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족발집을 찾은 예폭클럽 회원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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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요리
음식동호회 문화 이끈 ‘예폭 클럽’ 10주년 파티 현장
지난 2일 저녁 서울 강남구 대치동 소재 이탈리아레스토랑인 ‘그란구스또’에 와인 잔이 높이 올라갔다. 30여명이 축하 노래를 합창했다. 리소토와 각종 채소가 들어간 오징어순대, 고등어파스타 등 모두 11가지 음식이 식탁에 줄지어 나왔다. “보통 한국인들은 이념에 따라 모입니다. 우리는 밥을 같이 먹은 인연으로 모였지요. 10년이 되었습니다.” 아름다운재단 이사장 예종석(60) 한양대 교수가 일어나 말을 시작한다. “우리 그동안 밥 먹느라 고생했습니다.(웃음) 밥은 작지만 큰 행복입니다.” 예종석 교수를 중심으로 10년 전 꾸려진 음식 동호회, ‘예폭클럽’의 10주년 행사 자리였다. 평소 폭탄주를 즐기는 예 교수의 취향에 따라 붙여진 이름이다.
음식 사이트 ‘이튼쿡’에서 출발
술 없이 하룻밤에 7차까지
먹고 평가하면서 친목도모
직장인에서 요리사 전업도
은행원도 있고 회사원, 의사, 파티시에, 컴퓨터 프로그래머 등 직업군이 다양하다. 성 김 주한 미국대사와 김양 전 국가보훈처장, 피터 탄 하이 추안 주한 싱가포르대사 등이 예 교수와의 인연으로 축하 모임에 참석했다. 성 김 대사도 미식가다. 미국 국무부 북핵특사 자격으로 북한을 방문했을 때도 평양냉면에 대한 기대를 품고 갔더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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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폭클럽의 10주년 행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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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0년대 싸이월드 등의 인터넷 포털을 기반으로 맛집 동호회들이 생겨나기 시작했다. ‘좀 뜬다’는 맛집을 찾아 주유하는 ‘맛집 노마드족’의 활동은 왕성했다. 이들이 몰려간 맛집은 여지없이 대박 행진을 달렸다. 이후 개인 블로거들의 활동이 더 도드라지면서 동호회보다는 파워 블로거들의 영향력이 커졌다. 맛집 검색은 주로 블로거들이 올린 내용으로 채워졌다. 하지만 파워 블로거들도 맛집 동호회 한둘은 가입해서 활동하던 이들이 많았다. 현재 음식평론가로 종횡무진하는 박태순씨도 ‘건다운’이라는 필명으로 활동했던 이였다. 일반적으로 동호회는 회원들끼리의 알력이나 금전적인 문제로 각종 분란을 겪기 마련이다. 동호회가 쪼개지고 아예 문을 닫기도 한다. 예폭클럽은 큰 분란을 겪지 않고 10년을 버텼다. “셰프도 인간성이 좋은 이들이 솜씨가 좋습니다. 우리는 학연, 지연 따지지 않고 모였습니다. (맛을 즐기겠다는) 순수한 목적이 아니었다면 오래가지 못했을 겁니다.” 예 교수의 말이다. 그는 주변에서 음식평론가 협회를 만들자거나 세미나나 포럼을 하자는 등의 제안을 여러번 거절했다. 프로젝트를 제안한 식품회사도 있었다. “(예폭클럽은) 회원들의 카타르시스 공간이자 휴식처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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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주년 행사에 등장한 오징어순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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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폭클럽의 출발은 1990년대 말 생긴 ‘이튼쿡’(eatncook)에서부터였다. 음식전문지인 <베스트 레스토랑> 등을 발간했던 ‘이튼쿡’은 회비를 받고 누리집을 장안에 맛 좀 안다는 이들의 공론의 장으로 개방했다. ‘맛’에 관심있는 이들은 다 모였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그야말로 음식 관련 누리집의 효시라고 할 만했죠.” 예 교수의 평이다. 박태순씨 같은 음식 칼럼니스트나 파워 블로거들 다수가 이튼쿡에서 활동했었다. 디지털카메라가 대중화되기 전이었다. 회원들이 맛본 음식을 화려한 글로 올리면 자정이 넘은 시간에도 번개모임이 결성됐다. 하지만 2000년대 초 이튼쿡은 무리한 외식업 진출이 원인이 돼 부도를 맞았다. 회원들은 지루한 일상을 채워줬던 맛깔스러운 취미 하나를 잃어버리게 됐다. 당시 이튼쿡 회원들 중에서 예 교수는 군계일학으로 눈에 띄는 고수였다.
