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등록 : 2014.01.01 20:31 수정 : 2014.01.02 11:22

[매거진 esc] 백수의 청춘식탁

집에서 영화를 보거나 글을 쓸 때 혼자 술을 곧잘 마신다. 원래는 맥주를 마셨다. 그러다가 주류회사 와인사업부에 취직한 친구가 취직 기념으로 선물한 와인을 맛있게 먹게 됐고, 그것이 생각보다 저렴한 와인이었다는 사실을 알고는 와인으로 종목을 바꿨다.
술에 잘 취하지 않는 체질인 나로서는 조금이라도 알딸딸한 기분을 느끼기 위해서는 많은 양의 맥주가 필요하다. 그러다 보니 집에서 먹더라도 돈이 많이 들었다. 차라리 맥주와 와인의 도수 차이를 생각하면 싼 와인을 사 마시는 편이 돈이 덜 든다. 괜히 폼도 나고 화장실도 덜 들락거려도 된다는 이점도 있다. 만원이든 수십만원이든 알 게 뭐야! 나는 비싼 와인 맛을 모르니 싼 와인도 맛있게 먹을 수 있다.

돈을 잘 버는 부모님을 둔 선배 형을 만난 날. 나는 그때 서울 강남구 신사동에 처음 가봤다. 나도 예전에 여자들에게 허세를 부려 보려고 학교 앞 와인바에 몇번 가본 적은 있다. 최고로 비싸게 먹은 와인이 5만원이었다. 그냥 무조건 달달한 와인만 주문했다. 형은 몇십만원짜리 와인을 주문하려 했다. 와인 이름도 어려워서 뭐였는지 지금도 기억이 나질 않는다. 나는 손사래를 쳤다. 싼 와인을 먹자고 하면 아예 안 마실 거 같아서, 그냥 와인이 내키지 않는다고 하고는 보드카를 마시러 가자고 했다. 염치 때문은 아니었고 빌딩이 두 채나 있는 형의 지갑 사정을 생각해서는 더더욱 아니고, 그냥 잠시 겁이 났다.

그 와인이 내가 평소 즐겨 먹던 저렴한 와인들보다 현저하게 맛있다면, 내가 그 맛에 반해버린다면, 문제가 발생할 수 있다. 와인이 왜 1만원밖에 안 하는지를 깨달아버리면 그때는 지금처럼 맛있게 먹지 못할 것 같았다. 그렇다고 내가 이런 비싼 와인을 사 먹을 수 있는 처지도 아니고.

매번 싸구려 피시용 스피커를 쓰다가 처음 제대로 된 전문가용 스피커를 갖게 되었을 때가 생각난다. 소리가 너무 좋아서 밤새도록 음악을 켜놓았는데, 앨범 녹음을 하러 스튜디오를 몇군데 다니면서 더 비싼 스피커 소리를 들어본 이후로는 내 스피커에 대한 감흥이 없어져버렸다. 나의 1만원의 사치가 그렇게 아무런 감흥도 주지 못하게 되어버릴까봐 나는 형의 제안을 거절한 것이다. 와인도 뭐 종류가 다양하다던데 지금 내 앞에 놓여 있는 와인이 무슨 종류인지도 내 알 바 아니다.

언젠가 비싼 와인을 먹을 수 있는 경제적 능력이 되어 자주 접하다 보면 나름 와인에 대해 해박해지는 날이 올지도 모른다. 그러나 내가 와인평론가도 아니고, 괜히 입맛으로 까탈을 부리는 것보다는 지금 내 앞에 놓인 와인이 무슨 와인이건 맛있게, 즐겁게 즐기는 것이 더 행복할 것 같다. 와인만 그런가. 어쩌다 마주치는 짜릿한 경험은 때로 우리 눈앞의 현실을 더욱 초라하게 만들곤 한다. 인생의 질 자체를 향상시키는 것이 아니라면 우리 마음속에 굳이 괜한 허영을 심지 않는 것이 나을 수 있다. 물론 몇십만원 하는 와인은 무슨 맛일까 궁금하긴 했지만 조금 경솔한 추측을 해보자면, 그 형도 어쩌면 나처럼 아무것도 모르면서 허영심 때문에 그걸 주문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얼마 전 <한겨레> 문화부와 필진 송년회에서 경품에 당첨되어 꽤 좋은 것으로 추정되는 와인 한 병을 받아 들고 왔다. 앞서 말한 바와 같은 이유로 이 녀석을 어떻게 처리해야 할지 고민을 했는데, 다행히 친구들과 송년회를 하다가 만취한 상태로 호기롭게 벌컥벌컥 마셔버리는 바람에 맛은 기억이 나질 않는다. 참으로 다행스러운 일이다.

강백수 인디뮤지션·시인. 사진 강백수 제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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