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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3.12.25 20:30 수정 : 2013.12.26 11:29

1 필리핀 북부 내륙 이푸가오 지역 바나우에 주변의 계단식 논 풍경. 2000여년 전부터 원주민들이 손과 쟁기로 건설한 경작지다.

[매거진 esc] 필리핀 북부 내륙 여행

슈퍼태풍으로 폐허가 된 필리핀에 필요한 게 구호물품만은 아니다. 주저하는 여행자의 발길 또한 크나큰 위로다.
2000년의 역사를 가진 경이로운 계단식 논을 비롯해 루손섬의 훼손되지 않은 자연과 삶을 찾아갔다.

지난 13일 밤 필리핀 마닐라 국제공항 입국수속장. 테이프로 꼭꼭 묶인 커다란 상자들이 산더미처럼 쌓여 있다. 공항 직원들이 하나하나 열어 내용물을 살펴본다. 상자를 가득 채운 것은 의류와 식품들이 대부분. 한국의 민간단체들이 태풍 피해지역 주민들에게 보내는 구호품이다. 필리핀은 지난달 강타한 슈퍼태풍 하이옌으로 ‘올해 지구촌 최악의 재해’를 당했다. 각국에서 구호의 손길이 닿고 있지만, 태풍 여파로 된서리를 맞은 건 관광시장이다. 필리핀 여행지 취재를 나서기 전 가슴 한쪽에 자리잡았던 ‘고통을 겪고 있는 나라의 여행지 소개’라는 부담감은, “필리핀을 여행하는 것이야말로 최고의 구호품”이란 필리핀 관광청 쪽의 설명으로 씻어낼 수 있었다.

필리핀의 본섬인 루손섬 북부는 개발의 손길이 미치지 않아 아직은 관광객 발길도 뜸한 지역이다. 태풍 피해에서도 벗어나고 유명세도 덜 탄 볼거리들이 원시림으로 가득 찬 산악지대 구석구석에 숨어 있다.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으로 등록된 경이로운 계단식 논 등 루손섬 동북부의 경관과 주민들의 삶을 들여다봤다.

2 바나우에 계단식 논 전망대에서 만난 어린이.

루손섬 북부 내륙 코르딜레라주 이푸가오 지역의 소도시 바나우에. 수도 마닐라에서 북쪽으로 차로 8시간을 달려야 하는 곳이다. 비행기로는 1시간 넘게 투게가라오(루손섬 동북부 카가얀주의 주도)까지 날아간 뒤 다시 차로 4시간을 꼬박 달려야 닿는 오지 산골이다. 새벽 세시에 숙소에서 출발해 어둠이 채 가시지 않은 싱싱한 아침 논 풍경을 만날 수 있었다. 비가 흩뿌리는 가운데 찾아간 해발 1200m의 산골짜기는 온통 논두렁투성이였다. 산비탈 비좁은 도로를 따라 늘어선 허름한 기념품 가게들 사이에 세워진 ‘환영, 메인 전망대’ 간판 옆으로 들어서자, 구불거리는 그것들이 눈에 들어왔다. 첩첩산중 산자락마다 켜켜이 쌓아올려진 무수한 논두렁들. 무논에 구름 조각들을 담은 가늘고 긴, 수십 수백층의 논두렁들이 카메라를 기다리고 있었다. 방금 모내기를 끝낸 곳, 벼가 파랗게 자라오르는 곳, 누렇게 빛바래가는 곳밭으로 바뀐 곳 등 논의 빛깔도 제각각이다. 산자락을 감싸며 우아하게 또 위태롭게 굽이치는 논두렁길을 따라 농사꾼이 걸어가고, 그 뒤를 따라 강아지가 노닐고 관광객도 거닌다.

바나우에 여행안내소의 가이드 로버트(32)는 “다른 지역에선 대부분 3모작을 하지만, 이곳은 날씨가 선선해 1모작을 하는 곳이 많다”며 “아래쪽 논에선 2모작, 3모작을 하는 곳도 있다”고 말했다. 1년 중 계단식 논이 최고의 경치를 선사하는 시기는 대부분의 논들이 푸른빛으로 덮이는 6~7월이다.

중국 윈난성, 인도네시아 발리섬 등도 빽빽하게 이어진 계단식 논으로 이름높은 곳이지만, 이푸가오 지역 계단식 논들은 역사성에서 타의 추종을 불허한다. 이미 2000여년 전 산악지형 모습 그대로 진흙을 쌓아올려 만든 경작지를 지금도 사용하고 있어, 고고학적 가치가 매우 높다. 논은 주민 개개인의 소유지만, 주민들은 ‘바짱’(baddang)이란 일종의 품앗이를 통해 독특한 농경사회를 이루고 있다. 이런 전통은 지금도 이어져 파종과 수확, 관개시설 관리나 무너진 곳 보수, 집짓기 등을 집단 작업으로 진행한다고 한다. 이런 점들이 평가돼 유네스코 세계문화유산 목록에 이름을 올렸다. 이푸가오엔 바나우에, 바타드, 훙두안, 하파오, 방아안, 마요야오, 키앙안 등 7개 지역에 모두 400㎢에 이르는 계단식 논들이 펼쳐져 있다. 일부 지역은 돌로 쌓은 논두렁들이다. 이 많은 논들의 논두렁 길이를 어떻게 재어 봤을까. 바나우에 관광안내소 앞 안내판엔 “논두렁 길이를 모두 이으면 지구를 반 바퀴 도는 거리”라고 적혀 있다.