예폭클럽의 방장 ‘삐리고’(본명 김한석)씨는 이렇게 말했다. “당시 교수님이 등장하시면서 와인의 세계도 알게 되었어요. 한식이나 발효음식도 와인과 잘 맞는다는 사실을 깨달았죠. 교수님은 전세계를 많이 여행하시기에 알려주시는 음식은 듣도 보도 못한 것들이 많았어요. 대한적십자사 총재특보로 평양도 다녀오셨는데 옥류관의 평양냉면 얘기는 귀에 쏙쏙 들어왔죠.”
다른 음식 동호회인 ‘다인포유’(dine4u) 등으로 간 이들도 있었지만 대다수는 자연스럽게 예폭클럽으로 모였다. 이후 더러는 음식 동호회인 ‘에피큐어’로 옮기기도 했다. 현재 예폭클럽은 300여명 정도가 활동한다. 가입만 하고 활동이 뜸한 이들을 정리하고 회원의 추천으로 신입회원을 받다 보니 신입회원이 많이 늘지는 않았다. 그중에는 <추억은, 별미> 등을 펴낸 ‘라자냐’란 필명으로 활동하는 요리연구가 강선옥씨도 있었다.
예폭클럽 동호회 회원들의 미식탐험은 요즘 ‘먹방’들이 울고 갈 수준이었다. 하루 저녁 7차까지 가는 일은 예사였다. 하루는 냉면집에 꽂혀 서울 시내 유명 냉면집 3곳을 돌았다. 시원한 면발로 배를 가득 채웠으나 회원 중 한 이가 “요즘 ○○치킨집이 사람이 많다던데”라고 하자 너도나도 발걸음을 치킨집으로 향했다. 저녁식사를 강북의 칼국수집에서 하고 2차로 강남의 횟집으로 넘어갔다가 다시 3차를 강북의 찜닭집으로 향하다 보면 동이 튼다. 비용은 당연히 n분의 1이다. “살찌고 돈도 들지만 과음하는 모임이 아니기에 좋고, 다채로운 음식을 한번에 비교할 수 있어서 즐거웠다”고 방장 삐리고가 말한다. 필명 ‘무스’로 활동하는 김정화씨는 “요즘은 그렇게 못 먹어요. 너무 슬프죠. 그때는 모험심이 강했어요”라고 한다. 용산 미8군 내 드레곤빌리지호텔의 파티시에인 그는 10주년 기념 케이크도 직접 만들어 왔다. 가로 65㎝, 세로 45㎝, 높이 15㎝의 케이크는 그다지 달지 않으면서도 달콤한 맛을 선물했다.
회원들 중에는 김씨처럼 요리사로 일하거나 아예 그쪽으로 진로를 바꾼 이들도 있다. 창업을 준비하면서 클럽에 가입한 그란구스또 오너 셰프인 이경태씨는 “혼자 음식 테스트 하러 다니는 것은 한계가 있습니다. 함께 중식당에 가서 10가지 넘는 메뉴를 맛본 적이 있는데, 그런 식의 맛 테스트가 도움이 됐죠”라고 한다. 창업한 뒤에도 회원들을 불러 평가를 받았다. “직업도 다 달라 고객의 눈을 제대로 파악하는 기회가 됐어요.” 요즘 서울 종로구 팔판동에서 경양식으로 미식가들에게 인기몰이중인 ‘그릴 데미그라스’의 오너셰프 김재우씨도 예폭클럽 회원이다. 이튼쿡 시절부터 ‘맛의 달인’이란 필명으로 활동했던 그는 본래는 증권회사 직원이었다. “클럽 활동을 하다가 너무 음식이 좋아져서 직접 하자 나섰어요.”
