를 척 입에 물고 불을 붙였다. 그리고 깊은 숨을 들이마셨다가 내뱉었다. 잠시 ‘핑’ 도는 기분이었을 뿐 기침도 하지 않았다. 나의 담배 첫 경험. 그 뒤로 담배는 나의 외로운 하숙생활의 동반자가 되었다.

옥상에 올라가면 공대생 오빠와 마주치곤 했다. 서로 말없이 담배를 피웠다. 경상도 사투리를 쓰던 그 오빠는 세번째 마주치던 날 나에게 물었다. “담배 말고 친구 없나?” 아직 친구인지 아닌지 모르겠는 사람들이 더 많았던 것 같다.

여전히 그렇다. ‘나의 외로움이 널 부를 때’ 언제나 말없이 내 깊은 한숨을 오롯이 함께했던 친구는, 담배뿐이다.
여전히 촌년인 기자


1년에 4번 짐 싼 여자
버스회사 사장, 양계장 사장, 대형 선박의 선주. <응답하라 1994> 하숙생들의 아버지 직업은 하나같이 빠방하다. 덕분에 원하는 하숙집에서 졸업할 때까지 살겠다는 야무진 꿈을 꿀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2005년 여름, 나는 연세대 정문 앞에 30만원짜리 하숙을 얻었다. 독방이었지만 밥은 주지 않는 하숙집이었다. 아르바이트로 번 돈의 절반 이상을 하숙비로 내고 나면 엥겔지수는 턱없이 낮았다.

그런 상황에서 친구의 합방 제안이 솔깃했다. 밥도 주고 화장실도 따로 있는데 월 56만원, 그해 가을, 각자 28만원만 내면 되는 하숙집을 우리는 바로 계약했다. 하지만 새집에선 3개월밖에 못 살았다. 겨울방학이 되자 친구가 휴학하고 집이 있는 대구로 가게 된 것이다.

다행히 근처에 월 30만원 독방을 구해 겨울을 났는데, 새 학기가 되자 하숙집 아주머니가 자신이 소유한 근처 연립주택 지하방에 같은 조건으로 사는 게 어떻겠느냐는 제안을 해왔다. 알고 보니 우리 하숙집에서 유일한 여자였던 나를 남학생 부모님들이 영 못마땅해했던 것이다.

얼마 못 가 신촌 연쇄 성폭행 살인범의 이야기가 보도되기 시작했다. 으슥한 골목과 부실한 현관문이 무서웠다. 도망치듯 그 집을 나왔다.

2006년 봄, 주변 하숙집 평균 시세는 40만~45만원이었다. 돈 없는 내 탓을 하며 나는 4번째 이삿짐을 싸서 월 28만원의 창문 없는 고시원으로 들어갔다.
김민경 기자 salmat@hani.co.kr



>>> 하숙촌에서 원룸촌으로

“새 학기가 되면서 3만5000원 하던 하숙비를 (올해부터) 4만원을 받는다.” 1978년 한 일간신문 칼럼에 실린 한탄이다. 70년대 후반 돈을 벌기 위한 전문 하숙집이 크게 늘어나는 ‘하숙집의 영업화’ 시대가 막 도래한 참이었다. 그래도 ‘집안이 허전해서’ 방 한두칸을 하숙생에게 내주는 하숙집이 적잖았던 것으로 보인다. 칼럼은 이런 경우라면 ‘여고생 하숙집 딸’이 있을 가능성도 있다며 은근히 비전문 하숙집을 권한다. 하숙생은 흔히 시골에서 집안의 기대를 한몸에 받던 남자 학생들이고 보면 딸 가진 부모들이 기대를 가지고 하숙을 친 경우도 흔히 있다고 했다.

그러나 낭만적인 하숙집은 사양길에 들어섰다. 드라마의 무대가 된 1994년은 부동산 경기가 살아나던 시점이다. 그해 <한겨레> 기사에선 대학가 하숙비가 독방은 최저 28만원에서 31만원으로, 합방은 21만원부터였는데 23만원까지 평균 10% 넘게 올랐다고 보도하고 있다.

물가와 집값이 가파르게 오르면서 하숙방은 점점 줄어들었다. 90년대 후반부터 하숙촌이라고 일컬어지던 대학가 근처의 하숙집들은 이른바 ‘원룸텔’로 바뀐 곳이 많다. 방을 여러 개로 나눠 식사를 없애고 방값을 낮추는 편이 공실률이 적기 때문이다. 2011년 <한겨레> 기사를 보면 신촌 지역 하숙집에서 4.95㎡(1.5평) 크기의 방이 한달에 45만원이라고 했다. 식사는 오전 7~9시, 오후 6~7시에만 제공된다. 부동산 직거래 카페 ‘피터팬의 좋은 방 구하기’(cafe.naver.com/kig)에서 보니 신촌 하숙집 시세는 독방 45만원 정도다. 방은 고시원과 비슷한 작은 크기다. 하숙집 반찬이 분쟁거리이다 보니 하숙집 주인들이 ‘끼니마다 김치 말고도 반찬 3가지’를 미리 약속하기도 한다.

남은주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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