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주민들이 직접 지은 경북 봉화의 양원역 대합실.
|
[esc] 여행
테마열차 타고 즐기는 봉화 승부역~양원역 계곡 트레킹
낙동강 최상류. 태백시 황지에서 발원한 물이 봉화 땅을 굽이쳐 흘러가 안동호로 들어간다. 맑고 푸른 물길 따라 영동선 철길이 흐르고, 철길 따라 관광객 실은 눈꽃열차·순환열차·협곡열차·별밤열차도 흐른다. 이 철길에 놓인 두 오지 기차역인 양원역·승부역 사이, 봉화군·울진군의 경계를 이루는 물길·산길을 열차로 또 걸어서 둘러보며 주민 이야기를 들었다.
▷ 화보를 보시려면 누르세요
주민들이 만든 ‘최초 민자역사’ 양원역
“그 물에다 어떻게 멱을 감나? 시꺼멓고 드러워서 고기도 못 살았는데.” 경북 봉화군 소천면 분천리 원곡마을 양원역에서 만난 주민 이봉남(75)씨의 말이다. 물론, 탄광 개발이 한창이던 30년 전 옛날 얘기다. “지금은 고기도 많아졌고 관광객도 와가 눈 귀경도 하고 얼매나 좋아졌노.” 19살에 소천면 임기리에서 “모다카(선로반 작업용 모터카) 타고 시집왔다”는 이씨 앞엔 감자 한 소쿠리와 콩 한 봉지, 시래기와 파 몇 묶음이 놓여 있다. 협곡열차·순환열차·눈꽃열차 관광객들에게 팔 것들이다.
양원역은 ‘세계에서 가장 작은 역’ ‘국내 최초의 민자 역사’로 불린다. 1955년 영주역~철암역(태백) 구간이 뚫리며 영동선이 개통된 뒤에도 원곡마을엔 역이 설치되지 않았다. 눈앞에 지나가는 기차를 놔두고, 철길을 따라 걸어 승부역까지 나가 기차를 타야 했다. 춘양장에서 생필품을 사가지고 돌아올 땐, 기차가 마을을 지날 때 차창 밖으로 장보따리를 먼저 던져놓고, 승부역에 내려서 걸어왔다고 한다.
양원역에서 10분간 정차하는 사이
막걸리 한사발에 잔치국수 흡입
고사리·시래기 흥정하고
대합실 구경까지 마쳐
터널·철교 등을 걸어 오가느라 목숨을 잃은 주민도 많았다. 역을 만들어 달라는 주민들 염원이 이뤄진 건 1988년. 임시 정차역으로 지정되자, 주민들은 대합실·화장실을 만들고 ‘양원역’이란 역 이름도 붙였다. ‘양원’이란, 물길로 나뉜 봉화·울진의 ‘양쪽 원곡마을’을 뜻한다.
10여명이면 가득 차는 대합실 하나와 화장실이 전부이던 양원역엔 최근 열차 관광객이 늘면서, 농산물 판매장과 간이식당 등이 들어서 북적인다. 하루 두번 왕복하는 무궁화호 외에 협곡열차·순환열차 등이 이곳에 정차한다.
10분간 정차하는 열차에서 내린 관광객들이 하는 일은 대체로 이렇다. 아저씨·아줌마 할 것 없이 일단 양재기에 막걸리를 가득 따라 벌컥벌컥 들이켠다. “캬, 좋네” 하며 찐감자·고구마나 돼지껍데기를 안주로 한잔 더 한다. 번개처럼 말아 가져오는 잔치국수를 번개처럼 흡입한 뒤 고사리·무말랭이·호박오가리·시래기를 흥정해 사들고는 손바닥만한 양원역 대합실을 구경하고 화장실에 들러 차에 오른다. 10분 사이에, 마시고 먹고 떠들고 흥정하고 사고 구경하고 볼일 보는 일이 다 이뤄진다.
|
2 분천역~양원역~승부역~철암역을 오가는 협곡열차(V트레인). 3 양원역에서 내려 간식을 먹는 협곡열차 관광객들. 4 승부역과 양원역 사이에 개설된 ‘낙동강 세평비경길’은 ‘낙동정맥 트레일’의 한 구간이기도 하다. ※ 이미지를 누르시면 확대됩니다.
|
‘하늘도 세평 꽃밭도 세평’ 승부역
봉화군 석포면 승부리 승부역. 국내에서 가장 외딴 곳에 자리잡은 기차역으로 꼽힌다. 요즘엔 눈꽃열차, 협곡열차 등으로 이름난 역이 됐지만, 90년대까지 열차 교행을 위한 간이역에 지나지 않았다. 찻길도 없는 험준한 산골로, 교통수단은 기차가 유일했던 오지 마을이었다. 지금도 승부역으로 이어진 찻길은 석포에서 들어가는 좁은 시멘트 포장길이 유일하다.
60년대 중반, 근무하던 역무원이 철길 옆 바위에 페인트로 썼다는, ‘승부역은 하늘도 세평이요 꽃밭도 세평이나, 영동의 심장이요 수송의 맥박이다’란 글귀는 외딴 승부역의 위치와 특징을 드러내는 상징물로 자리잡았다.
승부역 주변은 1955년 영암선(영주~철암 87㎞)이 이어지며 개통된 영동선의 마지막 난공사 구간이었다. 험준한 바위산을 뚫는 터널 공사와 계곡의 철교 공사 과정에 수많은 일꾼들이 목숨을 잃었다고 한다. 이를 기리는 ‘영암선 개통 기념비’(이승만 글씨)가 철교와 터널이 내려다보이는 언덕에 세워져 있다.