10년의 세월이 지나자 회원들은 음식에 관한 해박한 지식을 겸비한 고수들이 됐다. 10년 전 그저 “쉽게만 보였던 냉면”도 결코 간단한 음식이 아니라는 사실도 알았다. 음식을 대하는 겸허한 자세가 자연스럽게 몸에 배었다. 화려한 미사여구를 구사하면서 나누는 과시형 음식 대화는 자취를 감춘 지 오래다. ‘요즘 인기다’ 소리에 우르르 몰려가지도 않는다. 긴 세월 한자리를 지켜내는 “마음 편한” 곳을 찾는다. 한달에 한번 하는 바비큐 파티도 큰 즐거움이다. 요즘 예폭클럽은 변신중이다.
예폭클럽 같은 음식 동호회가 더 뻗어나가기에는 힘든 환경이라고 보는 전문가가 많다. 개인 블로거들이 외식업계에 미치는 영향력이 크다. 하지만 과거 음식 동호회의 소통방식이 필요하다고 보는 시각이 있다. 동호회에서는 각종 정보들이 토론을 통해 걸러지기 때문에 심각하게 잘못된 정보가 유통되기 힘들다. 블로그는 개인적인 관점 때문에 자칫 잘못된 정보가 유통될 수도 있다. 심지어 요즘은 기업에서 홍보 블로거 군단을 거느리고 있는 곳들도 있다. 이런 현실 속에서 예폭클럽은 회원들간의 소통에 더 집중한다. “스마트폰이 출시되자 회원들의 활동이 예전만 못했어요. 싸이월드 기반이라서 핸드폰으로 사진을 찍은 다음에 다시 피시에 옮겨 올려야 하니 불편하죠.”(삐리고) 그는 최근 네이버 밴드에 방을 만들었다. 한국 외식업계에 크고 작은 영향을 미치는 맛집 동호회는 계속 진화중이다.
글·사진 박미향 기자
mh@hani.co.kr
사진 예폭클럽 제공
>>> 예폭클럽이 추천하는 송년회 장소
목란 중식당. 대만대사관 주방장 출신의 오너셰프인 이연복씨가 운영. 군만두나 짬뽕 같은 대중적인 음식뿐만 아니라 특별한 맛의 중식도 즐길 수 있음. 최근 장소를 옮겨 단체손님 27명까지 가능.(서울 서대문구 연희동 132-28, ☎02-732-0054)
꺼멍도새기 흑돼지전문점. 일본 가고시마 스타일의 흑돼지 샤브샤브를 먹을 수 있는 드문 집. 돼지고기 집 같지 않은 현대적인 분위기. 단체 100여명 가능.(서울 중구 북창동 5-2, ☎02-778-1142)
한성식당 한식. 칼국수, 빈대떡, 제육, 모둠전 등 소박한 음식으로 조촐한 송년회에 딱 맞는 집.(서울 강남구 논현동 64-13, ☎02-544-0540)
역전회관 한식. 1962년 문 연 역사가 오래된 집. 바싹불고기, 굴무침 등의 음식. 최근 신축해 방도 넓고 쾌적하다.(서울 마포구 염리동 173-21, ☎02-703-0019)
평래옥 한식. 초계탕, 빈대떡, 제육, 냉면, 육개장 등이 고루 맛있는 집. 저예산으로 실속 있는 송년회 장소로 적당.(서울 중구 저동2가 18-1, ☎02-2267-5892)
트라토리아 몰토 이탈리아 레스토랑. 오붓한 실내와 가정식 음식이 맛깔스럽다. 와인에 해박한 오너셰프가 주인.(서울 강남구 신사동 566-13, ☎02-511-0906)
투뿔등심 한우 전문점. 3년 전 문을 열고 최근 6호점까지 연 고깃집. 등심 150g이 3만2000원 정도이며 와인 잔 사용료가 없다.(서울 강남구 논현동, ☎02-517-3794)
하하 중식당. 12명까지 단체가 가능한 중식당. 1인당 2만~3만원 예상하면 넉넉하게 송년회를 즐길 수 있는 곳.(서울 마포구 연남동 229-12, ☎02-337-0211)
병천유황오리 훈제 유황오리 전문점. 서울 종로 일대에 분점이 3호점까지 있음. 직장인 회식하기에 좋은 곳.(서울 종로구 청진동 6, ☎02-722-1530)
범스 모던한 한정식. 화학조미료를 사용하지 않은 한식류가 많다. 펍 분위기가 가미됐지만 술보다는 따끈한 밥 한끼로 송년회 하고 싶은 이에게 추천.(서울 강남구 청담동 88-8, ☎02-3447-088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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