3 바나우에 아파르응아오 민속마을에서한 주민이 나무를 다듬고 있다.

바나우에엔 투왈리족, 아양안족 2개 부족의 주민 2만5000명이 18개 마을에 흩어져 산다. 이푸가오(‘산에서 온 사람’이란 뜻) 지역 부족들은 본디 다른 지역 부족의 간담을 서늘케 하던 무서운 존재였다. 적의 머리를 잘라 와 창에 꽂아놓고 축제를 벌이던 ‘헤드 헌터’ 부족 중 하나가 이들이다. 옛날부터 좁은 산비탈의 경작지를 놓고 부족간 다툼이 잦았다고 한다. 부족 중 하나가 죽임을 당하면, 붉은 꽃잎을 온몸에 붙이고 춤추며 닭의 목을 잘라 죽이는데, 닭이 쓰러져 가리키는 쪽 사람이 복수 임무를 띠고 상대 부족 가해자의 머리를 잘라 와야 했다고 한다. 베어 온 목을 창에 꽂아 걸어놓고 둘레를 돌며 춤을 췄다고 한다. 가이드 로버트는 “‘헤드 헌터 족’이란 말이 여기서 유래했지만, 그런 관행은 이미 오래전에 사라졌다”고 말했다. 영어와 타갈로그어, 루손섬 북부 내륙 코르딜레라 지역 언어인 일로카노어, 그리고 투왈리어까지 4개 언어를 구사하며 가이드 일을 하는 그는 ‘헤드 헌터’ 투왈리족의 후예다.

이푸가오 지역 계단식 논들은
2000여년 전 산악지형 그대로
진흙을 쌓아올려 만든
경작지를 지금도 사용한다
옛 전사 부족의 문화도 남아있다

바나우에 뷰포인트 지역의 계단식 논 경관은 지프니(필리핀의 주요 대중교통수단) 등 차량으로 이동하며 감상할 수 있으나, 바나우에의 또다른 지역 바타드의 더 가파른 산비탈의 계단식 논들을 보려면, 1시간 이상 차로 산길을 달린 뒤 2시간쯤 산행을 해야 한다.

쏟아지는 비와 빠듯한 일정으로 바타드 트레킹을 포기하고 투왈리족 마을의 옛 모습을 재현해 놓은, 아파르응아오 마을을 찾았다. 부족의 주거 형태 등 전통문화와 생활상을 살펴볼 수 있는 곳이다. 누마루를 올린 2층 목조 주택은 못을 쓰지 않고 조립한 것이어서 부족이 이동할 때 해체해 가져갈 수 있다고 한다. 집 벽엔 물소의 머리뼈 등 수많은 동물의 뼈들로 장식했다. 뼈가 많을수록 부유함을 뜻한다고 한다. 주민 2명이 전통 직조 모습과 나무 연장 만드는 모습을 재현해 보여줬다. 나무절구나 불을 피우는 풀무, 사냥용 창 등도 볼 수 있다.

이장쯤 되는, 마을의 대표자 안드레스 두누안(77)이 풀로 엮어 만든 옷과, 뾰족한 쇠붙이가 달린 검은색의 묵직한 창을 보여줬다. 풀옷을 입고 사냥을 가면 사슴, 멧돼지 등이 눈치채지 않게 가까이 다가다 창을 던질 수 있다고 한다. 과거엔 이런 창에 ‘헤드 헌터’가 베어 온 목을 걸어놓고 돌며 춤을 췄으리라. 빗줄기가 굵어져, 그와 작별인사를 하고 일행이 움막으로 들어가 비를 피하는데, 그가 갑자기 창을 들고 쫓아왔다. 양손에 두 개나. “에, 이건 선물이라오. 가져가시오.” 빗물 흐르는 진흙탕길에서 미끄러지며 춤추며 내려오면서도 넘어지지 않은 건 선물로 받은 창을 지팡이 삼은 덕분이었다.

바나우에 관광안내소에서 트레킹을 포함한 다양한 일정의 계단식 논 탐방 여행상품을 운영하고 있다. 지프니 포함 4인 하루 일정에 4000페소(약 10만원, 가이드·식사·입장료 등 포함).

바나우에(필리핀)/글·사진 이병학 선임기자

leebh99@hani.co.k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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