이 오지 역에서 관광객을 맞이하는 건 1명의 역무원(3명 교대근무)과 역무원도 이름을 모르는 개 한마리다. “관광열차 도착 시각을 기막히게 알고 나타나 기다린다”는 이 누렁이는 오른쪽 뒷다리가 없다. 밀렵꾼의 덫에 걸려 잃었기 때문이다. 그래도 절뚝거리며 달려와 관광객들을 기다린다. 승부역에 근무했던 역무원 정회(현 분천역 근무) 과장은 “마을의 한 할머니가 기르던 개인데, 할머니가 병원에 입원한 뒤로 역 주변에서 살고 있다”고 말했다.
강물이 얼면 역 앞 물길에는 전통 썰매를 탈 수 있는 관광객 놀이터가 만들어진다.
철길·물길 따라 승부역~양원역 트레킹
주민들 애환 깃든 승부역과 양원역, 두 역 사이에 최근 아름다운 물길과 걷기 좋은 숲길을 두루 거느린, 새 트레킹 코스가 마련됐다. 코레일이 제안하고 봉화군이 지원해, 지난 11월22일 선보인 ‘낙동강 세평 비경길’이다. ‘세평’은 ‘하늘도 세평이요…’에서 따왔다.
트레킹 코스를 만든 코레일 여객본부 김태형 단장은 “외지인 발길이 거의 닿지 않던 외딴 골짜기의 철길과 물길을 활용해 국내 최고의 트레킹 코스를 만들고 싶었다”며 “겨울엔 기암절벽과 어우러진 설경이, 봄가을로는 청정 숲과 물길이 볼만할 것”이라고 자랑했다. 5.6㎞ 길이의 ‘세평 비경길’(2시간 소요)은 승부역 철교 밑 강변 돌밭길로 시작해 철로변 시멘트길과 산비탈 숲길을 거쳐 다시 강변길로 내려서며 마무리된다. 나무계단이 설치된 일부 구간을 제외하곤 완만하다.
며칠 전 내린 눈이 거의 녹아 설경을 볼 수 없는 점이 아쉬웠지만, 물빛은 짙푸르게 투명했고 초겨울 차고 맑은 바람이 물가의 마른 억새숲을 흔들어대 걷는 맛을 돋워주었다. 특별하게 돋보이는 경치는 없어도, 굽이치는 물길이 볼만하고, 물가로 치솟은 바위절벽들과 물길에 들어앉은 거북바위 등 아기자기한 볼거리들이 이어진다.
이 길은 본디 원곡리와 각금마을(까끄무) 등 산골짜기에서 살던 주민들이 승부역을 오갈 때 이용하던 통로였다. 철길로 걷는 이들이 많았지만, 터널·교량에서 사고가 잇따르면서 산길과 물길을 돌아 걸어다녔다고 한다. 승부역에서 4㎞ 지점 산비탈에 무너져가는 빈집들이 흩어진 각금마을 터가 있다. “까끄무서 하마 집덜 나간 제가 한 이십년 됐납다. 교통 나쁘지 공부 씨기기 힘들지, 한집 나가니 고마 다 나가뿌리드라.”(원곡리 이봉남씨)
물소리와 바람소리만 자욱한 가운데 무너진 돌담과, 망가진 리어카 안쪽으로 자라올라 녹슨 쇠붙이와 한 몸이 돼버린 나무, 산길에 세워진 낡은 나무 전봇대들이 옛 마을의 흔적을 드러낸다.
협곡 달리며 야경 즐기는 ‘별밤열차’
낙동강 상류 승부역과 양원역이 포함된 철길을 달리며 계곡과 물길을 감상할 수 있는 열차가 지난봄부터 운행된 ‘협곡열차’(V트레인)다. 이 협곡열차를 활용한 ‘V트레인 별밤열차’가 12월6일 새롭게 선보였다. 코레일은 매주 토·일요일 저녁 6시 봉화 분천역을 출발해 양원역·승부역 거쳐 태백시 철암역까지 오가는 ‘별밤열차’를 내년 3월 말까지 운행한다. 별빛 조명으로 무장한 야간열차를 타고 달리며 별과 야경을 감상하는 열차다. 레이저와 엘이디 조명시설, 목탄난로 등이 설치된 차내에서 승무원들이 펼치는 공연을 감상하고, 사연이 깃든 음악을 신청해 들을 수도 있다.
예약 코레일관광개발(www.korailtravel.com). (02)2084-7786.
봉화/글·사진 이병학 선임기자
leebh99@hani.co.kr
>>> 봉화 여행 정보
가는 길 협곡열차(오전 10시, 오후 1시50분)나 별밤열차(금·토 오후 6시)는 봉화 분천역에서 출발한다. 수도권에서 승용차로 영동고속도로~원주 만종분기점~중앙고속도로~풍기나들목~영주~봉화~소천~분천역. 서울역에서 매일 아침 7시45분 출발하는 ‘O트레인’(순환열차)을 이용하면 승부역, 양원역, 분천역에 바로 갈 수 있다.
먹을 곳 분천역 앞에 천막을 치고 시래기국밥·육개장·도토리묵 등을 파는 간이식당들이 많다. 양원역(1곳)과 승부역(4~5곳)에도 간이식당이 있다.
묵을 곳 봉화읍내나 태백시내에 있는 모텔을 이용한다.
주변 트레킹 코스 승부역과 양원역 주변엔 ‘낙동강 세평 비경길’ 말고도 양원역~구암사~무주암 코스(2.3㎞), 양원역~비동승강장(체르마트길) 코스(2.2㎞), 승부역~배바위재~비동 코스(6.5㎞) 등 다채로운 트레킹 코스가 마련돼 있다.
여행 문의 코레일 경북본부 (054)639-2126, 봉화군청 문화관광과 (054)679-6321.
▷화보 바로가기 : 세상에서 가장 작은 역
광고
기사공유하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