등록 : 2013.12.18 19:55
수정 : 2013.12.19 13: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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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할머니가 그리워 사먹은 곰국. 사진 강백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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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esc] 백수의 청춘식탁
지난 여름, 외사촌동생 은진이의 결혼식을 보름 앞두고 외할머니는 교통사고를 당하셨다. 할머니의 느린 걸음으로 횡단보도를 건너기에는 파란불은 너무 빨리 꺼졌다. 길을 채 못 건너신 외할머니를 버스 운전기사는 보지 못했다. 고운 한복을 차려입으시고 가장 행복한 눈물을 흘리고 계셨어야 할 외할머니는 결혼식장에 오지 못하셨다. 하얀 침대에 누워 무슨 꿈을 꾸시는지, 여름 가고, 낙엽 지고, 어느덧 눈이 내리는데, 아직도 눈을 뜨지 못하시고 계시다. 뇌사 상태다. 기적이 일어나지 않는 한 할머니는 다시 일어나실 수가 없다.
어려서부터 우리 형제는 여름방학에 한 번, 겨울방학에 한 번 외가를 다녀왔다. 나와 내 동생은 외가에 내려가는 것을 좋아했지만 외할머니와 외할아버지를 뵐 수 있기 때문은 아니었다. 음식점을 하시던 외삼촌과 외숙모는 우리에게 늘 돈가스와 스파게티 같은 맛있는 것들을 해주셨다. 어린 입맛에는 온갖 정성이 들어간 외할머니의 손맛보다는 외삼촌과 외숙모의 음식이 더 맛있었다. 외할머니는 1년에 두 번 뵈니 뵐 때는 좋지만, 잔소리가 많으시고 쉽게 서운해하셔서 같이 있을 때는 힘들었고, 또 우리가 떠날 때 저 멀리 멀어질 때까지 손을 흔들며 아쉬워하시던 모습은 늘 애잔했다. 외할머니는 무뚝뚝하지만 따뜻한 분이셨다. 어느 날 곰국을 끓여 주셨는데, 너무 맛있어서 몇 그릇이나 비웠더니, 그 후로 내가 내려가는 날이면 언제나 몇 시간이나 걸려 큰솥에 곰국을 끓여 주셨다. 외할머니를 떠올리면 그 곰국의 뜨거운 맛이 가장 먼저 떠오른다. 실제처럼 느껴지는 감각이었다.
그런 외할머니가 사고를 당하셨다니 잠시 충격적이었고, 슬픔도 느낄 수 없으리만큼 멍해졌다. 그저 “할머니 어떡하지, 어떡하지” 외쳤다.
외할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줄곧 혼자 사셨던 외할머니의 유일한 낙은 우리 엄마와 하는 전화통화였다. 그런 엄마가 돌아가시고, 그 빈자리를 조금이라도 채워보고자 혼자 외가에 내려가곤 했다. 그럴 때마다 외할머니는 내가 딱하다며 통곡에 가까운 울음을 토하셨다. 나는 애써 잊고 지내는 엄마에 대한 그리움이 외할머니의 눈물로 되살아나는 게 겁나서 외가에 가는 것도, 외할머니와 통화를 하는 것도 부담스러웠다. 매번 ‘전화를 드려야지, 드려야지’ 하면서도 그 부담감에 선뜻 번호를 누를 수가 없었다. 내려갈 때마다 그렇게 맛있는 곰국을 얻어먹었으면서 그깟 전화 한 통이 뭐가 어렵다고! 그때나 지금이나 마음의 빚으로 남아 있다.
옛날에 살갑지 못했던 것이 너무 죄송스럽기도 하고, 참담한 모습으로 누워 계시는 모습을 도저히 마주할 자신이 없어서, 나는 아직도 할머니가 누워 계신 병원을 찾지 못했다. 그런 주제에 외가 식구들에게 전화가 걸려올 때마다 가슴이 덜컥 내려앉는다. 할 수 있는 것도 없고, 다만 조마조마하며 기다릴 뿐이다. 외할머니가 먼 길을 떠나시는 날을 말이다. 많은 사람들이 외할머니가 빨리 떠나시는 게 당신에게도 좋으실 거라고 얘기한다. 그 말이 충분히 이해가 가고, 나 역시도 머리로는 그렇게 생각하지만, 왜 그렇게 그 말이 싫을까! 오늘처럼 추운 날 그 맛이 더욱 생각난다.
강백수 인디뮤지션·시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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